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학 노선 (5)

회심을 경험하고 처음 다녔던 교회는 침례교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건강한 침례교의 신학 전통을 잘 가지고 있는 건강한 침례교회였다.

그곳에서, 특별히 고백적 신앙에 대해 잘 배울 기회를 가졌는데,
이 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고백적 신앙 혹은 고백주의적 신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온 중요한 기둥이 되고 있다.

그 후, 교회사를 나름대로 공부해가면서,
나는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이 온전하지 않다고 비판했던 그룹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재침례파 (혹은 아나뱁티스트라고 영어의 anabaptist를 그대로 읽고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요즘은.)
특별히 고백적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국가종교를 거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매력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만날수록, 고백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내게는, 이 재침례파의 신학이 참 마음에 잘 맞았다.

지난 수년에 걸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혜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많은 이들이 아나뱁티스트를 주목하고 있는데,
그렇게 새로 아나뱁티스트가 주목받는 것에도 역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지는 않지만,
이상주의에 대한한 매력을 느끼고 어떤 의미에서 이상주의를 동경한다
그런 내게 아나뱁티스트의 주장은 내 성향에 잘 맞는 것 같다.

다만,
적어도 나는,
이상주의자가 되려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거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많이 주장하는 ‘평화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많이 공감하지만, 웬지 내가 그것에 올인하기엔… 좀…

정리하자면, 나는…

종교개혁전통의 피부색을 가졌고,
캘빈주의의 체질에,
오순절주의의 행동을 즐기며,
고백적 경건주의의 신분증을 가진,
아나뱁티스트의 친구

쯤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