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nteer

미국 교회를 다니면서 계속 불편하게 들리는 단어가 있다.
Volunteer 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게, 교회의 paid staff가 아닌 평신도가 교회의 어떤 사역에 자원해서 참여하는 경우 그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가령 여름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평신도는 volunteer이다.

그런데,
이건…
결국 교회 사역이란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가치가 들어간 말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회에서 월급주고 일하는 교회 staff들이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기준이 낮은 동료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는,
기준이 낮은 동료 그리스도인이다.

그냥 이만큼만 하면 예수님 믿는게 충분한거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종교적 광신도가되어서 가산을 탕진하고 그러는게 좋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그건 더 깊은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을 쉬운 열정으로 커버하고자하는 천박함이다.

더 깊게 그리스를 닮아가며 성숙해가고,
자신의 약함과 싸워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여정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참으로 복되다.

돈이 부족해…

박사과정을 할때, 정말 돈이 부족했다. 정말 정말 많이 부족했다.
그 이후 직장을 잡고 직장생활을 하던 초기에도 돈이 빠듯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말 바짝 정신을 차리고 절약을 해야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던 초기 거의 점심을 사먹어 본적이 없다. 1불이면 만들 수 있는 샌드위치 하나를 싸가서 그걸로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지금은….
그렇게까지 돈이 부족하지는 않다.
대단히 돈이 많아서 늘 돈걱정 하지 않고 펑펑 쓰는 정도는 아니지만,
점심한끼 사먹는것에 인색할 정도로 부족한 정도는 아니다.

잘 아끼면 저축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작년부터 뭐랄까… 뭐를 좀 사서 깔끔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가령, 내 책상위 모니터를 좀 더 좋은 걸로 upgrade 해보고 싶다던가,
내 책상을 바꾸고 싶다던가, 컴퓨터를 새것으로 바꾸고 싶다던가…

이걸 막 질러버리는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지금도 괜찮다.

혼자 했던 생각은…
내가 배가 불렀구나. 내게, 그냥 쓸데 없이 남는 돈이 있는 것이로구나.

지난 1~2달 동안 약간 더 힘을 내서 이곳 저곳 헌금을 했다.

다시 빠듯해졌다.

돈이란, 약간 부족한듯 있어야 엉뚱한 생각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한쪽의 약자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복음주의 좌파에게 있어서 트럼프는 거의 악의 화신과 같은 존재다.
복음주의 좌파의 아젠다에는,
관용적인 이민정책, 유색인종에 대한 동등한 대우, 여성의 권리 확대, 저소득층 지원 등등이 포함된다.

내 생각에는 좋은 기독교적 가치인것 같다.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중 어떤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왜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는데,
그나마 트럼프가 자신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고 생각하니 그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속에서 점점 자신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한국에서는 소위 이대남들이 그렇다.
자신들은 여자 동료들에 비교해서 군대도 다녀와야하고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걸 건드려주고 공감해주는 이준석같은 정치인에게 열광하게 된 것.

기독교는 우파의 종교도 아니고, 좌파의 종교도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인것 같기는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 양심상 트럼프같은 사람을 지지할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어떤 특정 약자 그룹을 악마화하고 자신의 입맛에 맡는 약자 그룹의 목소리만을 대변하는 어떤 정치세력과 기독교가 자신을 동일시 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트럼프 지지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약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레미야 20: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여기서 ‘속이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Path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속이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유혹하다, 설득하다, (이성을) 꼬셔내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출애굽기 22:16에서 이 단어는 “seduce/유혹하다”로 번역하면 가장 적절한 문장에 사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아직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서 건드리면, 그는 반드시 신부의 몸값을 내고,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꾀어서’라고 번역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사사기 14:15도 역시 비슷하다.
유혹하다로 번역할 수 있고, NASB에서는 entice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신랑을 꾀어서, 그가 우리에게 낸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아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오….”
사사기 14:15에는 삼손의 아내에게 남편을 꾀어내어서 라고 할때 이 단어를 쓰고 있다.

만일 예레미야 20:7의 단어를 ‘꾀어내다’라고 번역한다면, 그 구절은 이렇게 번역이 된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꾀어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꾀임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그러니 이건,
주님이 예레미야를 유혹해서 밖으로 꾀어서 불러낸 이후, 예레미야를 힘으로 제압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건 성폭행을 연상시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성폭행범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예레미야는 정말 엄청 하나님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로 험악한 표현을 써서 하나님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진짜 나쁜 분입니다…..

때로,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왜 그러시는 겁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기도하게되는 순간이 있다.

그건,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힘든건 힘든거다. 그래도…

한국에서 오신 어떤 분과 이번에 휘튼에서 약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작년부터 오시기 시작해서 금년에 두번째로 오셨다.
미국 KOST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한참 칭찬과 기대를 말씀해주셨다.
참 감사하게 그 이야기를 쭉 듣다가 내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런데요, 저희 이렇게 하는게 정말 많이 힘이 듭니다.”

사실이다.
간사들 정말 삶의 에너지를 쥐어짜서 하고 있고,
옆에서 이것저것을 돕는 나도 매년 많이 벅차고 힘들다.

몇년전에는
아,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었다.
도무지 그냥 너무 힘이 들어서.

나도 힘이 든다.
능력도 딸리고,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도 부족하고, 돈도 많이 들고… ㅠㅠ

그래도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다.

내 젊은 시절을 이런 가치있는 일에 던져서 살 수 있었다는 건, 참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다.
내가 하는 일 이상,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 이상으로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일을 오랜시간 할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언젠간,
진짜 내 능력도, 체력도, 여력도 없어서 내가 뭘 하는게 KOSTA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이 오게되겠지만,
그리고 매년… 혹시 금년까지인가… 그런 고민을 계속 하겠지만,
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우며 응원하며 그렇게 또 해보겠다고 결심은 해본다.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해서는 오래 못한다

금년 집회에서는 이래저래 많이 눈에 띄는 일을 맡았다.

우선 저녁기도는,
올해 간사팀에서 각 강사님들과 contents를 조정하고, daily flow를 만들어내는 일들이 아무래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저녁기도를 맡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사실 정말 정말 웬만하면 전체집회 기도인도같은건 하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해왔었는데 금년에는 그렇게라도 도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LGS는 원래 나는 인도자로 뛰지 않으려고 했는데,
등록인원이 예상보다 갑자기 늘어나고, 게다가 하시기로 하신 분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못오시게 되면서, 어쩔수 없이 하게 되었다. 게다가 막판에 정말 LGS 인도자가 부족해서 내가 그냥 폭탄을 뒤집어 쓰자는 생각으로 내 그룹에 60명 넘게 배정을 하고 맡아버렸다.

이번에 follow-up에서도,
등록자가 작년보다 많이 늘었는데 follow-up offer되는 세션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를 악 물고 세 그룹을 하겠다고 자원을 했고, 지금 세 그룹을 합하면 40명 정도가 함께 나와 follow-up 세션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보니,
KOSTA에 참석한 사람들중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팔려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냥 금년 KOTSA 프로그램 여기저기에서 너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는 내가 KOSTA를 오래 섬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앞에서 드러나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도록 해야,
오래 KOSTA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한,
KOSTA에서는 execution과 presentation은 계속 분리하려고 노력해왔다.
간사들을 철저히 익명성을 유지하고, 강사님들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시도록 계속 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금년같이 이렇게 되면 나는 execution과 presentation에 둘 다 너무 적극적으로 involve하게 되어버리고, 이건 balance를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KOSTA에서 제일 잘 활용되는 것이라면,
나는 강사가 아니라 간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어느 한쪽에 더 뛰어나거나 그걸 더 좋아해서가 아니고…
강사는 그래도 노력해서 훌륭한 분들을 더 구할 수 있는데, 간사는 그게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KOSTA 관계된 모임 등에서는 ‘강사’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고 그걸 잘 지켜왔었다.
그런데 지난 몇년 그게 많이 무너졌고, 나는 그게 몹시 불편하다.

이렇게 해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생각.

R 목사님

지난 몇년동안, KOSTA에서 R 목사님과 대화를 조금씩 나누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
이분 대화를 나누면 나룰수록 정말 괜찮은 분이다!

무엇보다 아주 인상적인 것은,
이분은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에대한 이해가 매우 깊다.

이번에도 KOSTA에 참석한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시고는,
그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을 빼곡히 적어서 말씀해주셨다.

단순히 그냥 여러가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것과는 달리, R 목사님은 그것에 따른 깊은 insight도 있으신것 같다.

내가 알기로 R 목사님이 나와 그렇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50대의 목사님이 그렇게 자신이 섬기는 20-30-40대의 사람들의 생각과 흐름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오래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그 사람들에 대한 통찰도 가지고 계시니,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했는냐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었느냐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그 청중을 잘 이해하려는 노력과 자세는 역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 그분에게서 많이 배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나는 신앙과 신학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보통사람들에 비해서는 약간 더 고민과 생각을 해본 정도쯤 되지 않을까.

나는…
기독교의 핵심중의 핵심은 그렇게 많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젊은시절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이원론의 문제.
꽤 오랫동안 나는 이원론에 대한 싸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기독교적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이원론이 기독교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고 생각했다.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원론이 정말 제일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원론보다 더 큰 문제는 성(聖)자체가 실종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순간부터 이원론을 극복하자는 이야기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자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을 보니,
뭐 아주 퉁쳐서 이야기하면,
구약은 대단히 일원론적이고, 신약은 꽤 이원론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원론의 극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고, 세상의 본질은 무엇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등등이라는 것이었다.
일원론, 이원론 등등은 그냥 그것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도구들을 그때그때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거 분명히 엄청 비판하실 분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분들과 좀 대화해보면 좋겠다.)

어떤 운동이 dogmatic해지면,
그 운동인 핵심이 아닌 것들을 핵심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사람과 상황의 변화가 생겼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그저 완전히 agenda-drive 모멘텀만을 가지고 움직이게 된다.

내가 지나친 agenda-driven 을 비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십자가 복음 vs. 하나님 나라 복음

이게 KOSTA에서도 이슈가 되기도 했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금도 그 긴장은 남아있는 것 같다.
이 긴장이 첨예하게 되었을때는 벌써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일이다.

전반적으로는,
십자가 복음파에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복음이 없다는 입장이었고,
하나님 나라 복음파에서는 둘 다 의미있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이 십자가 복음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고, 그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가지로 더 relavant하다는 입장이었다.

10년이 지나서 그 긴장을 다시 복기해보건대…
나는 그 긴장이 조금 더 건강한 토론과 대화로 이어졌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결국 그 후에 십자가 복음파와 하나님 나라 복음파는 서로 그냥 cancel해버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돌이켜보건대,
엄밀하게 말해서, 그 당시 우리에게 accessible 했던 신학적 자료들로는, 이 두가지를 통합해낼만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러니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두 그룹이 각각 그 주장을 했던 근거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가 복음파에서는 그게 ‘진리’이고 ‘복음’이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매우 agenda-drive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하나님나라 복음파에서는, 물론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meta-narrative라는 이해가 있긴 했지만, 그 당시 그 시대의 청년에게는 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더 relavant하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people-drive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있겠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는
하나님나라 복음파 역시, 이제는 사람들을 잃어버린채, dogmatic하게 이야기하는 입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와 함께 역시 중요한 것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때 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이다.

10여년전 하나님나라 복음파가 십자가복음파를 향해서 했던 비판, 사람들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비판, 그것이 이제는 어떤 하나님 나라 복음파에게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기도 한다.

(살짝 강조하자면, 당연하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역시 십자가 복음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