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mplative Prayer

최근 계속해서 contempative prayer를 하려고노력하고 있다.
처음 contemplative prayer를 경험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던 때였다.

당연히 큰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는 것과 contemplative prayer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때로,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나는 교회의 작은 지하방에 들어가서 기도할때가 있었다.

그러면 혼자서 정말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한 30분~1시간 기도하다가…
그냥 지쳐서 가만히 앉아있게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냥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뭐랄까…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앉아있다고 해야할까…
내가 막 말을 하고 있지 않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을 경험하곤 했다.

매일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 아주 가끔 그런 경험이 있었다.

몇년 후, 나는 contemplative prayer라는 것을 처음 소개받았을때,
아… 그때 내가 새벽기도때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지쳐서 앉아있던 그 상태가 어쩌면 contemplation의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뭐랄까…
나는 contemplation이라는 영적상태랄까 그런게 참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contemplation을 통해서 더 깊이있는 기도를 해보려고 하는데 참 잘 안된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도들을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저 그렇게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고통과 두려움

고통은 현재에 집중하게 하지만
두려움은 미래에 집중하게 한다.

미래는 인간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과거에 매이지도 않고, 과하게 미래에 집중하지도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오히려 현재에 집중하게하는 disguised blessing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려움은 내가 control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것이므로,
blessing일수는 없는 것 같다.

고통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더 바라보며 그 고통 안에 하나님의 초청하는 것이 필요할테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싸우고 두려움을 떨처버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과 현재

믿음을 가지고 사는 데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자꾸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의 어떤 영광속에 빠져사는 등의 모습은,
현재 정말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또 믿음을 가지고 사는데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자꾸 미래에 생각이 머무는 것이다.
현재가 그거 미래로 가는 과정이자 원인이라고만 생각해서,
미래의 걱정,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소망등만을 생각해서 현재를 도외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어떤 의미에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아주 중요한 모습은,
내가 과거의 그늘과 영광속에 살지도 않고,
내가 미래의 걱정이나 기대속에 살지도 않고,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흔히 mindfulness라고 하는 것이 그런 믿음의 요소일 듯.

하나님의 습격

지난 주말 김도현 교수님께서 우리 동네에 오셨다.
지역교회의 수련회 강사로 오신 것이었는데 내가 몹시도 좋아하는 김도현 교수님이므로 설교를 다 듣고 싶었으나 내 시간이 여의치 않아 첫날 저녁만 가서 뵙고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창세기 33장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본문으로 설교.

  1. 야곱은 에서와 어떻게든 화해하고 합의를 해서 자기가 살아날 것에 모든 관심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매우 치밀하게 준비도 했고, 하나씩 둘 씩 실행도 해 나갔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밤에 갑자기 야곱을 찾아오신다.
    아마도 야곱은 에서가 습격해 온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
    그러니 허걱…이거 큰일났다… 하면서 후다닥 잠이 깨어 자기가 살아보려고 열심히 싸웠을 것.
    씨름을 하다가 이게 에서가 아니라는건 곧 알았을 테고, 곧이어 이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
  3. 그런데 이상한건 씨름을 하다가 해가 뜨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막 가려고 하시는 것.
    아니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이 급한 약속이라도 있으셨나?
    이것에 대한 김도현 교수님의 설명은…
    해가 뜨면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해서 해가 뜨기전에 급하게 떠나려고 하신 것.
  4. 야곱이 그 와중에 하나님을 붙들고 계속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씨름에서 져주신다.
    음… 하나님의 패배.
    하나님은 야곱하고 씨름해서 지신것.
    하나님이 약자가 되신것.

  5. 해가 뜨면 야곱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약자가 되신것.
    하나님께서 싸움에서 져주시는 것.
  6.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진것은 야곱에게 새로운 identity가 생겼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여겨주시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7.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습격하셨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자와 패자가 되어서 그 야곱의 상황을 풀어가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야곱이 마주한 문제를 빨리 해결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야곱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8. 하나님께서 약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패자가 되어서, 그 상황을 풀어내시는 것이야 말로 우리 하나님의 대표적 특징.
    궁극적인 예로는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9.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다.
    그분은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약자가 되시길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손해보시고 그분이 사람을 다른 차원으로 이끄신다.

로마서 8:31-38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적용과 공동체

내가 설교를 할때 많이 듣는 반응이 있다.
원리를 듣기는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걸 적용해야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대개 나는 그 적용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적용까지 다룰 수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긴 하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가 원문 그대로 실려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아마 베드로 설교의 핵심을 축약해서 적어놓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 설교는 너무 dry하다.
아주 짧은 핵심적인 선포와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 전부이다.

베드로의 설교의 원문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있겠는데….

사실 미국의 대각성시대의 설교들을 읽어보아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설교문을 읽어보면 그냥 dry하다. 예화도 없고, 적용도 없다.

그렇게 오래전까지 갈 일도 아니다. 그저 20년전 30년전의 설교들을 들어보면 모두 그냥 dry하다. 예화도 적용도 없다.

그런데 예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지금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들은 설교에 적용도 예화도 없는 그런 것들을 들으며 어떻게 자신의 삶 속에서의 적용점을 찾아 살아갈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느냐 하는 적용은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며 배웠을 것 같다.
이미 그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모습이 예수를 따르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이드를 충분히 잘 확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역시 내 20대의 신앙이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 같다.
많은 경우 지식은 책으로 배웠고, 신앙은 선배들을 보면서 배웠다.

그러니…
어쩌면 청중이 적용점을 잘 찾지 못하는 설교를 하는 목회자의 문제는,
그분의 설교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목회를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야 목회자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으니…
그렇게 적용점을 찾지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 나누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옛 신앙

Tim Keller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Tim Keller의 여러 설교들을 많이 들었다.
그분에 대한 일종의 내 tribute쯤 된다고나 할까.

나는 Tim Keller가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입장과는 약간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분이 성경을 읽는 방식과 내가 성경을 이해하고 읽는 방식은 조금 차이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분의 입장은,
내가 20년정도만 하더라도 열렬히 따르던 관점이고…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스타일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지금 더 많은 생각을 정리하게 되기도 하였고,
신학적인 지식도 더 넓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Tim Keller의 신앙에서 보여지는 그 ‘따뜻함’이랄까… 그런 것을 많이 잃어버리게 된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나님, 인간, 구원, 영생, 죄, 죽음, 부활, 은혜, 천국, 십자가, 성경, 교회…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런 내 이해를 어떻게 ‘나’라는 인격에 녹여내며 살고 있는 걸까…

그러면 아니되옵니다…

몇년 전,
내 manager가 layoff를 당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 manager (A 라고 하자)를 아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그 사람과 호흡을 맞추어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A가 layoff되었다는 이야기는 A로 부터 직접 들었다.
우선 회사전체에… 이번에 layoff가 있다. 이번에 layoff된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했다고 announcement가 나왔다.

그 후에,
A가, 팀의 사람들을 함께 모아놓고, “나 이번에 layoff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팀에서 다른 한 사람도 layoff에 포함되었다.

다들 그 사람이 그렇게 된것에 대해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앉아있는데, 같은 팀에 있던 B가 그럼 자기의 manager는 누가 되느냐, 자기는 어떤 팀으로 가느냐, 자기가 하던 일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 모두 ‘자기’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 놓았다.

힘든 표정으로 자신의 layoff 소식을 이야기하던 A에게 B가 하는 행동은… 그냥 보기에 너무 기가 막혔다.

아니, 물론 너도 너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고 그것이 궁금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당장 이렇게 어려움을 당한 A를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냐…

다행히도 다른 팀 사람들이 B의 이기적인 질문들을 살짝 무시하면서 A를 모두 함께 위로해주고, 너와 함께 일 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격려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A는 그 후 다른 회사로 갔고, 나는 A와 그 후로 다시 연락을 거의 잘 하지 않고 지낸다.
하지만 B는 여전히 지금 회사에 남아있고, 나는 B와 함께 일하는 일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A가 어렵던 그 순간에 B가 보여줬던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여전히 B를 함께 일할 동료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존중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렇지만 B를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때 그저 자신의 필요와 문제만을 챙길 이기적인 사람이다.

회사에서 B를 매우 자주 만나지만,
B를 만나면 인사도 하고, 농담도 하지만…
또 B가 잘 한 일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하고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B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면 아니되는 것이다.

Professionalism

프로페셔널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은 조금 큰 논의가 되겠다.
그렇지만 최근 내가 경험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게된 일이 있었다.

지난달에 우리와 함께 일하는 B 회사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쪽 회사의 중요한 opinion leader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가게 되었다.
그중 A라는 사람은 그 그룹의 리더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그 전에 다리를 살짝 다쳐서 다리가 아직 좀 불편한 상태였다. 골절이 있었는데 캐스트를 풀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거리를 걷거나 하기에는 어려운 상태.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출장을 가 있는 도중 A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해 있는 상태였다. 정확하게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A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으니 A의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실 것.

A는 우리가 함께 하는 출장 기간 동안에 자신의 다리가 불편한것이나,
그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을 ‘공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해야하는 일을 아주 성실하게 제대로 해내었다.

함께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자신 때문에 그룹이 뒤쳐지지 않게 배려해가며 열심히 걸었고,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 때문에 해야하는 일이 지장받게하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밤에 잠을 잘 자지못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랬노라고 이야기해서 그때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처해있는 개인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하는 일들을 해내는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의 하나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프로페셔널리즘이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분리’할줄 알고,
그 일이 자신의 감정적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 자신을 갈아넣는 모습은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