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고, 애고…

내 이럴줄 알았다.

간사 수양회 message…

마음만 앞서고 잘 organize도 못하고… 말도 버벅거리고… 한말 또 하고 한말 또하고…

해야할 말을 빠뜨리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은 괜히 하고…

준비가 많이 부족해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양회 당일 BWI 공항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설교 직전까지도 계속 손을 봐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못한 것 같아 많이 미안하긴 하지만,

그러나 한편 이 사람들이니까 허물없이 내 속마음 이야기할 수 있지…. 싶어 참 감사하기도 했다.

부담 만빵 간사 수양회

이렇게 부담 많이 되는 간사 수양회는 처음이다. -.-;

간사 수양회 혹은 각종 이런 저런 간사모임에 참석한 것이 못잡아도 20-30번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 부담 만빵이다.

수양회 설교를 하는게 처음도 아니고,

간사들에게 무슨 강의나 presentation을 하는데 처음도 아닌데,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무슨 얘기를 해 주어야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걸까 하는 것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늘 간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고, 지금도 참 많긴 한데…

막상 그 이야기를 간사들에게 해야하는 건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 마음 속에 참 갈등이 크다.

그렇지만,

우선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사람들에게 하길 원하신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모아서 하도록 노력을 했고,

내가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먹을 사람들이므로 또한 안심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뭐 이게 내 일인가. 주님 일이지. 주님이 잘 맡아 주시겠지. (이번 설교 성경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 )ㅎㅎ

귀한 사람들 만날 기대가 된다.

잘나가는 회사?

우리 회사 사정은, 여전히 간당간당하다. ^^

일단 어찌어찌해서… 

9월 말까지 버틸 자금은 확보해 놓은 상태이지만,

그 이후의 사정은 어찌될지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잘만되면 아주 흥미롭게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꽤 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을 알기라도 하는걸까?

최근 여러 recruiter 들로부터 계속 연락을 받는다.

지난주에만 3명의 다른 recruiter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는… 요즘 아주 아주 잘 나가는 A 사의 recruiter였다.

그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저께 그 recruiter의 이메일에 답장도 하고 내 CV도 보냈더니, 즉각 어제 저녁으로 전화 인터뷰를 잡아 놓았다. -.-; 허억.

(민우도, A 라는 회사에 아빠가 다니면 어때? 라고 내가 물어보니 cool 하다는 표정이다.)

어제 전화 인터뷰를 해보니,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이… 소위 내 지식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이것 저것들을 물어보는데… 

저, 아저씨… 그건 질문이 잘못된거예요… 라도 이야기해주고 싶은걸 참았다. ㅎㅎ

그리곤 내일 자기 회사로 와서 만나자고…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내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그 회사에서 월급 왕창 더 주고 더 좋은 조건 제시하면 확 옮겨버릴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적어도 지금 내가 우리 그룹에서 그렇게 후다닥 떠나고 나면…

지금 겨우 겨우 난관을 극복해가며 나가는 상황에서… 아마 그냥 함께 주저앉아 버리고 결국 회사도 문 닫고 그룹도 흩어지게 될텐데…, 아니 최소한 아주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적어도 몇사람은 정신적 충격도 클텐데…

적어도 지금 내가 회사를 그냥 후다닥 옮겨버리는 일을 하는 일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무책임하고 심지어 무례한 일인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처한 입장에서는… 지금 이 회사가 혹시 가라앉는 배가 되더라도,

이 배에서 마지막으로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

내가 지금 이 회사에서 이렇게 하는 소망의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내가 뭐 회사 지분의 majority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내가 괜히 오지랖 넓게 행동하고 있는건 아닐까.

어제도 열심히 실험을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성경공부는 정말 재밌다! 그러나 설교준비는…

이번 돌아오는 주말,

코스타 간사 수양회에서 Shiker 간사님이랑 나누어서 각각 두번씩 설교를 부탁받았다.

강해설교를 하기로 하고,

지난 한주 정도 정말 열공모드로 열심히 본문을 보고 있는데,

아, 정말 본문연구가 새삼 재밌다! ㅎㅎ

나는 헬라어를 모르기 때문에,

Concordance를 찾아가며 원어의 의미를 따져가고 있는데,

이런 작업도 참 재미있고,

구조 분석을 해가면서 바울의 숨결을 느끼는 작업도 참 재미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본문이 내게 해주는 말씀이 아주…

그런데 문제는,

본문연구와 분석, 묵상에 빠져 그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바람에,

막상 설교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여러 주석들을 비교해가며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참고할 시간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고.

디모데후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사랑하는 후배 디모데에게,

바울이 심장으로 써내려간 편지이다.

이 바울의 뛰는 심장의 역동성을,

말솜씨나 현학적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도할 것이 너무 많은데…

요즘은,

마음을 쏟아 기도할 것도 많고,

기도하고 싶은 내용도 정말 많은데…

그것을 정말 깊이 마음을 쏟아 기도할만한 시간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기도할 내용들이 그야말로 마음 속에 쏟아져 들어온다.

기도를 하다가도… 세상에 이걸 다 놓고 기도하라고? 하는 생각을 들만큼 그 내용이 많다.

그것들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과정은 아무래도 좀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그 과정이 늘 내게 부족하다.

마음이 바빠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삶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일텐데 말이다.

요즘 내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컴퓨터, 인터텟, ipad, iphone 등 전자기기 들이다.

늘 처리해야하는 정보량이 많고, 그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내 흥미로운 관심이 그것에 있다보니 자꾸만 그것에 마음이 빼앗겨 차분함을 잃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지난 두어주 정도는,

회사에 좀 일찍 가서 자리에서 기도도 하고, 말씀묵상도 하는 cycle을 좀 회복해서 뭔가 좀 break-through를 찾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 신학 노선 (5)

회심을 경험하고 처음 다녔던 교회는 침례교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건강한 침례교의 신학 전통을 잘 가지고 있는 건강한 침례교회였다.

그곳에서, 특별히 고백적 신앙에 대해 잘 배울 기회를 가졌는데,
이 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고백적 신앙 혹은 고백주의적 신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온 중요한 기둥이 되고 있다.

그 후, 교회사를 나름대로 공부해가면서,
나는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이 온전하지 않다고 비판했던 그룹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재침례파 (혹은 아나뱁티스트라고 영어의 anabaptist를 그대로 읽고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요즘은.)
특별히 고백적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국가종교를 거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매력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만날수록, 고백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내게는, 이 재침례파의 신학이 참 마음에 잘 맞았다.

지난 수년에 걸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혜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많은 이들이 아나뱁티스트를 주목하고 있는데,
그렇게 새로 아나뱁티스트가 주목받는 것에도 역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지는 않지만,
이상주의에 대한한 매력을 느끼고 어떤 의미에서 이상주의를 동경한다
그런 내게 아나뱁티스트의 주장은 내 성향에 잘 맞는 것 같다.

다만,
적어도 나는,
이상주의자가 되려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거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많이 주장하는 ‘평화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많이 공감하지만, 웬지 내가 그것에 올인하기엔… 좀…

정리하자면, 나는…

종교개혁전통의 피부색을 가졌고,
캘빈주의의 체질에,
오순절주의의 행동을 즐기며,
고백적 경건주의의 신분증을 가진,
아나뱁티스트의 친구

쯤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본다. ^^

내 신학 노선 (4)

지금 현재 내 신학 노선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그 색깔이 남아 있는 것은,
고백주의(confessionalism)적 경건주의(pietism)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
그리스도인은, 국가나 사회, 가정에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되는 것이라는 것,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개인 성경연구, 개인 기도, 경건의 시간 등을 갖는 것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optional 한 것이 아니라 꼭 요구되는 것이라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강조가 내겐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내 일상 생활과 인격형성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학적 입장이 아닐까 싶다.

무릎꿇어 혹은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시간이 부족하면 마치 운동을 하지 않아 온 몸이 찌뿌드듯하게 굳어버린 것과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하고,
말씀 연구와 말씀 묵상을 하지 않으면 심한 갈증 혹은 영적 허기를 느끼기도 한다.

정말 내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나는 캘빈주의자다, 오순절주의자다… 등과 같은 단정적 기술을 할수는 없지만,
고백주의적 경건주의자다 라는 것에는 아마 꽤 자신있게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신학 노선 (3)

또 내 신앙에 깊이 영향을 끼친 신학 노선은,
오순절주의 전통이다.
특히, Azusa Street에서 있었던 부흥의 시기에 나타났던 일들에 참 관심이 많다.
부흥 운동의 결과로 인종의 벽이 무너지고, 성별의 벽이 무너졌던 일들 같은 것에 주목한다.

나 스스로 신비한 은사가 풍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영적 전쟁에 대한 awareness를 늘 가지고 있고,
성령의 능력을 입은 강력한 기도를 눌 꿈꾸고,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가 일어나는 기대를 갖곤 한다.
나 역시도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한 은사를 주실까 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공동체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지금도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특히,
한국에 있을때,
대천덕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던 영향이 컸다.
(비록 그분을 가까이에서 개인적으로 뵐 기회는 한번도 없었지만…)

기도모임을 한다거나,
좀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 모임 등에서,
나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초자연적 증거를 기대해본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때가 물론 많이 있어도 말이다.

물론 일부 오순절주의자들의 다소 치우친 언행을 경계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신학 노선 (2)

두번째로 내게 영향을 끼친 신학적 전통은 캘빈주의이다.

우선 일차적인 이유로는,
내가 처음 하나님을 이해하면서, ‘크신 하나님’ 이라는 개념이 나를 매우 강하게 흔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한하거나 축소하는 것과 같아 보이는 어떠한 설명이나 입장도 내게는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내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중 많은 이들이 캘빈주의자이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꽤 오랜시간동안 Francis Schaeffer의 추종자였다.
그 이후에는 또 다시 오랫동안 Martyn Lloyd-Jones가 내 영웅이었고, 그분이 따르는 ‘청교도 신앙’에 깊이 빠졌었다.

15년쯤 전에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는 John Piper같은 사람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Christian Hedonism에서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갈망하고 누리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후에 점진적으로…
내가 신학적으로 캘빈주의를 바로 내 관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정리를 했지만…
(심지어 지금은 open-theism 조차도 상당히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니.. 정말 많이 변했다. ^^)
그래서 현재로서는, 내가 캘빈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그리 많이 않다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가령,
기도를 할때라던가…
어떤 영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내가 여전히 캘빈주의 입장의 영향 아래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내 신학 노선 (1)

몇달 전이었다.
Woodland Hills Church의 Greg Boyd가 자신의 교회가 따르고 있는 신학적 노선에 대해 시리즈로 설교를 한적이 있었다.
경건주의적 노선, 오순절주의적 노선, 재침례파적 노선 등등을 설명을 했다.

그 설교들을 들으면서, 나도 내 신앙/신학의 노선을 지금쯤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몇번의 글을 통해 그것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

내 신앙의 성숙도가 아직은 형편없고, 신학적 노선을 정리할만큼 지식이 풍부하지도 않으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coherent 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고 싶다.

우선 첫번째로, 종교개혁의 전통.

내가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나를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았던 개념은,
“은혜로 얻는 구원” 이었다.
(Sola Gratia)

그리고 또 그 은혜로 이어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도 나를 흥분시켰다.
(Sola Fide)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성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그야말로 정신없이 성경에 빠졌었고,
(Sola Scriptura)

그러는 과정에서, 예수라는 분에게 내 마음이 온통 빼앗기게 되었다.
(Solo Christo)

그래서 내 삶의 모든 목표와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Soli Deo Gloria)

물론,
내가 개신교회 속에서 믿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의 회심은,
공동체를 통한것이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라기 보다는…
혼자 성경을 읽다가 얻어진 것으므로, 소위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이런 내용을 주입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신학적인 노선들을 접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신앙의 여러 과정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신앙의 가장 근본에는 이 종교개혁적 전통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