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

1994. 3.
평형 (Equilibrium)대덕제일교회 청년부
권 오 승

0.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분명 창조주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 하늘, 물, 공기, 동식물 등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와 같은 물리 법칙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Avogadro’s number를 6.02×1023으로 정하신 분도 하나님 이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천지 창조의 첫 tape를 끊으시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우주에 광자(photon)을 만드셨고, 양자역학적으로만 설명이 되는 빛의 이중성을 빛에게 부여하셨으며 빛의 속도를 2.997924590×108 m/sec으로 정의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 우주에 설정시키셨고, 이땅에 동식물을 종류대로 지으신 그 순간부터 유전인자인 DNA의 구조는 이중 나선 구조로 결정되었다.
평형이란 어떠한 system의 가장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자연계는 이 평형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여러 자연 과학의 법칙이 그렇듯이 평형 상태를 맨 처음 정의하시고 사용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1. 완벽한 평형 – 하나님의 창조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분명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걸작품이었다. 완벽한 법칙들이 우주를 지탱하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만일 중력 상수(G)의 값이 6.67×10-11 m3/s2․kg에서 조금만 벗어났어도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가 달라져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덥거나 추웠을 것이고 우리 사람들을 비록한 여러 피조물들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최초로 설정시켜 놓으신 평형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형 상태는 완전한 평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완전한 평형의 일부로서 그 평형 가운데서 평안하고 즐겁고 아름다왔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그러한 평형을 깨뜨렸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평형 상태로 부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뛰쳐나온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고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평형 상태가 아닌,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고갈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천재 지변등을 통해 보복하는 비평형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질병과 아픔과 고난이 있고, 전쟁과 시기와 질투가 있게 되었다.

2. 활성화 에너지(Activation Energy) – 예수 그리스도
A라는 물질과 B라는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서 AB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spontaneous) 반응이라면 물질 A와 B는 화합물 AB를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 평형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형 상태가 반드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물질이 화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데에는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활성화 에너지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이다.
가령 예를 들어 유리를 보자. 유리는 비정질(amorphous)라고 불리우는 비평형 상태의 물질이다. 모든 물질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결정 구조가 있는데 우리가 보는 유리는 SiO2와 그밖에 약간의 불순물들이 그러한 결정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엉겨붙어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유리를 가만히 놓아둔다고 해서 쉽게 결정화(crystallization)하여 고유한 결정 구조를 가지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열을 가함으로써 분자 구조가 재배치되는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죄로 인한 피조 세계의 비평형 상태는 피조 세계 스스로 극복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리가 스스로 활성화 에너지를 제공하여 결정화 할 수 없듯이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 스스로는 최초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아름다운 그 피조 세계로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는 활성화 에너지가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활성화 에너지의 제공원이 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혼돈과 갈등으로 가득한 피조 세계에 내려 오셔서 피조 세계의 회복을 직접 이루어 가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시는 활성화 에너지 – 그것만이 전 피조 세계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전 세계의 회복은 이미 선포되었고 시작되었다. 건초 더미에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한 것처럼 이러한 전면적 회복은 대세이다.

3. 우리 안에서의 평형
다행히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활성화 에너지를 받은 우리들 안에서는 평형상(平衡相 : equilibrium phase)으로의 회복 반응이 이미 시작되었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그 반응의 불꽃이 거의 매우 미약하여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이 어떤 ‘맛’이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느껴본 사람들이다. 엄청난 평안, 기쁨, 안정감…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그리고 전 피조 세계가 바로 그러한 평형 상태를 기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부터도 이 비슷한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평형상의 흉내를 낸 것일 뿐이다. 마치 유리가 평형 결정상의 흉내를 내고 있는것 처럼.  이제 평형 상태로의 회복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회복은 예정된 완성이다. 회복은 대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가 결정화된 평형 상태에 있다고 믿고 있는 비평형상들이 있다. 이제 그들에게 활성화 에너지를
전해줄 매개체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형 상태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 몸을 태워 예수 그리스도라는 활성화 에너지의 불길을 전하는 일들을 하자. 우리 주위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경험한 평형 상태를, 그 엄청난 평안을 소개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활성화 에너지, 회개라는 격렬한 반응, 그리고 구원및 회복의 완전한 평형. –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개미?

1994. 3.
나는 개미?

권 오 승

코끼리 한 마리가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던 개미 무리가 갑자기 자기들의 앞 길에 커다란 회색 장애물이 생긴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한 놈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코끼리구나.’ 하고 직감하였다. 그 개미는 아마도 개미들 가운데서는 꽤나 똑똑한 놈이었나 보다. 개미들은 호기심에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짐승인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코끼리의 콧구멍이 보였다. 개미들이 보기에는 크고 긴 두 개의
터널이었다. 개미들은 ‘코끼리는 크고 긴 두 개의 터널’로 규정지었다.
다음날 그 개미들 가운데 한 마리가 또다시 커다란
회색 장애물을 만났다. 이번에 본 회색 장애물은 그냥 길다란 끈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코끼리의 꼬리였다. 개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이 두가지라니… 세상에는 여러 다른 모양의 코끼리가 있는 걸까? 아니면
코끼리라는 짐승은 개미와는 달리 변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아는 것일까? 그 똑똑한 개미의 머리로도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또 다른 개미는 또 다른 회색 장애물을 보았는데, 그것은 몹시 넓고 두꺼운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코끼리의 귀였다.

미들은 마을로 돌아와서 회의를 하였다. 도대체 코끼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터널일까, 노끈일까, 아니면 양탄자일까? 여러 그룹으로
갈려 열띤 토론을 했지만 결론은 얻을 수 없었다. 그 개미들 가운데 몇은 자기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코끼리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한낱 우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종의 환상을 본 것이라고 했다. 다른 개미들은
코끼리에는 원래 여러 모양이 있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코끼리를 본 것이라고 했다. 또 일부는 그런 복잡한 문제는 생각도
하기 싫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일부는 자신들의 이성으로는 그 정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개미가 코끼리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코끼리가 개미만큼 작아지던가 개미가 코끼리만큼 커져서 둘의 크기가 비슷한 정도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미가 코끼리의
dimension이 무시될만큼 먼 거리만큼 떨어져서 코끼리를 한 눈에 관찰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려면 역시
두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만큼 작아지던가 사람이 하나님만큼 커져서 둘의 크기가 비슷한 정도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dimension이 무시될만큼 먼 거리만큼 떨어져서 코끼리를 한 눈에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면… 유한(有限)한 사람이 무한(無限)한 하나님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그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스스로를 보여주신 성경 말씀이 있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완벽하게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성경 말씀을 사실로 믿는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노력들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개미는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요플레를 떠먹이는
심정으로’ 성경 말씀이 사실임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요플레를 떠먹이는 심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042)
861-1490 권오승에게 연락 바랍니다. Non-christian 환영)

하늘나라 놀라운 곳?

1994. 2.
하늘 나라 놀라운 곳?

– 여섯살 때, 동생과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고는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깨어도 혼나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여자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갖었다. 그리곤, 하늘 나라란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나를 좋아해주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엄청나게 많이 맞고, 학교를 하루 결석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란 잘못을 해도 체벌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주위의 불량 학생들에게 내 돈을 빼앗겨 보았다. 그 때 나는 하늘 나라가 만일 있다면, 그 나라엔 그 누구도 내 돈을 빼앗아 가지 않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맡았었는데, 학급의 잘못에 대한 벌은 항상 반장이 대표로 받았다. 나는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내가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과학 고등학교라는 낮선 환경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중학교 때 까진 스스로 상당히 잘났다고 생각했던 내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나는 하늘 나라란 누구나 다 공부를 잘할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입시라는 부담감을 남들보다 1년 일찍 겪으면서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엔 입시 지옥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6월 민중 항쟁이 일어나고, 온 사회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불의와 정의, 독재와 민주, 독점과 분배.
최초로 사회 정의라는 것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만일, 정말 만일 하늘 나라라는 것이 있다면 그 나라엔 민중이 독재자를 쳐부수는 나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난 내게 진실한 친구가 없음을 보았다. 모두가 내게는 피상적인 친구들이었다. 난 절대로 내 마음을 그들에게 열어주지 않았고, 그들도 역시 그랬다. 난, 하늘 나라란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고 나를 포용해주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난 처절한만치 내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아갔다. 남들이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내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잘 꾸민 가면만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내 속 사람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다. 별로 그럴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 하늘 나라가 있다면, 내 속 사람을 그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난 어떤 빛을 보았다! 아직 어렴풋하고 희미하긴 하지만 그 빛은 나에게 하늘 나라의 형상을 조금씩 보여주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기대하던 하늘 나라의 모습과는 다른 더 큰 무언가가… 난 내 일생에 있어서 최초로 내 마음의 문을 그 빛을 향해 열었다.

–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엄청난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열려진 그 비밀은 내 어둡고 좁은 가슴에 하늘 나라를 옮겨다 주었다. 이제 하늘 나라는 내 안에 와버리고 말았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큰, 그러나 조용하고 점잖은 모습이었다.

– 그 이후… 아직 내가 미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하늘 나라의 모습을 하나 둘 씩 더 알아가면서, 내 삶의 driving force는 이제 그 엄청난 하늘 나라의 비밀이 되었다.

모범생

모 범 생 (模 範 生)

권 오 승

사람들이
날보고 모범생이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 말씀 거의 어겨본 일이 없고,
하라는 공부 열심히 하고,
한눈 안 팔고,
내 입에서는 정답만이 나오고,
당위(當爲) 앞에선 절대 순종하는.

정말 난 그랬다.
난 모범생이었다.
난, 내 입으론, 항상 정답만을 이야기 했다.
당위 앞에선 항상 절대 순종이었다.
그러나
내가 내뱉는 그 정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내게 요구되는 그 당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모범생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모범생의 모습을 더욱 더 갖추어 가면 갈수록,
나에게 다가오던 그 허탈감.

그런데 어느날,
나는 껍질 속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 껍질을 깨고 나가면
훌륭한 모범생의 길로부터 벗어나게 될까봐
난 차마 그 껍질을 깰 수가 없었다.

난 그 껍질 안에서 정말 최고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난, 진정한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완벽한 모범생이.

어느날, 애타게 날 부르는 음성이
나의 두터운 껍질을 뚫고 들려왔다.
작지만 커다란 그 음성이 내 껍질을 깨뜨려 버렸다.

껍질은 깨지고, 나는 그 밖으로 나왔다.
껍질 안에서 철저히 감추고 살았던
내 추악한 모습들.
난, 모범생이 아니었다.
그저 모범생이 하는 말과 행동만을 따라하는
원숭이였을뿐…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그 음성은
내 추악한 모습들을 가슴에 품어주었다.
단단한 껍질 속의 단단한 내 마음으론
단 한번도 흘릴수 없었던
눈물이 흐르고,
난 내 자신에 대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해져버린
내 모습을 그 음성에 맡겼다.

때때로
아직도 청소되지 않은 내 모습,
다시 또 껍질을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내 자존심이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다시는 그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이제, 내가 그렇게 바라던 모범생의 모습이
나를 용납해준 그 음성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지고 있음을.

몇가지 묵상

1993. 11.
몇가지 묵상들…
권 오 승

– 모세는 살인을 범한 살인범이었다. 그때문에 그는 도망할수 밖에 없었다. 분명 젊은 날에 범한 잘못은 상당기간 그를 자책감에 빠지게 하였을 수도 있고, 스스로에 대해 실망을 하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세가 그때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양을 치다가 시내산에 이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시내산에 이르지 않았던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범한 크고 작은 실수들… 분명 하나님은 그런 구질구질한 것들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야곱의 장인 라반은 아주 악독한 사람이었다. 야곱을 속여 자기의 두 딸을 다 떠넘기고 야곱의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아마 야곱도 그러한 라반을 좋아했을것 같지는 않다. 아니, 무척 싫어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을
위해서’ 성실히 일했다. 그는 라반의 양들을 철저하게 위험으로부터 지켜내었고, 자신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일로 양을 잃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잃어버린 양을 보충했다. 그러한 야곱의 덕택으로 라반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직장 상사는 내게 라반과 같이 악독하지도 않다. 또 나와 함께 일했던 학교 실험실 선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야곱처럼
열심히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저 내 욕심만 채우고 아슬아슬하게 내 책임만 다 했을 뿐이다. 아니, 더 많은 때에는
그것도 못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실수하여 힘을 잃고 피곤하여 지칠 때
자신에게 실망하여 기운을 잃고 말 때
반복되는 잘못에 고개가 떨궈질 때
더이상 기도마저 드릴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지으셔서 나를 낙망케 하시나요

내가 네안에 착한 일을 시작했노라 또한 내가 이루리라
너의 영혼, 낙망치말고 나를 바라라
내가 아름답게 하리라…

이제 가을이 되었다. 이 가을에 한번 더 들어보고 묵상해보고싶은 찬양이다.

짧은 치마를, 아니면 짧은 바지를, 그것도 아니면…

1993. 9.
짧은 치마를, 아니면 짧은 바지를, 그것도 아니면 옆이 깊게 터진 치마를.

대덕제일교회 청년부
권오승


난 주에는 나와 연구소에 같이 입소(入所)한 신입 소원(所員)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즈음엔 여자들을 보면 얼굴이 아니라
다리부터 보게 된다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즈음 여성의 아름다움의 ‘승부처’는 얼굴이 아니라 다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요즈음, 시내에 나가보면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얼마나 예쁜 여자들이 많은지, 또 그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니는지… TV 광고에선 노골적으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의 다리만을 강조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예쁘고
날씬한 다리를 만드는 약을 신문, 잡지 등에서 광고 하고 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다리처럼 보이게 하는 스타킹도 있고, 다리만
예쁘게 태워서 ‘건강한 다리’로 보이게 하는 기술도 발달한 듯 하다. 가끔 짧은 치마를 입지 않은 여자들은 짧은 바지를 입고,
그것도 아니면 옆이나 뒤가 쫘아악- 갈라진 긴 치마를 입는다. 하여간 ‘다리 노출의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 미니 스커트 입은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아졌고, 그 때마다 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어쩔줄을 몰라 고민할
때가 많다. 특히 소그룹 모임과 같이 그리 크지 않은 모임에서는 의자를 빙 둘러 놓고 앉을 때가 많은데, 그럴때마다 난 내
시선을 어쩌지 못해 무척 곤혹스럽다.
그래도 자꾸만 봐서 그런지 이젠 많이 익숙해진 듯하다. 이전과 같이 괜히 나 혼자
얼굴 빨개져서 어쩔줄 몰라하는 경우는 최소한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짧은 치마에 예쁜 다리를 보면 ‘시험에 들어’
어쩔줄 몰라할 때가 많다. 요즈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될수 있는대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는 방법인데, 그 방법도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속수무책으로 시선에 뜨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 이런 문제는 그냥
많이 봄으로써 익숙해져 그러한 것들에 둔감해져 버리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인가?
역시 하나님께서 여성을 참 아름답게
만드셨다.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그렇게 한부분, 한부분을 아름답게 만드셨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여성,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여성의 아름다운 다리를 아름답게 내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도 합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경이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것은 물론 알고 있지만, 짧은 치마가 반드시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인지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차원의 것이라면 그것도 가(可)한 것일텐데.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可)한 것이라면,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보며 참 잘생겼다던가 참 예쁜 눈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매우 실례가 된다던가 민망한 일이 아닌것 처럼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바라보며 참 다리가 예쁘다던가 무릎의 모양이 유난히 귀엽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여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것을 보면…
짧은 치마가 정말 문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짧은 치마를 입는 자매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또 다른 이들의 생각과 의견도 들어보아야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잡힐것같기도 하다.

아! 여성의 다리는 아름답고, 나의 생각은 혼미하구나. 그나저나 우리 부서의 P양은 왜 그렇게 짧은 치마만 입고 다니는거야, 업무에 방해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