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95년에 왔으니, 이제 미국에 온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20년 미국 생활 중, 내게 여러 영향을 끼친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참 특이한(?) 경우이다.
박사과정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유대인 친구인 S 이다.
이 친구는, 대단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아주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참 말 잘하고, 이익에 밝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빠르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험을 하다가 잘 안되면, F*ck! 이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하고…
뭐 하여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졸업 후,
연구가 자기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분야를 바꿔서,
지금은 가끔 TV에도 나오는 주식 분석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돈도 아주 많이 벌고…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 당시 나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었고,
한편 나는 그 친구를 경멸했다. (아주, 아주, 나쁜 자세이다!)
그런데,
한가지 그 친구를 보면서 느낀 것은…
나는 늘 하나님의 뜻, 목표, 소명, 뭐 이런 것에 ‘사로잡혀서’, 그것에 맞지 않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정죄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갈등하고 살고 있는데…
이 친구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를 보면서 참 많이 배운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의 아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이 친구는, 정말 그야말로… 무엇이 옳다는 어떤 신념 그런거 없고, 그냥 이익을 찾아서 움직이는 친구인데,
자신의 아내를 참 끔직하게도 사랑하고 아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참 좋은 가정생활을 하는 아빠다.
그 당시 신혼이었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신념이 결혼 생활 속에서 compromise 된다는 생각 때문에 대단히 갈등하고 있던 차였다. (후에, 그때 내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많이 깨닫게 되었지만.)
그저 돈되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접근하는 그 친구는 아내와 알콩달콩 잘 살고,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하는 나는, 신앙적인 가치라는 가면을 쓴 내 신념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있고…
참 많이 비교가 되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내가 ‘유연한 신앙’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가진 신념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화목할 수 있었고,
나는 내가 가진 신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불화하고 있었다.
강한 신념은, 정말 갈등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것일까?
나는 깊이 고민했다.
지금 나는 그 당시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뭐 그렇게 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서두 ㅎㅎ)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유연한 자세를 그나마 조금 더 가짐으로써,
나 자신을 좀 더 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 잘 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S 친구와 가끔 연락을 하면서 지낸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를 Dr. Evil 이라고 불렀고, 그 친구는 나를 Dr. Good 이라고 불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Dr. Good은 Dr. Evil로 부터 많이 배웠는데,
Dr. Good이 Dr. Evil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배워가고 있다.
아. 간사님, 이 글 좋아요. “유연”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와 닿네요.
헤헤… 잘 읽어주니 고맙네요. ^^
유연한 신앙은 사실 우리 담임목사님을 비롯해서 교회에서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는 이슈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배우고 있는 입장인 것 같고요…
한동안 그집 사람들도 못봤네요. 언제 한번 봐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