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구약을 보면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것을 그냥 자연스러운것으로 다루고, 죽음을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이야기하는 ‘사망’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서신들과 바울서신들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복음서에서는 의외로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오히려 복음서에는 ‘복음’이라는 어떤 event가 일어났다는 왁자지껄함이 가득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가지 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약에서와 같이 쩨데카(공의)와 미쉬파트(정의)라는 주제를 통해서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신구약중간기과 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부활’과 같은 논의들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 문들을 통해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 안에 사망을 이김, 공의, 정의, 부활 등등의 이야기들이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것과 같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질문 자체가 매우 shallow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복음의 진수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은 자신이 씨름하고 있던 것이 죽음의 문제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