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와 정신

가끔은 어떤 ‘모토’를 자신의 좌우명과 같이 삼고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자주, 어떤 사람이 좌우명으로 삼는 그 모토는, 그 구절이 이야기하고자하는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된 것이기도 하다.

직접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의 예를 들지 않고 설명을 하자면… (including myself)
가령,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면서 자신은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는건 여행을 다니는 거다. 나그네된 백성이라고.

뭐 여행을 다니는게 나쁜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게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이거나, 그게 그 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건 아니다.

그러니,
모토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좋다.

Growing together, Growing loneliness

고등학교때 참 좋았던 것은,
함께 했던 친구들과 내가 함께 ‘자라고’있다는 것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우리는 지식을 쌓아나가고 있었고, 생각이 자라났다.
물론 몸도 커졌고.
대학교때도 그것은 계속 되었다.
그건 그냥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도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라나갔다.
새로운 것들을 함께 배웠고, 성경을 읽으며 함께 토론했고, 새로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하던 것들을 함께 시도해보기도 했고, 새로운 시각들이 열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함께 자라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20, 30대에 그렇게 열심히 자라가던 사람들이 어느순간 자라남을 멈춘채,
자신이 그냥 생각하는 것에 머물러 그것을 고집스럽게 붙들며 사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그러면 다행이지.
20, 30대에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던 사람들을 어쩌다 만나면,
회사 승진 이야기, 애들 교육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해외여행 이야기, 골프 이야기 정도만 하는 사람들이 되어있는 때도 많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계속 배우면서 자라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그저 아주 가끔 멀리서 서로 소식을 전하는 수준으로만 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예수님 믿는 것이 외로워졌다.

이제는 그저 내가 하고 있는 싸움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자라남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 뿐.

Credit Card with annual fee

나는,
정말 절.대.로. annual fee가 있는 credit card는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 일종의 철칙이었다.
annual fee를 조금 내면 cash back이 더 많으니까, 얼마 이상 쓰면 그게 더 이익이다… 뭐 그런 논리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거 신경쓰면서 credit card를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거 열심히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자칫 손해를 볼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무조건 credit card는 annual fee가 없는 것만 써 왔다.

그런데,
최근에 자그마치 annual fee가 395불이나 되는 credit card를 하나 만들었다!

왜 생각이 바뀌었느냐 하면…
이게 annaul fee가 395불이긴 하지만, 매년 400불어치 여행용으로 쓸 수 있는 ‘credit’이 나온다.
그러니까, 일년에 400불 어치 이상 여행을 하기만 하면 5불 이득인거다.
게다가 priority pass 라운지 카드도 주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혜택들이 있어서 그냥 확~ 질러 버렸다.

뒤늦게… 자본주의적 소비 카드를 갖게된 느낌… 살짝 좀 찜찜하기도 하다.

쉼과 게으름

지난 주말,
늦잠도 자고, 하루종일 인터넷 강의(?)같은 것 듣고, 컴퓨터 게임하면서 보냈다.

주말에 하는 이번학기 성경공부가 지난주 끝났기 때문에,
오랜만에 주말에 따로 뭔가를 해야하는 일이 없는 주말이었다.

예전과같이 넘치는 에너지로 필요하면 잠을 줄여가면서 그렇게 일할만큼 체력이 되지도 않고,
지난 몇달은 여러가지로 생각과 마음을 쓰게되는 일들이 더 많아서 정신적인 여유도 더 적었던 것 같다.

참 오랜만에 쉬었는데,
그냥 내가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든다.
말하자면 꼭 필요한것보다 더 쉬었다는 것.

쉼과 게으름의 경계는 매우 애매하다.
그런데 결국 그 쉼과 게으름의 경계는, 분명한 양심을 가지고 마주하면 잘 분별해낼 수 있는 것 같다.

지난 주말,
나는 게을렀다.

보잘것 없는 숫자

김교신이 발행했던 ‘성서조선’은 처음에는 김교신과 몇 사람이 함께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사실상 김교신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를 다 하면서 발행하는 잡지가 되었다.
그 모습도 허름하고 해서 서점/가판대에서 내어놓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성서조선이 김교신에 의해서 발행될 당시, 대충 200명 정도쯤 되는 사람들이 그 잡지를 받아서 읽었다고 한다.

겨우 200명.

그런데도 김교신은 꾸준히 그 잡지를 발행했고,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과 성서연구모임을 계속했다.

보잘것 없는 숫자임에도 그냥 해야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간증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어쩌다가 그냥 다른 지역의 아는 목사님이 계신 곳에 예배를 드리러 갈때, 그분께 미리 말씀을 드리면, 내게 ‘간증’을 해달라고 하시는 일이 있었다.

나는 내가 뭐 간증 그런거 하는거 참 불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 나의 기억들이 내게는 소중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해없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자신이 없기도 하고,
대개 내게 ‘간증’을 부탁할때는 하나님 잘 믿고 ‘승리’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일들이 많은데… 나는 뭐 그렇게 대단히 ‘승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간증을 부탁하는 분의 입맛에 맞는 간증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말 어떤 분들의 스토리는 참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느끼지기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는 그런 간증이 정말 있기도 하다.

왜 내 스토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소통되는 간증이 되기 어려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보는데,
아마도 내가 좀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냥 좀 보통과 다른… 그래서 내 스토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잘 적용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능력에 넘치는 위치에 가지 말아야 한다

어쩌다보니 정말 능력치가 엄청난 사람들도 많이 볼 기회가 있었고,
그 속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도 볼 기회가 있었다.

대단히 경쟁적이면서도 높은 능력치를 요구하는 직장이나 직업은,
그것을 핸들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정말 그 사람은 처참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아주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 어찌어찌 해서 그 학교/그 직장 / 그 그룹에 들어오긴 했는데,
그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도 하지 못하는 수준인 사람들.

정말 처참하게 삶이 망가지는 것도 보았다.

그런의미에서,
과외를 열심히 해서 자기 능력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간다거나,
레주메를 뻥투기해서 자기 능력보다 더 좋은 위치에 가면,
그 사람도 불행하지고 그 사람의 주변도 모두 불행해진다.

RSV?

지난주는 감기같은 증상으로 며칠 쉬었다.
월,화는 회사도 쉬었고, 수,목,금도 집에서 일했다.

지금은 건강 상태로는 괜찮긴 하지만, 아직은 기침이 조금 남아있어서,
하루이틀 더 집에서 일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하수/폐수에서 어떤 바이러스들이 나오는지를 테스트해서 모아놓는 website가 있다.

https://data.wastewaterscan.org/

이 data에 따르면 미국 전체에서 RSV (Respiratory Syncytial Virus)가 꽤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재채기가 미친듯이 나오더니만,
하루 정도는 오한도 있고, 식욕도 없고, 좀 심한 독감인것 같았다.
보통 독감은 그래도 2~3일 정도는 아프곤 한데, 이건 하루 심하게 아프고나서는 아주 빨리 괜찮아졌다.

covid 테스트도 당연히 여러번 했는데, 그건 negative.

의사와도 video call을 했는데, 의사 말로도 RSV일 가능성이 많다고.

버려도 되는 기억, 버릴 수 없는 기억

요즘 Google에서 잘 안쓰는 계정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몇년? 몇개월?동안 쓰지 않은 이메일을 지운다고 연락이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 내가 이런 이메일도 만들었었네’ 싶은 이메일들도 꽤 많이 있다.
예전에 학생때 살던 곳을 sublet하기 위해서 임시로 만들었던 이메일,
중고로 내 laptop을 팔려고 할때 만들었던 이메일,
KOSTA때문에 임시로 만들었던 이메일 등등.

대부분은 그냥 지워져도 하나도 문제 없는 이메일들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민우가 어릴때 민우를 위해서 만든 이메일이다.
‘싼타 할아버지’ 이메일이다.

그 이메일로부터 민우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너는 금년에 착했으니, 선물을 주겠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민우가 처음에는 정말 그걸 믿었다! 그리곤 그 이메일에 꼬박꼬박 답을 했었다.
물론 나중에는 민우가 그 이메일 패스워드를 알아내고, 자기가 그 이메일 어카운트에 들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이메일 주소는 당연히 지우지 않을 예정이다.

살다보면,
잊어도 되는 기억이 있고,
잊지 말아야할, 잊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 이메일주소로 로그인해서, 민우에게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주겠다고 한번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리더십의 부재

Bottom-up의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리더십은,
Top-down의 의사소통 중심의 리더십보다 훨씬 더 어렵다.

Bottom-up을 정말 제대로 하는 리더는,
자신이 뛰어나게 할 수 있는 Top-down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오히려 건강한 방향을 운전해내는 사람이다.

Top-down이 자신없으니 나는 Bottom-up만 하겠다는 리더는 그냥 게으르거나 무능한거다.
혹은 자발성이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중요하게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리더는 그 자격이 부족한거다.

그런데…
정말…
아주 가끔은…
그런 무능하거나 게으른 리더 아래에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그 조직을 구해내고, 자신이 놀라운 리더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