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인
미연은 최근 음주운전자에의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현재 사고로 자유롭지 못한 하반신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큰 돈이 드는 수술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천가의 작은 하꼬방에서 근근히 두 어린
동생과 살고 있는, 소녀가장 미연에게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그러나 앞을 볼수 없는 미연이 다리마저 쓸 수 없다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단 말인가. 미연은 큰 실의에 빠졌다. 미연은 간절히 기도했다. 어떻게든
다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래서 동생을 부양하며 살수 있게 해 달라고.
그때, 미연에게 믿기 어려운 뉴스가 전해져 왔다. 자신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어느 부자가, 자신의 수술비를 다 대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앞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수술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이야기해온 것이었다. 아니, 겨우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만도 믿을 수 없을만큼 감사한 일인데, 게다가 앞을
볼수 있게 해주는 수술까지! 그리고
그러나
그것은 미연이 들은 뉴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미연이 입원해있던 병동의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그 사람들이 지불해야하는 모든 경비를 대겠다고 이 부자가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미연을 어려움에 빠뜨린 음주운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미연은 감사와
기쁨이라는 원래의 감격을 지나 그 부자에대한 호기심과 경외까지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이 부자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자연을 다스리는 파워 (4:35-41)
1. 1절의 바다 저쪽 (the other side)은 이방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데가볼리(Decapoilis)지방이었다. 자민족중심적인 (ethnocentric)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을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갑자기 ‘저쪽’으로 가지고 하시는 말씀은 어떻게 들렸겠는가?
2. 예수께서는 왜 풍랑을 스스로 잠잠하게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깨울 때 그제서야 일어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에 기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이방지역으로 배를타고 가는 제자들의 심정, 예수님의 그 제자들을 향한 생각 등을 염두에 두어 정리해보라)
3.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반응으로 비추어보아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가?
악한 귀신을 다스리는 파워
(5:1-20)
4. 예수님과 귀신들린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당신의 말로 기술하여 보라.
5. 예수께서는 왜 귀신을 그냥 내어쫓지 않으시고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여겼을지, 이방인땅에 들어와서 그것도
귀신들린 사람을 대하면서 제자들이 그 귀신들린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고
계셨을지 하는 것을 염두에두고 생각해보라.)
6. 왜 이 본문에서 나와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냉담하다고 생각하는가? (17절)
7. 예수께서는 왜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19절)
병을 고치시는 파워: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
(5:24-34)
8. 예수를 찾아오기전 이 여인의 상황을 자세히 기술해보라. 육체적, 정신적, 재정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종교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사역과
선포의 초기에, 예수께서 급한 일(죽어가는 소녀를 고치는 일)을 앞두고 이 여인에게 시간을 보내신 것에 주목하여보라.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하시는 사역과 선포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가?
9. 예수께서는 왜 이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병을 고치시는 파워: 회당장의 딸
(5:21-23, 35-43)
10. 예수께서 혈루증 걸린 여인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회당장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11.이 소녀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데에는, (병을 고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적이다.) 더 적은 무리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시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유로 하나님 나라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나,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점진적으로 시간을 두고 가르치신 것등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라.)
12. 예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장면을 보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어떻게 이 내용을 소화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예수의 권능에 대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예수의 선포에
대해)
정리
13. 본문에서는 예수의 권능(파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는 것(강도:strength)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예수께서 이 정도까지는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렇게 큰 것 까지는 하실 분이 아니라고, 그분의 능력을
제한해서 생각했던 경험이 있는가?
14. 본문에서는 또한, 예수의 권능(파워)의 강도가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의 권능이 미치는
영역(sphere)이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라.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계층과 정체성, 예수에게 일반적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졌던 기대 등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라.)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혹은 이 세상 속에서, 예수께서 어떤 영역까지는 주(Lord)이시지만 다른 어떤 영역에서는 주(Lord)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가? 그것은 어떤 영역들인가? (조금 시간을 가지고 당신의 삶의 여러 영역들을 묵상하며
정리해보라,)
최근, 운동을 하면서 들은 것은, 모 신학교에서 “Postmodern 시대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기”라는 내용의 시리즈 강좌이다. (아마 한학기 과목인 것 같기도 하다.)
Tim Keller와 Ed Clowney 가 공동 강의를 한 것인데…
어떤 것은 참 깊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어떤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중,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내가 한참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한마디.
“영적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은사를 활용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은혜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7장의 다음 본문을 인용하였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음이 바짝 말라있고, 배우자가 아닌 이성에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있고, 자기 배우자를 미워하고 있고,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심에 가득차 있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 가득차 있다 하더라고,
그 사람이 매우 훌륭한 설교를 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훌륭한 설교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주님과 건강하게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고.
(특히, 훌륭한 설교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그런 착각을 쉽게 한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
내가 얼마나 그 일을 잘 하느냐,
심지어는 내가 어떤 value system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내가 올바로 서있느냐 하는 것을 재는 바른 잣대가 되지 못한다.
나 같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꼭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고 새겨야할 말이다.
성경공부 리더를 하고 있는 성식은 최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깊은 실망과 회의에 빠져있다. 몇몇의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토론에 참여도 하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데 반해, 같은과 후배 동철이는 도무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동철과 따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보고, 격려도
해 보고 하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나누는데 왜 동철이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인가. 성식은 하나님 말씀의 힘(power)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과 동시에 동철에 대한 미운 마음마저
들기 시작한다. 집에가서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알텐데 왜 저렇게 꽉 막힌 것일까.
과연, 성식의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정당한 것일까. 예수님께서 지금 성식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느끼셨을까.
2000여년전, 예수님께서는 성식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겪으셨고,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성식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을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1-9절, 14-20절)
1. 14절-20절을 참고하여 3-9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내용들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세히 정리해보자. (씨 뿌리는 사람, 씨, 네가지 토양, 새, 뿌리, 싹, 열매 등등)
2. 당신 주변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각각 몇 % 정도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교회 내에서는 이 네가지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각각 몇
% 정도 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당신은 어떤 토양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 (가령, 가시밭이라면, 막고 있는 걱정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
3.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어떤 방식으로
뿌리는가?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떠한 특징을 말해주는가? (씨를
뿌리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정리해보라)
4. 열매를 맺는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들을 정리해
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의 역할
받아들이는 토양의 역할
열매를 맺는일을 결정하는 요소 (who’s in control?)
이를 통해 알게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5. 당신이 좋은 토양이 되기 위해서 당신의 삶
속에 바뀌어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숨겨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감출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10-13절, 21-25절, 33-34절)
6.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10-12절)
(본문에서 “비밀”로 번역된 단어는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신비(mystery)”라고 해석하면 그 내용이 더 자연스럽다. 또한 12절에 ~깨닫지 못하게(so
that) 이라고 되 어 있는 부분은 ~의 결과로 (with the
result that) 이라고 해석을 하면 더 자연스럽다. 마태복음과 누 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이 부분을 더 부드럽게 표현했다.)
7. 21-22절의 비유는 무슨 뜻인가? 이 비유는 10-12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8. 예수님께서는, 21-22절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드러나는 신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촉구하고 계시는가? (23-24절)
9.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기는 일”(25절)들을 당신의 삶과 당신
주변에서 본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이 구절은 영적 성장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 (26-32절)
10.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랐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가? 나누어보라.
11.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눈으로 보아 형편없어 보이는 경우를 열거해보라. 당신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보잘것 없지만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정리
12. 당신에게 드러난 비밀/신비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가? 그 신비는 당신의 삶의 여러 영역
(삶의 목적, 사람들과의 관계, 직업/커리어, 삶의 자세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같은 팀에 있는 어떤 직장 동료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우 이기적이고, bossy하고, nosy 하다.
뻔히 다 아는 얘기를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여러가지 세팅에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다른 직장동료 흉을 보는 경우가 많다.
애매하게 비꼬는듯한 어투로 ‘겸손한척’ 하는데, 이것이 아주 효과적인 self-defense mechanism이 되어 더 이상의 argument로부터 자신을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
늘 다른이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하려고 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무리한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강자엔 자신을 낮추고, 약자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나는 이 사람과 꽤 많이 부딛힌다.
다소 오지랖이 넓은 나는, 이 사람이 이런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그냥 고분고분 봐주지 못하는데,
문제는 내가 그것을 통크게 받아주거나 너그럽게 품을 capacity가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담하게 그 문제를 그 사람에게 이야기할 용기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애매한 긴장을 유지하며 이 사람과 지내고 있는데…
최근 이 사람이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 또 아주 짜증나게 bossy하면서도 nosy하게 접근해왔다.
나는 그냥 쌀쌀맞게 대하고 말았는데,
생각해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기도 하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우리 팀의 chemistry를 흐려놓는 행동을 뭔가 저지해야겠다는 어줍잖은 의협심에 이 사람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사람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말하자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 분야의 전문성을 더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 게다가 이 사람이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나름대로 논리의 헛점도 있다.
내가 받는 유혹은,
내가 가진 전문성과 논리로 이 사람을 짓눌러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를 작게 느끼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런 시도를 하다보면…
그런 작전이 먹히지도 않은 뿐 아니라… (더 큰 갈등만 불러일으키고 나도 괜히 모냥도 빠지고. -.-;)
이 사람도 이 사람이 가진 self defense mechanism을 더 작동해서 더 좋지 않는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러는 와중에서 내가 망가지는 것이다.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내가 가득차게되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가진 사랑이 아니라, 내가 가진 힘으로 이겨보려는 욕심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