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높이는 간사함

훌륭한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겠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을 높이는 동기가, 대단히 이기적이고 간사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속해있는 단체의 선배를 많이 존경하고 높인다.
그러면, 결국 그 단체에 속해있는 내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런 예는 사실 많이 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업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들을, 그저 그 사람이 오래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존경’ 한다거나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노력을,
‘헌신’, ‘숭고한 뜻’ 등과 같은 말로 포장하여 높이는 경우도 있다.

어핏보면, 그냥 아부하는 것이려니…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 동기를 파고 보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향을,
기독교 내에서도 수 없이 발견한다.

성직자들끼리 서로를 많이 높여서 평가하는 것,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떤 사람을 필요 이상 높이는 것,
자신이 속한 단체의 선배의 훌륭함을 일종의 ‘신화’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 등등이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람에게 돌려지는 ‘영광’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현대 기독교에서… 최소한 한국 기독교에서… 그것을 잃어버린 듯 하다.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

김교신 같은 분을 생각해보면,
참 나름대로 그 시대 속에서 많이 고민하고, 행동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의 시각에서보면 그 사상이 당연히 그 시대에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그 생각의 깊이가 대단하다.

어찌 김교신 뿐이겠나,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뒤져보면 그 시대와 씨름하며 고민했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그 시대에 깊게 뿌리 내려 있지만, 그 시대에만 제한되지 않는 통찰도 있었다.

통찰은 기교와는 다르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이다. 그리고 통찰은 영감을 수반한다.

현대 기독교의 가벼움을 보면서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가벼움 자체도 있지만,
가벼움 너머의 것을 바라보며 목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볍지 않은 것이 주어졌을때 그것을 가벼움으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비논리로,
때로는 환원주의로,
때로는 패권주의적 반발로,
때로는 그저 무지의 소산으로…

나름대로 가벼워지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을 하지만,
그렇게 가벼워지지 않으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도 않고,
내 스스로 가벼워지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

그리운 빌리 그래함

빌리 그래함이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전 세계 기독교에, 아니 전 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셨다.
더더군다나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분이시다.

그분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지 하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나도 많이 들었고,
그분에게서 영향을 받은 많은 분들의 이야기도 역시 많이 들었다.

빌리 그래함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내게 가장 가슴 찡~ 하게 남는 그분의 사역은,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전도집회이다. 총 120만명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고, 그 집회를 통해 결신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의 비디오 클립을 보면서 나도 뭉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빌리 그래함과 그분의 legacy에 점차 실망하는 일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이 변했던 것일까, 세상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변한 것일까.

(정치적) 보수주의, 백인 중심적 사고방식, 사회 문제에 대한 편향된 인식등이 조금씩 드러날때…
한때 내 신앙의 영웅이었던 빌리 그래함에 대한 실망은 조금씩 더 커졌었다.

그런데,
그게 빌리 그래함 뿐일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젊은 시절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신앙의 선배들 중에서 더 이상 내가 존경할수 없게된 분들이 정말 많다. 아니 조금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이 지나도 그 존경심을 유지하게되는 분들이 거의 없다.
어떤 분들로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실망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내가 존경을 거두었고,
어떤 분들로부터는 아주 급작스럽거나 충격적인 사건등을 통해서 치를 떨며 존경을 거두기도 했다.

왜 그런걸까.
그분들이 변했던 것일까, 세상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변한 것일까.
나는 그분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아직도 내가 열심히 찾고 있지만…

한때 존경했던 그 빌리 그래함, 그때의 빌리 그래함이 그립다.

내겐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저께였던가… 교회의 몇분들과 이메일을 나누면서,
최근에 묵상을 하고 있는 사도행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최근에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나는,
사도행전을 읽으며… where we are와 where we can be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저 많이 슬퍼하고 있다.

최근에 읽는 성경들이 내겐 계속 그렇긴 한데,
사도행전이 내겐 lamentation과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요즘은 무슨 성경을 읽어도 다 그렇다. 다 lamentation이다.)

그런데,
이게 lamentation같이 읽힌다고 하더라도 별로 공감을 얻지도 못하고,
나도 그게 어떤 건지 설명도 잘 못하겠고,
그냥 혼자서 마음 많이 아파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있다.
그래서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만 아파하는 거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 뭔가 좀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하게 다가와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이런 내게 침묵하신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빡빡하게 하시는 걸까.
왜 남들처럼 그렇게 좀 친절하고 부드러운 하나님이 되어주시진 않는 걸까.
왜 내겐 하나님 믿는게 이렇게도 어려운걸까.

Valentine’s Day, Ash Wednesday

어제는 Valentine’s Day이자 Ash Wednesday 였다.

Valentine’s Day의 상업적 가벼움 속에서,
Ash Wednesday를 흘려버리는 가벼운 죄책감 속에서,

CVS에 진열되어 있는 빨간색 하트를 든 곰인형의 가벼움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역겨움과 싸워야 했다.
사랑과, 결혼과, 십자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되새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Hardware engineer의 설움

실리콘 밸리는 정말 software engineer들이 지배하고 있다. ^^
잘 생각해보면 정말 지난 10여년간 세상을 급격히 바꾼 key technology는 주로 software다! (아마 apple의 iphone이 예외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도 software가 매우 중요하다.)

1.
어제는 건강검진겸 해서 의사를 찾았다.
Google 안에 있는 의사다.
간단하게 한 30분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이번에 천식 때문에 다 써버린 천식 약도 새로 받고, 피도 뽑고…

나보고 회사일 때문에 stress가 많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좋은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의사는 나보고 hardware engineer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나는 hardware engineer들이 대체로 stress level이 더 높은것 같다고. 특히 product cycle이 있는 (가령 전화 같은) 개발 관련해서 일하고 있는 hardware engineer들은 더 그런것 같다고 그랬다.

2.
지난 주에 Google 식당에서, 옛날에 Apple에서 함께 일하던 옛 직장동료를 우연히 만났다.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 사람은 Google에 와서 Pixel phone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만났을 때가 저녁 7시쯤 이었는데, 샌드위치 두개를 싸가지고 가면서, 그날 밤에 conference call이 두개가 더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Apple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출장다니면서 고생하는건 똑같다고 했다.

3.
그런데 hardware engineer들의 평균 salary는 software engineer들보다 현저하게 낮다. 심지어는 비슷한 정도의 경력과 직급에서 두배이상 차이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아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hardware engineer들이 일반적으로 stress level이 더 높은데 돈은 덜 번다고.

나는 그래도 내 job에 비교적 만족하는 편이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게다가 hardware engineer 치고는 그래도 여러가지 상황이 좋은 편이긴 하다.
그래도 어젠가는 살짝 좀 설움 같은게 느껴졌었다. ^^

Martyn Lloyd-Jones 의 Revival

마틴 로이드-존스는 내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 하나이다.
마틴 로이드-존스의 ‘부흥’이라는 책을 읽은 것은 벌써 20년쯤 전인 것 같다.
그 후에도 부흥에 대한 생각과 고민들이 좀 있었는데 그 책을 다시 열어볼 여유는 없었다.

몇달전에 podcast로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모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subscribe를 했는데 그 후에도 한동안 그걸 열심히 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 주말에 설교 한두편을 듣기 시작했다.

1.
우선, 대단히 놀란 것은…
내가 마틴 로이드-존스의 언어를 사용할때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설교를 할때라던가, 글을 쓸때,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가 설명하는 방식과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신앙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몇개의 quotation을 따라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분의 사상과 신앙을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마틴 로이드-존스와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도 꽤 명확했다.
그것은 주로 20세기 초중반의 상황과 21세기 초반의 지금 상황이 차이에 기인한 것이 많았다.
가령, 히스테리는 여성에게만 나타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알기로 20세기 초반에 그렇게 주장을 하는 의사/심리학자들이 있었다. 아마 그렇게 잘못 inform된 것들이 있어 보였다.

3.
1950~1960년대 영국 영어, 혹은 그 시대 설교가의 말투랄까… 그런게 참 생소했다.
들어보면 지금 영국영어와는 참 많이 달랐다.
그런 말투가 어떤땐 살짝 bother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설교의 어투가 상당히 dry 하게 느껴졌다.
지금과 같이 감정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어투가 대단히 절제되어 있고, 그래서 오히려 설교가 때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때도 있었다.
불과 60년 만해도 설교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구나… 싶었다.

4.
그런데,
그런 dry한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찌릿 해지는 경험을 반복해서 했다.
정말 그랬다.

원래는 한주에 하나정도씩 듣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요즘 완전히 꽃혀서 어떤땐 거의 하루에 한편씩 듣기도 한다.
출퇴근을 로이드-존스와 함께…

블로그 10주년?

얼마전에 내 옛날 블로그 글을 찾아보다가,
허, 옛날에 내가 이런 생각도 했었네… 싶은 글들이 꽤 있었다. ^^

대충 살펴보니,
내가 뜨문 뜨문 글을 쓰다가 2008년 2월 경 부터 매일 혹은 거의 매일 하나씩 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부지런히 글쓰기 시작한지 금년으로 10년이 되는 거다!

뭐든 한 10년 했으면 그래도 좀 잘 해야하는 건데,
10년동안 나름대로 글을 열심히 써 왔지만,
글 솜씨가 늘지도 않았고, 생각이 깊어진것 같지도 않다. ^^

또 10년전에 주로 블로그에서 소통하던 ‘독자’들과,
지금 블로그를 통해 연결되어서 소통하는 ‘독자’들이 이제는 완전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되었다.

10년동안 글을 쓸 소재가 고갈된적은 거의 없었다.
하루에도 아주 긴 글을 몇개씩 쓰고 싶을 만큼 생각은 넘쳐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10년동안이나 매일 이렇게 글을 썼다는 생각을 하고보니,
과연 발전없는 글쓰기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는 한다.

블로깅이라는게 지금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생각을 표현수단을 아닐까 하는 고민이 되기도 하고.

한동안은,
그래도 하던 거니까,
그래도 여전히 쓸게 많으니까,
그래도 읽어주는 분들이 계시니까,
등등의 생각으로 어줍잖은 글쓰기를 계속 해 왔는데…

사실 좀 자신이 없어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지금 당장 이 블로그에 글쓰기를 중단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10주년을 맞아서 좀 고민이 필요한것 같기는 하다…

Me too

“Me too” movement가 미국에서는 peak를 쳤다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최근 한 검사의 폭로로 불이 붙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성들이 하고 있는 Me too 로는 이 운동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운동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나도 가해자였다”고 고백하는 Me too 가 나와야 한다고 본다.

나는 정말 양심적으로 여성에게 육체적 폭력을 가해서 내 (성적)욕망을 취하려고 한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를 생각해보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저 나는 그것을 당연한 사회적 통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부적절한 농담을 한다거나, 여성이 불쾌하게 생각할만한 것들을 한 것들이 분명이 있다.

그게 일반적으로 여성이 될수도 있지만,
가깝게는 내 아내나, 내 딸, 내 동생, 내 어머니가 될수도 있다.

나는 여성들의 Me too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 운동에 남성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피해자다 라고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Me too 에 대해서,
나도 가해자다 라고 이야기하는 남성들의 Mee too 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Me too.

한국말이 바뀌었군…

내가 한국에 출장을 가면,
어떤땐 한국의 특히 젊은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말이 빨라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다음의 비디오를 보니, 내가 90년대 중반에 한국을 떠나온 이후, 한국사람들의 말투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내가 지금은 한국말을 잘 못알아듣는 이유가 이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