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기준

요즘 내가 생각하는 성숙의 기준.

1. 사려 깊음
자기 중심성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잣대

2. 참을성
자신에 대해 얼마나 죽었는가를 나타내는 잣대

3. 겸손함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파악해내는 지혜

4. 성장
시간이 지남에따라, 변해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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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서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런데,
젊은 사람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저런 모습으로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되면… 참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성숙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젊은 사람을 보는 것은, 참으로 숨이 막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도 그렇게 숨막혀 하시는 것이 아닐까. 

결심과 예배

‘내가 그리스도인 답게 살겠다’고 결심하도록 이끄는  경험이나 예식, 말씀이나 찬송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그야말로 예배하도록 이끄는 경험이나 예식,  말씀이나 찬송 등이 있다.

전자는 인간적 결심을 이끌지만, (결심)
후자는 인간적 결심을 오히려 포기하게 한다. (예배)

결심은 소망을 던져줌으로써 결심하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만,
예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이 드러나기 전에,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결심은 단기적으로 꽤 큰 효과가 있어 보일 수 있지만
예배만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효과가 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예배의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그저 그분 앞에서 바짝 엎드려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없었던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분 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그저 그분이 진심으로 좋아서 그분을 따르는 그런 경험이었다.
내가 그분을 위해서 결심하게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그분을 사랑하게되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결심의 하나님을 다른사람들에게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내가 주변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예배의 하나님이 아닌 결심의 하나님만을 이야기한다.

그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경배하고, 
그분 앞에서 바짝 엎드려 내 죄를 토설하며 울고,
베풀어주신 구원에 감사해서 찬양하는…
그런 genuine한 예배의 경험이 그립다. 

(아땅님 감사합니다~ ^^ 바꾸어 올렸습니다.) 

Conference Call

지난 한주동안 conference call을 했던 시간을 총 더해보니…
자그마치 7시간 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나왔다!
(그중 한 시간은 코스타 conference call, 나머지는 회사 conference call)

그리고 그냥 내부 ‘회의’ 혹은 ‘미팅’으로 보낸 시간은,
4시간 반 정도 되었다.

그럼 총 12시간이라는 시간을 회의만 하면서 보낸 셈인데…
아니, 무슨… 회의론자도 아니고…

이번주는 그것보다는 좀 더 나아지길… 

아버지

지난 연말,
아버지께서 허리가 아프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이것 저것 검사를 하시다가,
척추 근처에서 ‘전이된 암’으로 보이는 조직이 발견되었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그 후에 각종 검사를 하셨는데,
어제 비로소 그 최종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다행히도 암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난 한달여동안,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버지께서 이제 한국 나이로 79살 이시니까, 정말 아버지와 헤어지게될 때가 그저 까마득한 먼날은 아니겠구나… 뭐 그런 생각,
만일 아버지께서 조금더 심한 병이셔서 함께 이 땅에서 보낼 기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이라면… 나는 아버지께 무슨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게 여겨지게 될까… 그런 생각,
이제 40대 중반에 들어서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생애를 어떻게 정리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등등…

지난 한달동안,
정말 회사 일이 참 많아 많이 바빴었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 일로 참 마음이 모아지지 못했었다.

지난 주,
혼자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만일 아버지와 조금 더 이 땅에서 보낼 수 있는 기간을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부터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멋지게 더 많이 develop 하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씀들도 많이 나누면서, 그리고… 어쩌면… 조심스럽게 wrap-up 하면서… 알차게 보내겠습니다.
조금 더 허락해 주십시오…

2월 말, 아시아 출장을 다니는 중에, 한국에 며칠 있게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좀 특별히 허락해주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 이번에 뵈면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보고 싶다. 아마 35년쯤 전에 함께 가보고 못가본 것 같은데… 

바쁜 것과 성실한 것

요즘은 회사 일이…. 
더 많아져서, 밤 시간에 회사에 있게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아침 7시면 집에서 나가기 때문에,
저녁 7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제부턴가 막연히 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내가 민우를 픽업해야 하는 날에는 민우를 픽업해서 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회사에 가서 밤까지 있다가 오기도 하고,
아내가 민우를 픽업할 수 있는 날에는, 아예 회사에서 더 오래 있다가 밤에 돌아오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회사에 밤에 있게되면 능률이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는, 건강한 balance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 일이 많다보니 어쩔 수 없이 뭐…

일이 많아져서 바쁜 것에 눌리다보면,
사람을 진실되게 대하고, 내 삶의 방향을…. 좀 더 먼 장래를 내다보며 매일 조정해 나가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다보니 능률과 효율을 절대화하고, task & goal oriented attitude로 살게된다.

많이 바쁠때 느끼는 무력감은, 바쁜 속에서 성실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 바쁜 삶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갈때 찾아오는 것 같다.

성실함을 회복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찬양을 잃어버렸다…

한 10년쯤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는 찬송을 흥얼거리기 좋아했던 것 같다.

혼자 실험실에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울기도 하고. ^^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입에서 찬양이 없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들을… 내가 흥얼거릴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을 흥얼거리지 않게된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도무지 그 가사의 내용이 천박하기 그지 없거나… 심지어는 참람한(신성모독) 지경의 노래들이 너무 많다.
복음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는 그런 노래가 아니라…
그저 싸구려 종교적 노래들이 너무 많은 것이 한가지 이유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좀 가사가 괜찮다 싶은 것들중에서는… 도무지 따라부르기 어려운 노래들이 너무 많다.
회중이 (혹은 나 같은 일반인이) 따라부르거나 흥얼거릴 수 있도록 작곡이 되지 않고, 전문가가 연주를 하도록 작곡이 되어서…
입에 그 가락과 가사를 두고 하루를 지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도무지 안되겠다 싶어,
이제는 아무도 교회에서 부르지 않는…
옛 찬송가 가락이라도 입에 달고 좀 살아보려고 한다.

내게 제일 좋아하는 찬송…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