Unprofessional

아시아의 어떤 회사와 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 회사의 미국 Sales rep.은 Southern California에 있고.

어제 밤에는 그 회사와 연속해서 두개의 conference call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Sales rep이 매우 이상하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 쪽에서도 8-9명이 들어가 있는 꽤 큰 meeting이었다.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미리 agenda를 넣으라고 요청을 해서 여러 팀에서 자신들의 agenda를 미리 적어 놓은 상태였고.

그런데, 그 미국에 있는 Sales rep이 이상하게 소리를 고래고래지르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혼자 막 화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꽤 크고 중요한 미팅이었는데 완전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내가 그 사람과 따로 전화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랑 일하면서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을 막 이야기하는 거다.

음….
그래, 네가 마음에 안드는게 있는 것도 알겠고, 그래서 마음 상할수도 있다는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그 미팅에서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을 해야했었니?

conferece call을 할때는 보통 우리 쪽 사람들끼리 chat을 켜놓고 이야기하면서 하는데, 우리쪽 chat에 완전히 난리가 났다.
아니, 오늘 Frank (가명) 왜그래? 무슨 일 났나?.

보통은 우리가 ‘갑’이고, 아시아에 있는 회사들이 ‘을’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짜 잘 한다. ㅠㅠ
비위 맞추어가며, 무리한 요구 하더라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편인데,
이런 반응을 보니 사람들이 다들… 많이 황당해 하는 분위기.

우리 팀 사람들이 Frank 의 반응을 보면서 한 표현은, unprofessional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쁜 일이 있거나 섭섭하더라도 그런식으로 하면 되느냐는 거다. professional하려면 그래도 일은 일이고 자신의 감정은 감정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Professional하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다시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Professional하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상태나 개인적 상황등에 관계없이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professional한걸까?

Frank 의 어제 행동은 정말 당황스러웠고, 화도 났고, Frank 에게 본때를 한번 보여줘? 뭐 그런 생각이 살짝 든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럴때 내가 professional한것은, Frank의 그런 행동에 기분 나쁘더라도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일, 이 project의 진전과 성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나?
그쪽 CEO와 연락해서 Frank 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나?
지금 회사 말고 다른 회사랑 일하겠다는 협박을 하면서 지금 상황을 바꾸어야한다고 그 회사에게 압력을 가해야 하나?
그냥 조용히 이 회사랑 일하는 것을 정리/손절하고 다른 회사를 지금이라도 알아보아야 하나?

그냥 순전히 professional한 일처리라면,
아주 dry하게 그쪽 회사의 높은 사람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고, 상황을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일을 더 함께 하기 어려울수도 있다고 투명하게 이야기하고.

그런데 문제는…그럼 Frank 불쌍해서 어떻게 해?… 이런 마음이 내게 있는 거다.
말하자면 내가 그런 의미에서 professional 하지 않은 거지.

설교

우리 목사님이 ‘안식월’을 몇개월 하고 계셔서,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몇번 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정우 형제와 둘이서 다니엘서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원래는 목사님 계시지 않는 동안 훨씬 더 많은 설교를 해야하는 줄 알고,
해야할 이야기들을 많이 쌓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가 설교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시간은 적고 해서… 무리하게 30분짜리 설교에 많은 내용을 담아서 설교하게 되고 말았다. ㅠ

내가 3번 설교 했고, 이번 주일에 내가 하는 설교로는 마지막 한번이 더 남았다.

30분짜리 4번 설교로 뭐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나.
어쩌면 내가 이렇게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언제 또 있겠나 싶어,
그냥 다소 무리하게 다다다다닥~ 쏟아놓았다.

그래도 내가 했던 설교들에 대해서 질문도 해오고, 나름대로의 고민도 이야기해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은 대화들도 조금 나눌 수 있었다.

이번주 마지막으로는, 다니엘서 9장을 본문으로 하려고 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조금 더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조금 더 눈높이에 맞추어서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가도…
뭐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하는게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싶어…
그냥 괜히 오바하지말자. 그렇게 생각.

다니엘서 9장은 개인적으로 내 삶과 기도를 획기적으로 바꾼 본문이기도 한데…
내가 그런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된 이야기를 할수는 있는 걸까.

늦게 퇴근

어제는 참 오랫만에 office에 늦게까지(?) 있다가 퇴근을 했다.
그래봐야 7시 조금 넘어서 집에 들어왔으니 아주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낮에 office에 가더라도 보통 4시 정도에는 집으로 와서 나머지 일을 집에서 하곤 하였다. 그 이유는 4시가 지나면 rush hour traffic때문에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rush hour에 운전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결국 계속 office에서 일을 하다가 결국 적당한때 나오는 것을 놓치고 6시가 넘어서 나오게 되었다.
보통 운전을 하면 35분 정도면 집에 오는데, 어제는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참 오랜만에 겪는 rush hour traffic이었다.

집에 왔는데 아내도 아직 퇴근도 안했고,
집에 먹을것도 없는 거다.
7시 조금 넘어서 들어왔는데 8시부터 conference call이 하나 있어서,
그냥 그야말로 아무거나 막 먹고, 급하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 그래…
COVID-19 이전에는 원래 이랬지.
이렇게 집에 저녁때 와서, 부랴부랴 저녁 챙겨 먹고… 그랬었지…

참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점점 pre-covid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냉이, 달래, 두릅

미국에서 한국음식을 그래도 꽤 잘 구해다 먹지만,
냉이, 달래, 두릅은 미국에서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다.

LA에 가면 이런것도 먹을 수 있으려나…
신선한 나물은 아무래도 수입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냉이, 달래, 두릅 같은 것들은 수요가 그렇게 크지 않을 테니 이런걸 미국에 수입해서 파는 유통망 같은 것이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한국에서는 이런 나물들이 얼마나 비싼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아주 대단히 비싸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기 힘든 수준을 아닐테고…
그러니 한국에서야 이런 나물을 그냥 흔하게 먹고 하겠지만…

그것보다 한단계 미국에서 구할 수 있지만 많이 먹게되지 않는 것들은,
쑥갓, 미나리, 호박잎 같은 것들.
특히 호박잎 쪄서 강된장이랑 쌈으로 먹는 건 최소한 30년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냉이, 달래, 두릅, 쑥갓, 미나리, 호박잎 같은걸 먹어보지 않는 사람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

신앙도 역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냉이, 달래를 먹어본 적도 없고, 먹을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같은…

Dallas Williard

달라스 윌라드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아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볼수는 없겠지만,
요즘 기준으로는 일찍 떠난 셈이다. 80이 되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으니.

최근 여러가지 필요가 있어서, 달라스 윌라드의 명저 Renovation of the Heart를 다시 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보니 그 책이 없는거다

영어책은 ebook이 있는데, 한국어책은 ebook이 없었다.
한국어로 읽어보고 싶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을 한 후,
주말에는 달라스 윌라드의 강의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열심히 들었다.

일단… 이분이 철학자여서, 전반적으로 설명이 좀 어렵다.
말하자면 문장에 which, who, what 같은 ‘관계 대명사’가 많이 들어간다. 문장이 길기도 하고. 그래서 이분의 글이나 강의는 한번에 후루룩~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달라스 윌라드의 실제 육성을 들으니,
뭐랄까 예전에 배웠던 좋아했던 학교 선생님을 다시 만난 느낌이 든다. 괜히 더 친숙하고 반가운 느낌…

금요일에 COVID-19 booster 맞고,
토요일에 그 핑게로 누워서 빈둥빈둥…
그러면서 달라스 윌라드 강의들을 binge watching 했다.

최선을 다하기

내게도 up&down이 당연히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열심히 하는 건 잘 했던 것 같다.

일단 할 일이 많다 싶으면,
잠 줄이고, 무지막지하게 집중하면서, 그 일들을 부지런히 하는 식으로 많이 해왔다.

학생때 정말 열심히 공부할때는,
그냥 며칠씩 잠을 안잘때도 있었고,
실제로 고등학교때 이후 거의 50대가 될때까지 하루 평균 5~6시간 정도자면서 살았다.

뭔가 해도 안되는 것을 열심히 노력만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해도 되는데 그걸 안하는건 그냥 무책임한 것이다.

50대가 넘어서면서
밤잠의 깊이도 예전같이 충분히 깊지 않아서 예전보다는 더 긴 시간을 자야하게 되었고,
조금만 무리해서 운동을 하면 탈이나는 경우도 많고,
예전과같이 꾸준히 계속 ‘최대의 추진력’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보다는 쉬는 것도 더 해야하고,
잠도 더 자야하고…

그래도 내가 여전히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계속해서 꾸준히 진실되게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있어 그렇게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는 가장 큰 동인 (motivation)은,
기준을 낮추지 않는 것이고,
기준을 낮추지 않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의 궁극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기에,
내 노력이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러니 계속 더 그 부르심에 맞추어 살고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겠다.

때로,
그 복음을 알고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holy discontent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냥 매우 낮설게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어느 이상 그 사람과 더 대화를 할 수 없게되는 벽을 경험한다.

내가 만족하는 내 직업, 직업이 만족하는 나

직업이 만족하는 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영어로,
My job satisfies me, or I satisfy my job
이라고 쓰면 조금 더 말이 되려나.

그러니까,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만족을 느끼고 사느냐 하는 것과,
그 위치에 주어진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해내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회사에서,
주어진 역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기가 얼마나 그 속에서 만족하느냐를 따지며 사는 사이 있다면,
우아… 그거 정말 완전 재앙이다. ㅠㅠ

그런 사람이 팀에 한 사람 끼면, 팀 다 망치고, 완전 엉망.

그런데,
내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떨까?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서 얼마나 내게 만족이 있느냐 하는 것과,
기독교인이된다는 기준에 내가 얼마나 만족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을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기독교인들중, 특히 소위 ‘사역자’들중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그냥 그 속에서 내가 만족하느냐 하는 것에만 주로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정말 많다.

이거 완전 재앙아닌가?

No Masks?

지난주에 MD&M West 라는 큰 tadeshow / expo에 다녀왔다.
COVID-19이 퍼지기 직전, 2020년 2월에 다녀오고 2년만에 간 것이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큰 event였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거의 하고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하는 사람들의 부류는 대충 다음과 같다.

  • 계속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 가령 등록 접수를 받는 사람들이라던가, 그 컨벤션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었다.
  • 아시아계 사람들 – 이건 아주 여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아시아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비율이 훨씬 높았다.

하루는 우리가 함께 일하는 회사가 근처에 있어서 그 회사에 방문했었는데,
그 회사 사람들은 office에서 그래도 어느정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다 마스크를 벗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어디서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실 우리 회사 office에 가더라도 회사 내에서 계속해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출퇴근할때 쓰고, 잠깐씩 필요하다 싶을때 쓰기도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할때는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바이러스를 더 확산시키는 것을 막는 일종의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런 의미에서 마스크를 벗어버리는 것을 조금은 주저하고 있다.

다들 너무 마스크를 안쓰니까,
회사에서도 그냥 사람들과 좀 떨어져있는 내 자리에 앉아 있을때는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것 같다.

Easter Paradox

2020년 부활절.
대단히 당황스러웠다.
부활절이 되었는데 다들 교회 예배당에 갈 수 없었다.
온 세계가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안드레아 보첼리가 밀라노의 텅빈 교회당 앞 광장에서 Amazing Grace를 불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Amazing Grace의 마지막 구절,
I was blind but now I see. (나는 앞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본다)을 아주 멋지게 불렀다.

나는 그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부활절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텅빈 광장, 텅빈 예배당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제는 보게되었다는 찬송을 부르는 것.

은혜

나는 교회에서 2014년, 2015년생들 (7-8살) 아이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부활절에게 나름대로 꽤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부활절이라는 늘 있지 않은 기회를 활용해서, 아직 아이들이 어리긴 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면서,
우선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무조건 제 1순이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교회란 따뜻하고 즐거운 장소라는 인상이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렇지만 한 두어달에 한번씩은 약간 더 아이들에게 좀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얼마나 그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은혜’라는 개념을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방적이면서도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의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좀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도 꽤 어렵다.

은혜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여러가지 이야기도 다 해준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이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해보면,
여전히 우리가 착해야한다…는 식의 대답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도 아이들에게 은혜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해준 후에,
과연 나는 그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