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주제 미팅

오늘 저녁에,
2011년 KOSTA/USA 주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팅을 위해 비행기를 탄다.

주제미팅에 참석하면서 갖는 부담감이랄까 그런 것이,
작년과는 매우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동지들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하나님,
내년에도 우리를 쓰실 예정이십니까. 아직은 우리가 그래도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 질문은 매년 주제미팅 즈음에 하게되는 질문이지만,
금년에… 정말 진지하게 그것을 여쭙는 기도를 하면 좋겠다.

기대가 크다.
내 동지들, 내 형제들을 만날 기대가…

이번 모임에선,
참 많이 울게될 것 같다.

Construction Workers


우리 office로 사용하던 공간이 공사중이다.
그래서 임시로 옆 건물에 office를 차리고 지내고 있다.

매번 실험실에 갈때면 ‘안전수칙’을 따라야 하는데,
그 안전 수칙이라는게…
안전모 (Hard Hat)과 safety vest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매일 이렇게 construction worker와 같이 입고 일을 한다. ^^

우리 실험실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렇게 입고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해서 함께 찍었다.
재미있는 우리 실험실 사람들… ^^

근심하라

지난 주말에는,
내게 기도를 가르쳐준 한 선배와 참 갚진 이메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래는, 그 형이 내게 보내준 이메일의 일부이다.
참 멋진…
(형, 허락없이 공개해서 죄송해요. ^^)

====
오늘 찬양예배 본문이 고후 7:9-11 말씀이었고, 제목이 ‘근심하라?’였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길 기도할
뿐이다.
나와 너를 포함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 godly sorrow로 가득차는 것이
전염병처럼 번지길 소망한다. 우울증 환자로 분류해도 되었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기도했던 그 일의 시작일텐데….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런 godly sorrow로 간절함과 변증과 분함과 두려움과 사모함과 열심과 벌에 대해 뼛속까지 느끼고 경험하여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네 말대로 함께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는 어찌 보면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을 각자의 환경과 배경에서 해
보자. 혼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함께라면 그리고 성령께서 인정하시고 인도하신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겠지. 우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면서 말이다.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직장에서의 잡담(?)

나는 아침에 직장에 가면,
그날 할 일을 분량과 범위를 대충 정해놓은 후에…
많은 경우 10분에서 15분 단위로 시간을 끊어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한다.

10시까지는 process meeting이 있고,
10시 15분까지는 sample number 5055-1-3-2-5 를 process 하고,
그 중 chamber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약 8분 동안 potential investor에게 보내야하는 회사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서 이메일을 보내고,
10시 30분까지는 sample을 꺼내서 annealing oven에 넣기 전에 inspection을 하고,
그로부터 2시간 동안 annealing이 되는 동안 sample number 5056 series를 processing 할 준비를 하고…
그 가운데 11시 부터 11시 15분까지는 아무개에게 써야할 이메일을 쓰고…

이런 식이다.
(물론 가끔은… 의도적으로 ‘땡땡이’ 치는 시간을 15분정도 계획에 미리 넣어둔다. 그렇게 하면 앞의 일정이 밀렸을 때 buffer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지쳤을 때 잠깐 쉬는 시간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그 계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 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ㅋㅋ)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 계획에 충실하게 하려고 매우 노력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게 주어지는 회사에서의 일들을 다 처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스스로가 게을러지는 것을 막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했을 경우이다.
갑자기 회사 동료중 누가 찾아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30분을 잡아먹고 나면,
내가 15분 간격으로 짜놓았던 계획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만다.
그냥 모두 15분 뒤로 미루어서 되는 일정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정말 그야말로 엉망이 된다.

그 회사 동료가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면 일정을 재조정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과의 30분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와서 그야말로 잡담을 하는 경우라면… 정말 암담한 -.-; 경우가 많다.
혹은 요점만 이야기하면 될것을 여러가지 topic으로 digress 해서 그야말로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매우 힘들다.

이렇게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그렇게 와서 잡답을 걸어오는 회사 동료들을 경계하게 되고, 심지어는 미워하게 된다.
그 사람이 잡담을 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해야하는 일들을 재조정하는 계산이 몹시 바쁘게 돌아간다.
그 사람과의 대화는 빨리 끝내야하는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시간일 뿐 그 사람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바른’ 회사 생활일까.

일을 많이 하는, 부지런히 하는 회사 생활이긴 할테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하는 일들을 제대로 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반성을 해본다.

그러나… 내 dilemma 이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회사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다 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 나는 내가 이렇게 회사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순종과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하다 보니…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모습.

역시 내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로서,
바쁘지만(busy) 쫓기지 않는(not hurried)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정답이겠지….

그러나…

Ash Wednesday

어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Ash Wednesday 였다.

어제 회사 근처에서 경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회사 전체가 정전이 되었고 결국 나는 오전 10시에 퇴근을 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 오랜만에 시간이 났으니 책도 좀 읽고,
깊이 침묵기도도 좀 하고,
말씀 묵상도 깊이 한두시간 하고…
운동도 하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message 준비 밀린거 몇개를 좀 해야겠다..
그런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집에 와서 computer를 켜고 이런 저런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후딱 시간이 지나버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 잠깐 앉아서 졸다보니 오후가 후다닥.
그제서야 밀린 이메일을 몇개 쓰고 나서…
잠깐 쉰다는게… web surfing으로 왕창 시간을 날리고.

저녁을 먹고 나선…
아 좀 밀린 일들을 하자 했는데…
웬걸… 내가 outlook에 표시하지 않았던 conference call이 있었던걸!
왜 안들어오냐는 DK의 독촉을 받고서야 들어가서 한참 회의.

그 이후, A 모 간사님과 전화,
그 이후에 D 모 간사님 + K 모 목사님과 과 또 미니 conference call,
그 이후에 C 모 간사님과 또 전화

다 끝나고 나니 11시 가까이 되어 버렸다. 허억.

기도도 좀 깊이 하고… 어쩌고…
젠장… 기도는 무슨.

내 Ash Wednesday는 이렇게 ‘쫑 났다’! -.-;

그러나…
내가 사순절을 내내 이렇게 보낼수는 없다.

정말 우리 주님의 삶과, 선포와,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뼈속 깊이 새기는 그런 기간으로 삼아보고자 한다.

사실 뼈에 글자를 실제로 새긴다고 생각해보면….
아…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 아픈 묵상을 좀 해보고자 한다.

헌신과 믿음

헌신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불완전한 헌신은 헌신하지 않은 것과 같다.

가령,
leadership training 같은 것을 할때면, 많이 강조하게 되는 말들이다.

그런데,
최근 ‘촉촉함’을 많이 마음에 두고 살다보니…
과연 위의 말들이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 백성됨은,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Grace)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헌신하지 않는 믿음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를 거짓으로 몰아세울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사실 leadership training을 할때 그런 tone으로 강조하는 데에는,
그렇게 헌신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 그렇게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헌신은,
말할수 없이 영광스러운 특권이긴 하나,
헌신이 믿음의 진위를 판단하게하는 근거는 아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늘 나를 잘 알던 사람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깜짝 놀랄수도 있겠다.)

친구

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와 나는 자그마치 6년동안이나 기숙사 roommate를 했다.
같은 연극 동아리를 했고, 함께 여행다니며 놀기도 했고,
함께 연극을 보러다니거나 영화를 보러다니는 것을 즐겼다.

이 친구는 참 머리가 좋은 친구였다.
내가 고등학교 60명중 50등으로 입학을 했는데 (-.-;)
이 친구는 2등 입학이었다.
내가 하루에 5시간 자고 공부할때, 이 친구는 하루에 8-9시간씩 꼭꼭 자며 열심히 하지 않아도 늘 상위권이었다.
천재란 이런 친구구나… 싶은 그런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던가…
거의 윽박질러가며 이 친구를 크리스천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적이 있었다.
참 순하고 마음 착한 이 친구는 그때, 강하게 반발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었다.

그것이 그 친구에게 복음을 이야기한 마지막 기회였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기숙사 방이 멀어지게 되었고,
나는 서쪽 campus에, 그 친구는 동쪽 campus에 살게 되면서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나는 더 깊이 복음에 헌신했고, 그 친구와는 그것을 나눌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 주말,
그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한국에서 작은 start-up company를 하고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는데 이 친구가 식사전에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은 회사를 ‘조기은퇴’하고 가난한 나라에, 선교적 mind로 학교를 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회사를 하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제대로된 product를 marketplace에 내어놓는 것이라는, 내가 기업에 대해 생각하는 입장과도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떼돈을 벌려고 소위 벤처회사를 하는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아아…
이 친구는 뼈속 깊숙히…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동네 작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섬기기도 하고, 소그룹 리더도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가지고 start-up company를 하는 의미에 대해 매우 진지한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열매와 성공등으로 자신을 부유하게 만들기 보다 다른이들과, 특히 가난하고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compassion을 가지고 있었다.
삶에서 공급자가 되시는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깊이 경험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내 best friend를 다시 찾았다!

논리와 직관

논리의 가장 큰 적은,
비이성적인 혹은 감성적 자세가 아니라,
직관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에는,
논리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인 판단을 하곤 하는데…
그러면서도 마치 그것이 논리적인 판단인것 처럼 포장을 하곤 하는데…

그러한 나의 자세와 접근이 최근 참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