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정, 사람의 인정

내가 잘 아는 형이 있다.

소위 그 삶을 드려서 ‘헌신한’ 사람이다.

여러가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credential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놓고’ 헌신했다.

그 형의 그 헌신의 이야기를 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 형과 그 형의 이야기는 꽤 유명해졌다.

그런데… 

내가 그 형을 보면서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

그것은, 너무 젊은 나이에 유명해져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는 헌신이 참 아름답기는 한데,

이제는 그것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너무 젊은 나이에 ‘뜨는’ 바람에… 오히려 그것이 그 형의 자유로운 헌신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때가 참 많이 있다.

(물론 그 형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우려가 그저 기우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난 주,

후배 부부가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고’ 선교에 헌신한 이야기를 들었다.

참 감동적이었고, 그 부부가 정말 그 헌신을 아름답게 계속 이어가길 기도한다.

그러나…

그 부부를 보면서… 내가 아는 그 형이 겹쳐서 떠올랐다.

자신의 헌신이 자산이 되어서, 이제는 그 자산을 바탕으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 후배 부부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 부부의 아름다운 헌신을 하나님께서 많이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저 헌신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혹여나, 저 헌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앞에 내세우는 장식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혹시… 한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사랑하시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을때, 그 ‘헌신’이라는 장식품을 꺼내어 몸을 치장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싶은 욕망이 떠오를때… 주님께서 저 귀한 부부의 손을 꼭 잡고… 

“그 헌신, 내가 참 기뻐한단다. 그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단다. 내가 너희와 이렇게 함께 하잖니… “

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적어도 한동안 만이라도…

이 귀한 부부가, 그리고 이 귀한 헌신이…

너무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떠벌려저서 이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헌신과 믿음

헌신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불완전한 헌신은 헌신하지 않은 것과 같다.

가령,
leadership training 같은 것을 할때면, 많이 강조하게 되는 말들이다.

그런데,
최근 ‘촉촉함’을 많이 마음에 두고 살다보니…
과연 위의 말들이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 백성됨은,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Grace)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헌신하지 않는 믿음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를 거짓으로 몰아세울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사실 leadership training을 할때 그런 tone으로 강조하는 데에는,
그렇게 헌신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 그렇게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헌신은,
말할수 없이 영광스러운 특권이긴 하나,
헌신이 믿음의 진위를 판단하게하는 근거는 아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늘 나를 잘 알던 사람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깜짝 놀랄수도 있겠다.)

수고하는 우리 간사님들…

내가 처음 KOSTA 노가다를 시작했을때,
정말 하도 기가막혀서 말이 안나왔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일을 나같은 사람에게 턱 맡겨두고 저 선배님들은 저렇게 나몰라라 할까.

너무 일이 많아서… 아니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했었다.

이제는 그렇게 지낸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함께 미국 전역에서 수고하고 있을 간사님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돈다.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 조차도 누릴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일들이 대부분인데…

이 일을 그렇게 다들 열심히 한다.

우리 주님께,
우리 간사님들의 이 헌신과 수고를 절대로 이땅의 싸구려 것으로 갚지 말아달라고,
그러나 꼭 기억해 달라고…
이 순수한 헌신과 수고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만큼,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이 반드시 제대로 선포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런 이들을 만나게 하신 주님께 눈물로 감사한다.

바쁘다

뭐 내가 자주 투덜거리듯이…
요즘 바쁘다. ^^

회사일은 계속 ‘급한’것들이 내게 떨어지고 있고,
계속되는 이메일 폭탄에,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들,
매일 계속되는 conference call,
섬기는 모임에서 해야하는 일들…

한동안
아… 바빠지는구나… 지친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가,
요즘엔 살짝~ 이 바쁜 속에서 경험하는 ‘생기’를 찾는다.

내가 다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경험한다.
(내가 참 자주 망각하는 것이다 –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지내다보면,
내 헌신의 자세를 다시 추스리게 된다.
마치 운동을 할때 지방이 분해되는 것 같이… 내 삶속에서 더러운 찌꺼기가 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바쁜 생활 속에서 내 spirituality가 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나같이 허둥지둥 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이상의 시대는 갔다?

사회학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Tony Campolo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여러해 교수로 섬겼다.
언젠가 들은 그의 설교에서 특별히 학생들의 저항정신이 가득하던 1960년대에 사회학교수였던 것이 무척 exciting 했다고 이야기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에 불만을 가득 품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인 Tony Campolo를 향해 분노의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그 젊은이들은 비록 매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이 세상에 나가면 세상을 바꾸어 보리라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Bobby Kennedy, John F Kennedy, Martin Luther King Jr. 등 새로운 사회로의 이상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것과 같은 시기에 학생들은 점점 “me-generation”이 되어갔다고 회상했다.
(이 사람들이 취했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 이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제시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품는 것을 중지한채, American pie에서 어떻게 하면 더 큰 조각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세대가 점차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한국적 상황에서의 me-generation의 등장.

이렇게 갈수는 없는데… 정말 이렇게 갈수는 없는데…

불의에 맞설수 있는 용기

나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20년이 넘도록 나는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세상을 꿰뚫는, 세상을 뒤집는 진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1989년이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은, 한국에서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던 역사적인 해였다.
물론 1987년이후에도 여전히 독재정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잡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권이 등장한것은 그로부터 자그마치 10년 후였지만.

1989년, 하나님나라 라는 진리에 눈을뜨고 내가 아주 안타깝게 생각한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철이 없는 대학교 1학년 시절에…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것이었다.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거나 화염병을 던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던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치욕스러운 불의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그것에 대하여 분노조차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이 끝났다.
2002년 대통령 선거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연설을 들으며,
21세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다시 생각해본다.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나온 뉴스들…
이시대 대한민국 검사님들과 판사님들의 정치감각은 정말 뛰어나다. 예수님 시대의 헤롯의 정치감각이 느껴진다.

김경준 – BBK 건 유죄 판결
정몽준 – 뉴타운 허위사실 공표 건, 벌금 80만원형, 의원직 유지.
이건희 – 에버랜드 전환새차 발행건, 무죄 판결
촛불집회 강경진압에 반대한 전경에 2년 구형

헌신에 관하여

지난 금요일에는 헌신에 관하여 KCF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었다.
대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0. 인간은 누구나 헌신의 대상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헌신의 대상을 제대로 찾을때야 존재가치를 찾게된다.

1. 헌신의 대상은 자신보다 큰 것이어야 한다.
자신보다 작은 것은 헌신의 가치가 없다.
보통 성공, 행복등에 헌신을 하는데, 성공이나 행복은 나 자신보다 큰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헌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보통 그것이 나 자신보다 큰 것이냐를 판별할 수 있는 판별식은, 내가 그 가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 논리적이냐 하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행복은 자신을 채워주는 요소이지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헌신의 대상은 행동이 아닌 가치(value)여야한다.
심지어는 그 행동이 매우 고귀한 것이라하더라도.
가령 어린아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지만, 무슨 무슨 교재를 사용해서 어린아이들을 양육한다는 방법론에 헌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3. 복음을 사유화(privatize)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에 헌신한다고 했을때 흔히 사유화한 비뚤어진 복음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다. 거대담론(Meta Narrative, Grand Narrative)의 틀 안에서 개인화(personalized)된 복음을 가지고 상황을 보아야 한다. 사유화는 개인화와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흔히 거대담론을 이해하지 못한채 헌신하려 하기 때문에 잘못된 헌신의 모습을 보이는 일들을 본다.

우리가 헌신할 궁극적 거대담론은, 결국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졸지 않고 들어준 우리 형제 자매들이 대견하다. ^^

헌신의 특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KOSTA 간사들이 간사 수양회를 할 장소를 물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장소를 찾지 못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선배중 한분이, 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분께 말씀을 드려서 자신의 집을 간사들 수양회 장소로 제공하도록 arrange 해 주셨다. (정말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집 이쪽 끝 부터 저쪽 끝 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리는)

그때 그 선배님은 그 집 주인에게…
“당신의 집에서 KOSTA 간사들이 수양회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 황당한 접근이다!
아니… 자신의 집을 내어 놓는 희생과 헌신을 그렇게 ‘뻔뻔스럽게’ 요구하다니.

이 선배님은 주변에 돈이 많은 분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돈을 가치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일도 아주 멋지게 하신다.
KOSTA를 위해 헌금하도록 설득하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그분에게 커다란 기쁨인지 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헌신은 자신의 것을 억지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에 자발적이고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원칙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선배님과 함께 있다보면…
정말 나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과, 재능과 땀을 드려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전체에 헌신할 것인가, 부분에 헌신할 것인가

내 신앙과 인격과 생각이 아직 미숙하던 20대,
(그렇다고 내가 지금 무척 성숙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수많은 것에 헌신했었다.

내가 헌신했던 “분야”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외 선교, 가정사역, 학생사역, 목회, 빈민, 사회 개혁, 교회 개혁, 학문과 신앙의 통합, 캠퍼스 사역, 학문활동, 소그룹 성경공부, 무교회 운동, 성령운동, 기도운동, 부흥, 창조론, 기독교적 문화, 찬양사역, 반자유주의 (fundamentalism), 공동체…

물론 이것들에 내가 모두 깊이 involve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 후 내 생각이 바뀐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나처럼 가벼운 사람들은, 쉽게 헌신하고 그것들에 몰입하여 정신없는 시간들을 꼭 보내곤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헌신했다고 생각했던 그 헌신 자체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할 뿐더러, 그 헌신의 내용도 얼마나 편협하고 유치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러한 시간들을 보내고,
어쩌면 그런 시간들을 지낼 당시의 나보다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
역시 그러한 모습으로 헌신하는 후배들을 만난다.

내 인생을 바로 이것에 걸었다고 흥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런데 그런 모습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자신이 한 헌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다른 헌신과 영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가령,
복음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것이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섬김들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을때 그것을 모두 ‘믿음의 부족’이라고 정죄하고 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에 헌신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그 자체에 헌신을 한다면,
자신이 편협하게 하고 있는 헌신에 관하여 끊임없이 점검하고,
자신의 잣대로 다른 이의 헌신을 재단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매우 더디지만,
그래도 조금씩 내 신앙이 자라가면서,
내가 편협하게 헌신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버리고,
부분이 아닌 전체에 헌신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직도 갈길은 택도 없이 멀~기만 하다.

어느 공산주의자의 편지

*** 다음은 멕시코 시에 사는 한 미국인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약혼자에게 약혼을 파기하며 쓴 편지이다 ***


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재난으로 고난을 겪소. 총에 맞기도 하고, 교수형을 당하기도 하며, 린치에 처하기도 하고, 엄벌을
받기도 하고, 투옥당하고, 비방을 받으며, 일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오. 온갖 방법으로 수난을 당하는 그런 사람들이오. 우리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소. 우리는 궁핍하게 살고 있소. 우리는 번 것중에서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 돈은 모두 당에 바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주 영화관이나 연주회에 갈 시간도 없고 돈도 없소. 또
아름다운 집과 새 차를 살 돈도 없소.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르오. 그렇소. 우리는 광신자들이오. 우리의 삶은 오직 한
가지 궁극적인 것의 지배를 받소. 그것은 바로 세계 공산화를 위한 투쟁이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인생
철학을 갖고 있소.

우리는 뭔가 목숨을 걸 만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소. 인생의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있소.
우리는 인류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개인의 하찮은 정체성을 던져 버린다오. 그리고 개인 생활이 고되다할지라도 또 당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가 상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오. 비록 매우 작은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인류를 위해 새롭고 좀더 나은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하면 말이오.

내가 진심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이오.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은 나의 생명, 사업, 종교, 취미, 애인, 아내, 여왕, 낙과 즐거움이오.
낮에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꾼다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더욱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사로잡히게 되오. 그러므로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내 삶을 지배하는 이 힘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친구나
연인과는 사귈 수 없으며 대화조차 나눌 수 없소. 나는 사람과 책과 사상과 행위를 그것들이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끼치는 영향과
또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평가하고 있소. 나는 이미 내 사상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도 갔다 온 적이
있소. 또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있소.


How dedicated are you to what you believe in?

존 화이트, 헌신의 댓가, IVP 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