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ngdom is Nowhere? Now Here! (마가복음 1:16-45)

유치원생들을 모아놓고, 그 아이들에게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한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 시작을 어떻게 하겠는가? 15분을 함께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기도 힘든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이 전혀 경험해보지도 못한, 경험해 볼 수도 없는 물리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사탕을 주며 달래보기도 하고, 다른 유비(analogy)를 들어 시도도 하겠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신다. “봉숭아 학당의 선생님이 된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심 / 제자들을 부르심 (16-20)



1. 요한복음 1장을 비롯한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 나온 내용들을 참고해 보면,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은 매우 즉각적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여지고 있는 제자도(discipleship)의 내용들을 다음에 비추어서 정리해보라. (유대문화에서 몇 대씩 내려오는 가업과 부모를 즉각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그려진것에 유념하라)




  • 헌신의 대상과 내용

  • 결심의 주체

  • 치루어야하는 댓가

  • 따르는 보상


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당신이 본문에서 특별히 더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심 (21-28)



3.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관찰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22, 27)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가?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면, 이들을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경우와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4.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가?(24)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면 이들을그리스도인이라고 부 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경우와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병자들을 고치심 (29-34), 나병환자를 고치심 (40-45)



귀신을 내어쫓는 일이나 병자를 고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이곳에 임했다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이미 구약에서 그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것을 성취하고, 당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사람들이 여기고 있었던 것들을 예수님의 권세(authority)로 정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32, 33, 37, 45)



 



6. 나병(leprosy)은 악성 피부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형벌로 인식되어온 질병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고, 종교적으로도 멸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행동들을 관찰해보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태도와 행동들에서 예수님의 어떤 의도들을 찾아볼 수 있는가?



 



7. 비슷한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기사를 넣으면서, 그 당시 천대받던 계층이었던 여성에 대한 존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새로 도래하고 있는하나님 나라가 기존의 파라다임을 뛰어넘는 또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당신의 삶 속에서, 기존의 세상 속에서의 가치관에 의하여 사람들을 구분짓고 판단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떤 다른 기준들이 당신의 삶 속에 세워져야 하는가? (교우관계, 가족관계, 직장/학교에서, 정치적 입장, 배우자 선 택 등등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8. 예수님께서는 왜 반복해서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신다고 생각하는가? (25, 34, 44)



 



9. 예수님께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내용을 나병환자는 왜 나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치유된 나병환자의 이러한 불순종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45)



  



기도하시는 예수님 (35-39)



10. 오늘의 본문에서 즉시(immediately)라는 단어는 8번이나 등장한다. 그만큼 빠른 템포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밤 늦게까지 사람들이 문 앞에 모일 정도로 예수님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35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동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1. 35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후에, 내리신 결정을 살펴보라. (38) 상황에 근거한 외면적 필요(felt need)들을 채우는 것들과 원칙에 근거한 실제적 필요(real need)를 채우는 것에 대한 균형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찾으시는가?  당신의 QT 생활에 관하여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 당신의 삶 속에서, 상황에 얽매여 벌어지는 상황만을 처리하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들인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정리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내용을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가만히 생각해보라. 어쩌면 당신은 당신 삶의 문제 하나를 해결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수도 있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혹은 심심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펼쳐보이신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과 범위는 그 모든 내용들을 다 초라한 것으로 만들 정도로 광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근동 지방에서 오늘 본문의 사역들을 행하고 계셨을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군중들의 모습속에서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모습을 보고 계셨다.



 



12. 다음의 항목을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정리해보라.




  •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

  •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 사역의 열매

  • 예수님의 자세, 예수님의 마음


13. 당신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은 어떤 것들인가?


 

어제 긴~ 미팅을 마치고

어제는 아침 9시에 conference call을 하나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10시부터 4시까지 business/투자 관련 meeting이,
4-5시 사이에는 그것을 wrap up 하기위한 dialogue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7시부터 9시 까지는 business meeting을 한 사람들과 다시 저녁식사를 했다.
어제 미팅+식사 시간을 다 합하면 총 10시간을 사람을 만나는데 사용한 셈인데…

얼마전,
내가 business 관련 meeting을 많이 하게 되면서 한 생각이 있었다.

흔히 business 특히 투자 관련 meeting을 할때 흔히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이 meeting에서 우리 회사에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내가 한가지 했던 생각은…
내가 협상을 하고 있는 상대가 손해를 보고 내가 잘 되는 형식으로 deal이 성사되는 것을 내가 바라면서 meeting에 임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협상이 필요한, 혹은 밀고 당기는 전략이 필요한 meeting에 들어갈수록…
그 meeting 전에 그 상대방을 많이 축복하자는 것이었다.
이 미팅을 통해서 저 상대방에게 큰 blessing이 주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자선사업을 위해서 회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물론 내 회사의 이익과 이윤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내 회사가 중요하듯이 상대의 회사도 중요하므로,
그 사람들이 잘되길…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들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human flourishing이 spread 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 그 긴 미팅을 하고, 저녁식사를 다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내가 그런 기도를 하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remind 하게 되었다. -.-;

늦게지만… 정말 그 분들에게 참된 blessing이 있길…

프롤로그: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5)

1501, 당시 성종이 다스리고 있던 조선은 명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백의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 민족은 순식간에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되었고, 거대한 제국 명나라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다. 중국 대륙에는 왕조가 바뀌어 청나라, 중화민국, 그후 공산 중국이 들어섰으나 조선 민족은 독립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고 때로는 속국으로, 때로는 식민자치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 민족가운데에서 일부 선각자들은, “하늘 계시를 받아 백성들을 위로하거나 길을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나마도 1704 최말락 이라는 마지막 선각자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 민족에게 근근히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언젠가 다시 찾아와 조선왕국을 재건하고 조선의 세종대왕때의 명성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다.

이제 2008, 최말락 선각자가 마지막으로 조선 민족에게 나타난지 300여년이 났고, 조선 민족의 일부는 중국화 되었다. 이전에 지고 있었던 민족의 소망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보인다. 기다리던 과연 어떻게 도래할 있을 것인가.

1. 위와 같은 상황에 당신이 처해 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지식을 모두 접어두고 생각해 보면, 민족의 소망이 복음 소식은 어떤 형태로 시작되어 전개될 으로 생각되는가?

 2.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복음의 프롤로그 (prologue) 시작하면서 구약의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다. (2-3) 구약 선지자의 예언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언은 어떻게 본문에서 이루어 지는가? (4)

 세례요한의 등장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복음의 시작이 그저 우연인 것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세례요한의 탄생이 그저 갑작스럽고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보라. ‘기독교인들은 우연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기암시를 한다 이야기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은 보통 어떻게 반응하는가?

 3. 4-8절에 나타난 세례요한에 대하여 본문이 기술하고 있는 것을 자세히 정리해 보라. (세례요한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사역의 장소, 사역의 대상, 사역의 내용, 그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에 대한 설명, 사역의 자세 )

특별히 요한의 이러한 사역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당시 물에 잠기는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할때 행했던 종교의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오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의식을 행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러한 행동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일으켰을 반향을 상상해서 그려보라. 세례요한이 이렇게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런데도 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히브리서 4:15-16, 5:8)

6.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나타났던 현상들을 정리해보라. (10-11) 이것은 예수님의 어떠한 면들을 드러내고 있는가?

 7. 구약에서 예언되어온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예수,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음 등의 기사등을 다시 묵상하여 보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과 30 남짓 전의 일이었고 여전히 예수를 만났던 사람이 많았을 당시 시대에,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선언하고 다니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는 집단의 출현이 두드러지고 있었을 때에, 예수가 하나님 언약의 성취임을 드러내는 일은 중요했을까?

 8. 300년동안 계속된 영적인 침묵/암흑기가 끝나고 드디어 새로운 왕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중요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영원히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될 왕이 도래라는 웅장한 스케일의 사건을, 마가는 어떠한 어조(tone)으로 기술하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라.

– 주요 등장인물 (예수님과 세례요한) 사회적/경제적 계층

– 왕으로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두가지 중요한 일들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자세

– 그 당시 사건들이 미쳤을 사회적, 정치적 영향

– 이전 하나님의 약속들과의 연관성, 사건의 역사성

 9.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는 연결 고리 부분에서 (10),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시고 나서 시험을 받으시는 연결 고리에서 (12), 마가는 어떤 접속사를 사용하여 연결시키고 있는가?

이러한 접속사 사용은, 세가지 사건이 시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내용상으로도 서로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나타내어준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심,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심,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 세가지 사건을 묶어주는 하나의 주제(theme) 무엇인가?

10. 한반도에서 동명성왕에 이어 유리왕이 고구려의 왕이 되었을 ,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하고 있을 , 그리고 근동의 작은 로마 자치식민지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을 ,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을 마음에 두고 계셨다. 당신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당신의 인생의 목표, 학업, 진로, 인간관계, 가족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11.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복음의 시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질문에서 나누어진 내용들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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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가복음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앞으로 마가복음 성경공부를 진행하면서 혼자서 만드는 교안을 이곳에 계속 한번 올려보려 한다.
일단 이미 만들어 놓은것 몇개를 금방 올리고…

하드코어 엔지니어


중학교 읽었던,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한 교양서적 권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크기의, 아주 짧고 쉬운 책이었는데 저는 책을 번씩 다시 읽으며 흥분했었습니다. 사물의 근본을,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는 물리학에 저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제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것으로 생각했지만, 저는 의사가 아닌 이공계를 택했습니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졸업했던 대학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하는 시스템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원하는 전공을 마음대로 선택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물리학을 선택할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꿈꾸었던,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파헤치는 그런 위대한 학자가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모든 생각이 미숙한 것이었지만, 당시엔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나마 물리학과 매우 가까워 보이는, 그러나 순수과학 아닌 공학 범주에 드는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공학을 선택하면,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밥을 먹고 같다는 생각해서 결정한 나름의 타협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재료공학은 제게 매우 재미있는 학문 분야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겐, ‘순수과학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사 과정 지도교수를 정할 때도 지나치게 실용적인 연구를 하는 실험실보다는 자연과학적 원리를 파헤치는 실험실을 택했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는 중에도 원리를 파헤치는 것에 대한 강박은 계속 되었습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으로 박사과정을 마무리할 있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 논문 주제를 바꾸어 가면서까지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 몰입했으니까요. 제게 있어 공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은, 안정적인 밥벌이를 있는 환경 속에서 순수과학을 하는 적절한 타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실리콘 밸리에서 하드코어 엔지니어들을 만나면서 철저하게 깨어졌습니다.


제가 일하는 그룹의 디렉터는 미국의 스쿨 박사입니다. 사람의 주도 아래, DVD+RW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학력으로나 경력으로나 소위 스펙 좋은 사람이지요. 디렉터인만큼, 아무래도 행정적인 일들을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 높은 사람들과 회의도 많이 있고요.  어느 퇴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실험실에 들어가 보니 사람이 열심히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열중해서 여러 샘플들을 측정하고 있는 그에게 제가 그러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오늘 온종일 높은 양반들과 회의를 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곤해. 정말 지루한 회의를 하느라 지겨워서 혼났어. 그래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다가 집에 가야 스트레스가 풀릴 같아서 말이야. , 아까 네가 이야기했던 고장 실험장비 있지? 내가 그거 손봤어. 이제 거야.”


사람에게 있어 실험은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즐거운 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그룹에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 있습니다. 자기 돈으로 몇백 하는 전자제품을 사서 분해를 후에 새롭게 알아낸 것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전기 자동차를 자기 손으로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어본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집에 공작실(machine shop) 두고 필요한 샘플을 자기 돈으로 만들어와서 회사에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 정말 뼛속 깊숙이 공돌이들/공순이들 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고 신나게 일하는 우리 그룹 사람들에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물어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세상에서 쓰이는 신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필요 때문에, 논문을 쓰는 일을 하기도 하고, 학회에 참석도 합니다. 저희 그룹에도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일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발명(invention)입니다. 발명 자체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열심히 배우고 다른 이들과 나누었던, 창세기의 문화명령에 근거한, 소위 기독교 세계관 따르면 우리가 땅에서 하는 가운데 많은 일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피조세계를 다스리라는 명령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자(agent) 되어 창조활동을 하라는 의미를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가령,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자유롭게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세상에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여 발명하고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저와 같은 엔지니어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기독교 세계관 스터디도 하고, 책도 읽고, 친구들과 열띠게 토론도 하고,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었는데, 막상 크리스천 엔지니어로 사는 제가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충분히 깨닫고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순수과학에 대한 막연한 헛된 동경에 사로잡혀, 그리고 기술을 개발해서 세상에서 쓰이게 하는 것이라는 공학의 원래 의미를 잊어버려, 그저 논문 쓰고 학회 가서 발표하고, 이름 내고 유명해지는 것에 목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논문 쓰고 학회 가서 발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엔지니어 대다수가 직업활동의 핵심과 목표로 삼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재발견한 이후, 저는 열심히 일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마음에 두셨던,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가득 차게 되는 ,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체화한 창조(new creation) 땅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가 직장 생활 속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나가는 일에는 많은 실제적 어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혹도 있습니다. 회의가 있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보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직장 생활 속에서 그것을 배워가며, 지금 시점에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그리스도인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흥분되도록 신나는 일입니다!

Compassion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묵상하고 다루기 좋아한다.
성경공부를 좋아하고, 삶의 여러 영역에서 통합적인 것을 이끌어내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신앙이 자꾸 피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고,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을 띠기도 한다.

내 아내는 반면, 손에 잡히는(tangible)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 사람들을 돕고, 내가 하는 일이 직접적으로 열매로 맺히는 일을 보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연구와 같은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것 보다는 환자를 보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제,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compassion을 보이는 것을 실제 해보는 기회를 갖었다.
민우를 데리고 함께 아프리카의 AIDS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게 보낼 care package를 꾸리는 일을 했다. World vision에서 주관하는 일이었다. 한시간 반 정도 정말 꽤 열심히 일을 했는데 정말 하나도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민우도 정말 열심히 했다.

세상을 향해 compassion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사변적인 종교에 신앙을 가두는 것을 탈피함을 의미한다…. 는 그런 묵상을 하게 되었다.

No Power?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들면서, 연륜이 쌓이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내게 주어지는 권한(power)들이 늘어간다.
직장과 Christian ministry, 그리고 가정에서도… (아이가 커가면서 cover 해야하는 영역도 더 넓어지고…)

정말 큰 power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파워일지 모르지만,
권력 추구형의 인물이 아닌 나로서는 그런 것들이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

최근 1년여동안,
내가 내게 주어진 권한과 권력을 심하게 남용하였음을 조금씩 발견하는 과정중에 있다.
그리고 그런 권한들을 행사하는데 있어 그 권한의 효율성만을 극대화하려는 자세로 대했음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그 권한의 nature가 무엇인지, 그 권한을 통해 섬겨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그저 auto-pilot으로 돌려놓고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 나를 보고 있다.

몹시 가슴아프고 힘들다.

대략 1년여 정도만…
내게 아무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그런 상황을 누릴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겸손의 자세라기 보다는 회피의 자세임이 분명해 보인다.

빌립보서 2장을 다시 좀 더 깊이 묵상해보고 있는데… 아직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일한다는 것

제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글을 쓰거나 하는 형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들러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 대학생으로부터 제 나이 정도 되는 사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대부분은
공대생/공학자/엔지니어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미싱공’이라고 칭합니다. 그 논리는, 60-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이 ‘미싱공 언니’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21세기 초반 한국의 경제 성장은 현대판 미싱공인 엔지니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45세면 다니고 있던 회사 나와서 뭐 하며 살지 막막해지는
현실은 40년 전 미싱공 언니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푸념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동생들 학교 보내겠다고 시골집을 나와서 상경, 공장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예전의 ‘미싱공 언니’들에 비하면 물론 지금 엔지니어들은 여러 가지 처우가 훨씬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엔지니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랄까요 그런 것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저는 수년 전 KOSTA/USA 집회에서 손봉호 교수님께서 하셨던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씨름했던 학문/직업세계와
신앙의 통합에 관하여 가장 명쾌한 그림을 그려주는 말이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그분의 주권 아래 회복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기쁨이 그때는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올 세상의 삶 (life to come)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삶과 사역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새 창조가 이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고 그 가치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월화수목금금금’을 하며,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21세기 초반의 엔지니어들에게,
예수께서 선언하신 이 새로운 세상, 새 창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고민을 가지고 실제 삶을 살아내는 일은 이론적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대학원생일 때 열심히 배웠던, 창조-타락-구속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틀은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긴 한 걸까 하는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세계관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다들 교수님이 아니었던가. 정말 ‘세상’에서 뒹구는 공돌이-미싱공들의 현실에는 그저 맛있어 보이는 자린고비의
굴비는 아닐까.

제 나름대로 1980년대 후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가치를 끄집어내서 살다 보니  심하게 세속화되어버린 저 자신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빡센’
세상을 접하면서 그 기독교 세계관(혹은 개혁주의 세계관)의 프레임워크가 정말 유효하긴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고요.

물론 제 나름대로 이에 대하여 정리해가는 생각이 있긴 합니다만,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이곳 eKOSTA 에서도 그런 내용을 나누며
많은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글은 이 정도에서 애매하게 맺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댓글 등으로 제
생각에 ‘딴죽’을 거시거나 추가 설명을 요구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렇게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회복된 그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노동할 것이다.’라는 그 그림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어떤 분들이 제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저 영원한 나라가 품는 가치 가운데에는 온전하게 회복된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비록 여러 가지 현실이 여전히 어그러진 모습 속에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 회복된 가치가 마치 지금 현재의 가치인 것
같이 살아내는 특권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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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작년이었던가요, 제가 어떤 지방에 가서 다른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제게 주일 예배에서 간증해 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간증을
하는 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간증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께서 워낙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형편없는 간증 동영상이 제 아내에게 입수된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 간증을 듣더니 다시는 다른 곳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도 듣기 어려웠다나요.

그 간증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 공허함이
해결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했던 공부를 어렵게 하심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움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제 아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간증의 전반부였습니다. 소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반감만 주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아내의 생각이 맞습니다.

eKOSTA에서 제게 ‘직장생활’에 관한 글을 써 보라고 권유했을 때, 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여러 가지 고민과 기쁨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이야기가 마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와 같은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깊이 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허락한 것 같다는 우려가 그 후에 닥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소위 ‘명문학교’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하였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장의 안정성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하는 내용도 소위
‘첨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서의 만족도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 제가 제 사는 이야기를 쓴다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이렇게 미리 언급해둠으로써, 제가 엘리티시즘을 추구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제 자랑을 하려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인데, 제대로 전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런 자기소개와 변명이 뒤섞인 애매한 글로 제 eKOSTA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를 얻기 원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다른 분들의 충고와 조언,
질책과 코멘트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인터렉티브한 대화가 오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ttp://www.ekost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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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eKOSTA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주에 하나… 적어도 두주에 하나 정도는 쓰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했는데, 자꾸만 글쓰기를 미루게 된다.
앞으로는 가능하면 매주 월요일은 eKOSTA 글로 여기 내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결심하고 해야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일단 처음 두편을 여기에 올린다.

자세도 중요하다!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이 전 교인에게 월요일 하루만 ‘부정적인 것들’을 없이 사는 날로 하자고 제안을 했었다.
불평하지 않고, 불만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어제 하루,
정말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아… 정말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살려고 하니…
정말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 부정적인 생각, 불평, 불만 중 많은 것들은,
내 ‘거룩한’ 신앙적 사고와 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은혜에 대한 개념이고 뭐고 간에,
그저 이 부정적인 생각의 cycle로부터 나를 건져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혜에 대한 개념이 내게 온전하게 이해되지 못한, ‘깊은’ 문제가 내게 있다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내 문제는 삶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하는 ‘얕은’ 문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들 신드롬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주일 설교가 ‘탕자의 비유’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주에는 ‘큰 아들’에 맞춘 설교 였는데…
어쩌면 많이 들어서 아는 그런 이야기였다.
큰 아들도, 작은 아들 못지 않게 lost son 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 다 아는 이야기를 참 설득력있게 전달한 설교자의 재능이 참 돋보였다.

어제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그 큰 아들의 문제를,
불평하는 마음이라던가, 부정적인 생각 등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최근…
나 자신이 그 ‘큰 아들’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내 자신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의 문제가, 불평하는 마음을 갖는 다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 같은 ‘얕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 그 자체의 깊은 의미가 그저 내 생각과 마음을 겉돌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judgmental함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내 ‘은혜 없음’은…
내가 그 은혜의 의미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까지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 은혜…
그 은혜의 의미가 그저 shallow한 수준으로 이해되거나 잠깐 뜨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골수에 사묻히도록 그렇게 새겨지면 좋겠다…

은혜… 은혜…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