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화요일

이제 정말 세상의 모든 가치를 뒤엎고 새 시대를 여시는 일을 완성하실 예수.
도무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논쟁하시며, 자신의 탄생과 삶과 사역과 선포와…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새시대를 여는 것이라는 것을 논쟁하시는 예수.

그들을 위한 사랑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대화하시며,
예수께서는 그야말로 ‘복창이 터지는’ 지경이셨을텐데…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
라고 이야기했던 자크 엘룰이 이야기는 옳다.

예수께서 1세기 유대인들과 하셨던 그 논쟁과, 그분의 선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pseudo-Christian들은 예수의 그 복음을, 세상을 뒤집는 그 복음을,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시켜버렸다.

나도 물론…
그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린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그 예수의 혁명적 선포를, 내 삶에서 엑스터시를 가져다주는 마약으로 사용하는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고난주간 묵상 – 월요일

N.T. Wright에 따르면 예수의 성천청결 사건은, 성전을 정화하려는 운동의 차원에서 이해할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망가진 종교에 대한 개혁의 차원에서 이해할 내용도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리고 있던이들의 집결지가 되고 있었던 성전에 가셔서, 그러한 approach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이시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해석을 100%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좀 자신이 없긴 한데…

그러나,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는 예수의 눈에 비추었을 wrath와 zeal, 그리고 compassion과 pain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의 예배하여야할 성전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 정치적 야망, 하나님 없이 스스로 개척해가려는 인간 중심적 사상 등으로 채우고 있었던 상황을 바라보며 예수가 가지셨을 복잡한 생각들.

이제 4일 후면 잡혀서 처절하게 처형을 당하실 예수께서,
그 성전을 바라보시며… 무화과 나무와 같이 열매맺지 못하는 그 성전을 바라보시며 가지셨을 생각들.

아직도 ‘성전신앙’에 목매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인간적인 종교성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어 매고 있는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않은채, 하나님을 신앙과 삶과 종교와 사상의 변방으로 밀어놓은 이 시대를 바라보며,
예수께서 하고 계신 생각은 무엇일까.

고난주간 묵상 – 종려주일 (Palm Sunday)

이번주 주일 설교 제목 : Who Will Save You Now?
이 설교의 제목이 정말 내가 이 종려주일에 묵상할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듯 하다.

거짓된 환상과 이상에 사로잡혀 Save Us (Hosanna)라고 부르짖었던 군중,
그 군중의 어그러진 환호성으로 자신의 메시아되심을 선포하며 입성하시는 주님,
왕으로서의 입성임에도 나귀를 타고 가시는 부조리함…
그 심하게 망가진 피조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마침내 드러나는 긴박감…

어찌 2000년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배경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배경이 그리도 비슷한지…

Who Will Save You NOW?

고난주간 묵상

일요일
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17, 마가복음 11:1-11, 누가복음 14:27-44, 요한복음 12:12-19)

월요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 (마태복음 21:12-19, 마가복음 11:12-19, 누가복음 19:45-48)

화요일
무화과 나무가 마름 (마태복음 21:20-22, 마가복음 11:20-25)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 경고 (마태복음 21:23-22:14, 마가복음 11:19-12:12, 누가복음 20:1-8, 12:1-12)
바리새인과 논쟁, 바리새인 책망 (마태복음 22:15-23:39, 마가복음 12:13-44, 누가복음 20:26-21:4)
밀알의 비유 (요한복음 12:20-36)
유대인의 배척,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 (마태복음 24:1-14,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5-38, 요한복음 12:39-50)

수요일
다른 기록은 없고 예수께서 물러나셔서 기도/휴식 한 것으로 생각됨
가룟유다의 배신 (마가복음 14:1-11) – 이 본문은 화요일의 사건으로 생각되기도 함

목요일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심, 다락방 설교, 대제사장의 기도 (마태복음 26:17-35, 마가복음 14:12-31, 누가복음 22:7-38, 요한복음 13:1-17:26)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잡히심 (마태복음 26:30-50, 마가복음 14:26-52, 누가복음 22장 39-53절, 요한복음 18:1-11)

금요일
공회에서의 심문, 빌라도의 심문 (마태복음 26:50-27:31, 마가복음 14:53-15:20, 누가복음 23:1-23:25, 요한복음 18:12-29)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장사됨 (마태복음 27:32-27:62, 마가복음 15:21-15:47, 누가복음 23:26-56, 요한복음 19:16-19:42)

토요일
무덤에 계심 (마태복음 27:62-66)

일요일
부활하심 (마태복음 28:1-10, 마가복음 16:1-17, 누가복음 24:12)
파수군이 제사장에게 보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타신 예수 (마태복음 28:11-15, 마가복음 16:12-13, 누가복음 24:13-35)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마가복음 16:14, 누가복음 24:36-43, 요한복음 20:19-25)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가령,
집이 부자인 친구와, 집이 가난한 친구가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하자.

집이 부자인 친구는 여행 경비를 넉넉하게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대개의 경우 자세도 더 generous 하다.
어린 시절부터 늘 넉넉했기 때문에 stingy 한 attitude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대개는 더 마음도 넉넉하고, 너그럽다.

집이 가난한 친구는 여행경비를 빠듯하게 준비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늘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쫀쫀한 생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가난한 친구는,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있다.
부자 친구의 부 자체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친구가 현실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주어진 상황을 take advantage 하려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부자친구가 이 가난한 친구를 치사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데 있다.
부자친구는 이 가난한 친구가 왜 자기처럼 너그럽게 자신의 것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느냐고 궁시렁 거린다.
함께 조금씩 갹출해서 음식을 사먹거나 할 때에도 자신이 늘 더 많이 내어 놓는 것이 마음이 상한다.
가난한 친구가 어쩌도 조금 더 음식을 먹는 것 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서러움까지 생긴다.
unfair 하다, 저 친구는 너무 짜다, generous하지 않다, 사랑이 없다, 심지어는 그 사람의 인격과 integrity까지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친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비굴해지는 것일까? 불쌍하게 보여서… 그래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내어놓도록 해서 함께 가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와 맞서서 싸우는 것일까? 그 부자친구가 보지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라도 항변하면서?
그 부자친구가 더 나누지 않는 것에 폭력적으로 다가가야 할 것인가? 어차피 함께 가는 마당에… 결국 우리는 나누어야 한다면서?

나는, 늘 나를 ‘강자’의 입장에 두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로 나는 ‘기득권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말 그 ‘약자’의 신발을 신고 상황을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관찰하는 미국과 한국 사회의 상황을 보며…
내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하여…

느닷없이 이런 부류의 생각을 해본다.

Control-Freak

내가…
Control-freak 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건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였다.
그 이전엔 내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motivation을 가진 사람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다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복음을 만나고,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control-freak의 모습과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그 싸움이 무디어 졌다.

몇주전,
주일 예배 시간에, 어떤 아저씨가… 자신이 control-freak임을, Ethiopia에 단기봉사를 가서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경험을 했다는 간증을 했다.
그 간증을 들으며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 맞는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control-freak 이었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는, 내 내면의 가장 큰 적은…
내가 내 상황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control 하려는 그 성향이다.

그러한 성향은 때로, 나를 ‘successful’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나를 파괴시킨다.

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싸움을…
다시 본격적으로 한번 해보자!

WWJD

진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할때,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물론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짧은 식견으로는,
이번 미국의 의료보험개혁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특히 public option이 빠진 것이 아쉽다.

그리고,
이정도의 가장 기본적인 개혁조차도 거부하는 공화당이 멍청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편…
공화당이 배제된 상태에서 많은 일이 진행되었으니…
일이 옳고 그름을 떠나 공화당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비록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판단과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민주당의 의료보험 안을 다짜고짜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미국의 노무현”으로 생각하는 오바마를 응원하면서…
참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언제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서 얻어내야할 것을 얻어내야 하는 것인지,
언제 상대를 포용하고 화합하여 함께 가기로 해야할 것인지,
어디까지 그 상대를 포용해야 하는 것인지…

정치적 논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논리로는 어떻게 그것이 정리될 수 있는 것인지…
참 머리가 복잡하다.

What Would Jesus Do?

결국은… 무엇을 위해서?

어찌된 일인지,
최근들어서 여러가지 speaking engagement가 많았다.
지난 두주동안 총 7차례의 message를 준비해야 했다.
(물론 그중 일부는 내 ‘레파토리’에서 뽑아서 쓰기도 했고, 재탕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게 새로운 힘을 얻는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 여러 생각을 가다듬도록 만드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두주 연속 주말에 out of town을 하며 나름대로 힘든 schedule을 소화했어야 했는데…

어제 저녁에는…
정말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내가 강하게 믿고 있는 신념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게다가 그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함께 수긍하면 더욱 그것이 즐겁다.
그것이 내 전문적 분야와 관련된 것이든, 내 신앙에 관련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잔뜩 하고 오면…
대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많이 깨달았다, 고맙다, 수고했다, 감동했다, 은혜 받았다 등등.
긴 이메일을 받기도 하고, 와서 손 한번 잡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그런데,
내가 그저 이런 것들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쓸모있게 드러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유용하게 느끼는 것…

내가 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결국은 그렇게 내가 engage 하는 사람들의 변화와 성장일텐데…
내 performance로 착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지난 주말에는…
참 오랜만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안 간사님과, 새로 어려운 일을 떠맡게된 JK 간사님과….
새벽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준…
정말 좋은 대화였다.

안 간사님의 새로운 message,
성령-영성에 관한 강의도 정말 흥미롭게 들었다.
내가 늘 궁금하게 생각하던… 안 간사님에게서 발견하는  다양한 사상/성향/가치 들이 실제로 어떻게 안간사님 내부에 integrate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도 안 간사님의 사상(?)을 내가 다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우리가 그렇게 새벽에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 미운 사람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고,
우리 공동체의 개구장이 HS이는… 그 어린 몸을 괴롭히고 있는 pain과 싸우고 있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기위해 맞은 아리조나의 새벽공기가
한편 시원하게, 한편 차갑게, 한편 신선하게, 한편 스산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