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효용성

어제 출근길에 Tim Keller가 기도에대하여 개인적인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다.
Tim Keller가 O Hallesby의 “기도”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 것.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재앙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 없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이 얻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기도 없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감사할만한 바탕을 가지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오 할레스비의 기도는 내가 대학교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30년쯤 전에 읽은 것인데…
아… 이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오 할레스비의 기도 책 내용 자체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일부터 또 시작되는 독일 출장을 앞두고,
내 킨들에 O Hallesby의 Prayer를 담았다. 비행기안에서 열심히 읽어야겠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

요즘 한달에 한번, 더 짧게는 3주에 한번 꼴로 유럽에 가고 있다.
대개는 집에서 Lyft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그러면 대개 Lyft driver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된다.

Lyft driver: 어디가니?
나: 프랑크푸르트 간다.
Lyft driver: 놀러가니, 아니면 일하러 가니?
나: 일하러 간다.
Lyft driver: 좋겠다.
나: ……

보통 3명의 한명꼴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예전에는 속으로 ‘네가 이렇게 출장가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내가 지금 얼마나 부담되는줄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난달부터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어쨌든 어떤 사람들은 나 처럼 이렇게 하는걸 부러워하는게 사실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멀리 출장가보고 싶어하지 않는가.
혹시 나는 감사해야하는 건데 그냥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툴툴거리고 있는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출장만 그런건 아닐거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그래서 마음 속으로부터 어떤 감사가 사라져버린 것들 중에서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텐데.

이번 주말엔 또 비행기를 탄다.
의지적으로 감사할 계획이다.

문득 살짝 등골이 오싹

요즘 주말엔 거의 완전 쓰러져서 쉬는 수준으로 보내고 있다.
주중에 워낙 시달리고 있기도 하고, 거의 내내 끊임없이 시차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런데 주말에 문득,
달란트 비유가 생각이 났다. (왜 그랬을까?)

그러면서 든 생각.
나는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던져서 그렇게 살고 있나?

문득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러면서 등골이 오싹!

내 삶의 우선 순위와 방향을 다시 좀 잘 점검해봐야 할것 같다.
다녀오는 thanksgiving에는 그렇게 좀 많이 생각해봐야 할 듯.

기독교와 복음

가끔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질문’이 많긴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다며 주변의 사람들을 내게 소개시켜주곤 한다. 그러면 그 사람과 짧게는 한번, 길게는 몇주씩 만나면서 기독교, 철학, 종교, 과학 등등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거나 그런 경우는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기초를 놓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기독교에 관심도 없고, 그냥 현실적인 문제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사람과 한주에 한번씩 만나서 그런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내가 요즘은 하도 출장이 많아서 한주에 한번 만나는게 쉽지는 않다.)

원래 기독교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뭔가 좀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그 사람이 흥미를 가질만한, 그리고 nerve를 건드릴만한 몇가지 이슈들을 꺼내니 쉽게 확~ 들어와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아주 반복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소개해주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impression들을 제거하는 일을 아주 많이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한참… 아주 한참… 그 사람들이 기독교에대해 쏟아놓는 불만들과 불평들에 많이 공감해주고,
나도 그것들에 많이 동의한다고 이야기를 한 후에야 대화를 시작하는게 가능한 경우도 많다.

정말 현대의 기독교는,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설교에 대한 반응

나는 가능하면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라는 세팅에서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우리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교회 사정상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나도 출장가서 죽을만큼 바쁜 와중에 설교준비를 해서 설교를 해야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비해서 설교 준비시간이 무지하게 짧은… ‘가성비 높은’ (다른 말로는 많이 공들이지 못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나서 사람들의 반응이 여러가지로 흥미롭다.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뜨끔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so what? 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개 교회세팅이나 그런데서 뭐라도 하면,
꼭 와서 말씀 좋았다… 은혜 받았다 하는 사람들은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한편 많이 감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는 좀 강도를 낮추어서 들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대개 누가 무슨 얘기를 했어도 ‘은혜를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뭘 잘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교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반응은 그냥 그게 좋았다, 은혜받았다는 식의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더 많이 생각해보려하고, 따져보려고 하는 모습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건 정말 진지한 반응이고, 많이 더 이야기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뭐 이걸 가지고 계속 더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럴 세팅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을것 같긴 하지만…

큰 돈

우리회사는, 기술개발을 해주고 돈을 받아서 운영된다.
그게 우리 회사가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 회사가 돈을 버는 방법중 가장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받는 돈의 액수가 보통 장난이 아니게 많다.
한번에 100 million dollars (한국돈으로는 천억원쯤 되는 건가) 짜리 계약을 하는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10 million dollars (한국돈 100억원) 정도 이하가 되는 프로젝트는 아예 하지 말라고 약간 자제시키는 분위기다. 그런 수준의 project를 위해서 행정 support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화요일에는 내가 참여해서 새롭게 개발한 기술을 ‘팔기’위해서 출장을 다녀왔다. 우리가 판단하기로는 대충 50 million dollars 정도 수준의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 개발하는데 들어간 사람은 딱 3명의 엔지니어와 1명의 테그니션이다.

그래도 액수가 좀 크다보니 사람들이 그걸 위해서 무리하는걸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내가 독일에 가 있을때에도 현지시간으로 새벽에 conference call 들어오는걸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아주 last minute에 일정을 비워서 출장을 다녀오는 것도 그렇다.
밤 늦게 text로 내일 아침 10시까지 무엇 무엇을 해야한다고 연락을 받는 일도 많다.

나는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일이 아닌 것도 오지랖 넓게 할때가 많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보지 않도록 내게 주어진 일은 책임감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어디까지 성실해야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할때가 참 많다.
그냥 naive하게 성실하게되면 그야말로 일폭탄을 받아 몸이 망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은 참 대단하다…

Sub-culture? Counter-culture?

기독교가 seeker friendly해야한다는 생각때문에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기독교 문화를 세상문화의 subculture로 만드는 시도를 많이 본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밀레니얼 이후의 세대는 그렇게 기독교 subculture를 그냥 ‘싸구려’로 생각해버리는 것 같다.

내 생각엔,
기독교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서구사회에서는,
기독교 subculture를 만드려는 노력이 아니라,
기독교의 counter cultural한 모습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제는 기독교 subculture가 지나친 종교성과 결합이되어버리면 그 subculture자체가 대단히 경직되어 버려서 변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나는 그 경직성을 내부에서 개선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리라 보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한국 기독교를 보는 시각은 대단히 비관적인 편이다…

잘못된 질문

지난 주일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내가 웬만하면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를 하지 않으려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
지난주까지 독일에서 바쁘게 보내다가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설교문을 써야 했다. ^^

=== 아래는 설교문 ===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대부분 매우 잘 아는 내용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아마 여기계신 아무나에게 한 두어시간 시간만 드리면 여러분도 이 본문가지고 설교를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종교 지도자, 사회적 저명인사 다 그냥 지나쳤는데 소외받고 배척받는 사람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선행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선행을 하자.
예수님도 그렇게 본문의 끝에서 말씀하셨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오늘은 여러분이 늘 아시던 이 본문을 살짝 다른 각도에서 한번 바라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전체의 구조를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우선 25절에 율법교사가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로 질문을 시작해서요,
29절에 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까지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수준의 reading comprehension(독해) 교육을 받았다면, 뭐 다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조금 이상합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는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야기를 하나 꺼내십니다.
아니 갑자기 왠 이야기를?
그게 이야기를 하시는 건 좋은데, 그 마지막에 예수님이 뭐라고 이 이야기를 끝내시지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시는 걸로 이야기를 끝내십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대답을 하신거죠.

바로 이런걸 동문서답이라고 하지요.

율법교사가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다면, ‘이러이러한 사람이 네 이웃이다’라고 대답을 해 주셔야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논리가 엉망이신 분이셨나. 

자,여러분 지금부터는 팔을 걷어 붙이고 공부를 한다는 심정으로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주시기 바랍니다.
어렵진 않을텐데, 찬찬히 논리를 잘 따라오셔야 이해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 율법교사가 물어보는 질문을 한번 잘 보십시오.
25절에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오니까, 29절에서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을 했다고 누가가 해설을 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는게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지요.
이 율법교사의 모든 생각의 중심에 누가 있어 보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누가 나의 이웃이냐…

이 율법교사의 모든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시는 이유는, 그 대화를 통해서 율법교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건 제가 후에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요,
벌써 우리가 누가복음 10장을 보고 있지만요,
복음서에, 특히 공관복음서 –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하지요 -에 나타난 복음의 모습은요, 예수믿고 개인적으로 누가 천당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인 구원을 포함하지만, 개인적인 구원의 이야기가 아닌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가 일본치하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 일본의 국민이었는데 그때부터는 한국의 국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두고, 강원도 철원에 사는 김만복씨가 일본국민에서 한국국민으로 바뀐날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온 나라가 해방된 날인거죠. 그게 1945년 8월 15일의 이야기인거죠. 물론 그것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강원도 철원의 김만복 할아버지의 국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국적 회복이 그 날의 main event는 아닙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너희들에게 다가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중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영생을 얻지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혹시 이 내용이 새롭게 들리신다면, 누가복음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다는 관점으로 다시한번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매우 새로운 발견을 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 복음은,
이제 깨어진 세상에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는 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그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그런 와중에 와서…
그런데,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묻고 있는 겁니다.

개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도 개인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는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눈을 열어 보게되면, 그제서야 하나님을 기준으로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전제가 잘못되어 있으면, 잘못된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 율법교사도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기때문에 질문이 이상했던 겁니다.
완전 맹구같은 이상한 질문을 한거죠.

여러분,우리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무엇입니까?
내 커리어를 어떻게 할까?
지금 이걸 디딤돌로 해서 조금 더 나은 직장에 가봐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안정될 수 있을까?
내 필요를 어떻게 채울까?
내 자녀를 어떻게 키우나?
왜 내 남편은 내 뜻대로 안해주는 걸까?
아, 여기서 집은 언제 살수 있나?
내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like가 왜 안달리나?
다음 휴가 여행은 어디로 가지?

여러분, 질문이 틀렸습니다.

그 질문들이 전혀 무가치한것은 아니지만, 그건 지금 이 율법교사 수준의 질문인겁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면 우리가 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었을때 망한 case들을 많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되어 망한 세상을 행해 하나님께서 불타는 사랑을 꺾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인을 나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삼으라고 초청을 하시는 거지요.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 커리어의 성공을 위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일,
내 진로를 펼치지 못한 책임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는 일,
잠깐 더 내 필요를 채우는 무엇을 하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의 필요를 무시하는 일,
지금 당장 눈 앞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며 내가 사랑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성취를 보면서 마음 가득히 시기와 질투를 갖는 일…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맺는 망가진 열매들입니다.

오해하시지 말것은, 여러분의 개인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그것만으로 따로 많은 내용을 다루어야 할 것 입니다.
다만, 내 성취와 만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느시대인든지 늘 영웅의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나누었던 영웅의 이야기와, 지금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고대의 영웅이야기는요,
대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영웅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대를 거슬러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내가 정말 authentic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고, 가족은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고, 전통은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내 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뇌하던 끝에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나 가족이나 전통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내 길을 찾는 것.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 내는 것. 이런걸 expressive indivisualism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과거 영웅의 이야기는 어려움을 뚫고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면, 요즘 영웅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를 뚫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잘 알고있는 현대의 철학자 엘사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Don’t let them in, Don’t let them see
Be the good girl you always had to be…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anymore
I don’t care what they’re going to say…

Coco, incredible, Moana 같은 애니메이션들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 똑같은 패턴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서 사회나 시대나 가족의 통념을 깨고 내 꿈을 이룬다. 그게 시대 정신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나 자신을 자꾸 파서 발견되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회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런식의 expressive individualism은 coherent한 문화를 만들어낼수 없다고 진단합니다.
모두가 내 꿈을 이루려고하는 세계관은 그 내부에서 붕괴할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세계관이 공동체적으로도 coherent하지 않지만, 그건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꿈을 이루려고 사는 삶은, 결국 그 안에서 논리적으로 붕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함몰되면 안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채울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게는, 어떤 가치가 내가 추구할 만한 가치냐를 따져볼때 사용하는 판별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꼭 죽으라고 강요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느냐를 따져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제가 만일 온 인류 전쟁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내 자신을 헌신해서 살다가 죽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저는 그럴 자신이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온 인류의 전쟁문제는 나 보다 큰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것은 나라는 그릇에 담으면 내가 차고 넘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인류의 기아문제 해결은 제가 추구할 만한 가치인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성공을 위해서 죽는다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될까요? 내가 내 행복을 위해서 죽는다는 건요?
말이 안되죠.
아니 내가 죽는데 성공이나 행복이 무슨 소용입니까.
왜 그렇죠? 성공이나 행복은 나 자신을 채울만큼 큰 개념이 아닌겁니다. 
내가 성공이나 행복보다 크기 때문에, 그걸로 나를 다 채워도 내가 채워지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제 성공이나 제 행복은 제가 그것에 목매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겁니다.
나 자신에 집중해서 내 필요를 채우고, 
내 꿈을 이루고,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현대에 heroic narrative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결코 heroic하지 않습니다.
그건 coherent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큰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본문의 율법교사로 돌아가 보지요.

이 율법교사의 관심은 그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힘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옳게 보이는 걸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완전히 핀트가 맞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보지요.
그럼 이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었을까요?
글세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 나라, 영생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하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한된 시간 동안에 그 개념을 이 곳에서 다 설명할수는 없겠지만, 혹시 그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시면 제게 끝나고 물어봐주세요.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신학적 대답을 줄줄이 해주시는게 아니고, 대화를 통해서 그 율법교사가 잘못된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보이시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던지는 질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던지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은 아닙니까?

여기서 이 설교를 마무리 하면요, 이 설교의 내용은 앞으로는 질문을 잘 하고 살아라 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좋은 질문을 던지자… 더 잘 해보자….  이런 도덕종교적 설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그런 도덕종교적 접근을 취하지 않습니다.
저는 질문을 잘하자 라고 이 설교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잘하자고 결심해서 질문을 잘하게되는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한번 대비시켜봅시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것이었고요,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요, 율법교사의 질문, 즉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것에 대해 답을 얻는 것과
예수님의 질문, 즉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라는 것에 답을 얻는 것 중에서,
어떤 대답이 그 사람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까요?
누가 내 이웃이냐에 대한 답을 혹시 얻었다면 이 율법교사는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편가르고, 그 안에서 종교적 생활을 열심히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던진 질문,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라는 질문은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을 조금 더 원래 질문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거죠. –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지도자가 처음 물어보았던 ‘영생의 삶’에 더 근접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가 완전 봉숭아학당 맹구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 사람의 질문의 관점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주십니다.
누가 네가 사랑해야하는 너의 이웃이냐고? 네가 이웃을 사랑해봐.

자기자신에 온통 빠져서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이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보고 있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 다른차원의 이야기를 해주심으로써 율법학자의 질문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시는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누가 내 이웃이냐는 그 질문에 대해서 한단계 더 높은 대답을 해주시는 겁니다.

저는 이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한 사람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일반적인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커리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는데,
나는 재정적 안정이 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나는 다른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정에 목말라 살아 왔는데,
나는 그냥 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과 만나고 나니 내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살고 계십니까?
계속 내 필요, 내 꿈, 내 성취, 내가 받은 찬사와 인정에 목매어 사시고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아무리 파고들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질문들은 점점 여러분을 갉아먹어 갈겁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열어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해답에 눈이 열리기 전 까지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초청하십시오. 그분과 대화해보십시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귀를 여십시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제가 이 말씀을 이렇게 간절하게 드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제 자신에게 여러분이 간절하게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곳 Bay area에서 살면서 제 욕심이라는 족쇠 때문에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옆에서 누가 잘되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시기가 불꽃처럼 일어납니다.
제 탐욕이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매일 독주를 마시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중 누가, 그 진리가 자유케하는 그 길을 사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제가 조금 더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정말 desperate하게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요,
그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시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그 깨어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십가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감수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그 고통 다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그분이, 지금 왜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왜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기만 하면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겁니다.

좋은 영화

이번엔 유난히 stress를 많이 받는 출장이었기 때문에 완전 긴장 바짝하고서 다녀왔는데…

그래서 독일에 다녀오면서 왕복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딱 한편만 볼 수 있었다.
나머지 시간엔 자거나 일하느라…

영화를 많이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뭘 볼까 조금 뒤적이다가 새로 나온 알라딘 영화를 보았다.
인터넷에서 이 알라딘 영화에대해 좀 혹평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살짝 나서 망설였는데 그냥 딴거 볼것도 마땅치 않고 해서 보게 되었다.

내 평가는, 완전 좋았다!

우선,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라는 좀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update해서 만들어놓은게 좋았다.
자스민 공주는 passive하게 사랑을 기다리는 진부한 공주님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여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능동적인 사람으로 그려졌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알라딘에 대한 인상보다 자스민 공주에 대한 인상이 더 깊게 남았다.
특히 Speechless 라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는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자스민 공주의 표정연기가 아주 좋았다.

윌 스미스도 내가 보기엔 지니를 새롭게 해석해내는데 성공한것 같아 보였다.
오히려 예전의 지니보다 윌 스미스의 지니가 내겐 더 좋아 보였다.
지니가 알라딘의 종속된 캐릭터가 아니라 알라딘과 동등한 캐릭터로 그려지는게 좋았다.그러고보니 상대적으로 알라딘의 비중은 그래서 영화 전체적으로 살짝 더 줄어들게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자파와같은 악당의 내면묘사등이 더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아이들까지 다 보는 영화로서는 좀 너무 복잡해질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알라딘과 자스민의 노래였다.
Speechless같은 곡은 뭔가 좀 더 힘있게 부르는 사람이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너무 여리여리한걸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일수도…
어떤 사람들은 자스민공주를 맡은 나오미 스캇이 중동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불평을 하던데, 내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나오미 스캇의 연기는 좋았고, 어차피 알라딘의 배경이 허구의 나라이니까.

민우에게도 한번 보라고 권해봐야겠다. ^^

아, 음식 안 맞아서…

처음 미국에 왔을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음식을 먹지 않고도 잘 지냈었다.

처음엔 그저 계속해서 학교 식당에서만 먹었고,
영어도 잘 못했으니, 뭔가 복잡하게 customize하지 않는 것만 먹느라 맨날 똑같은 것만 먹길 반복했었다.

그때는 내가 20대였다.

그런데,
아… 독일에서 한주 이상을 보내는건 이제 정말 힘들다. -.-;
이 사람들은 왜 음식을 이렇게 해서 먹는걸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만한 것들을 많이 먹는다.
특히 큰 도시의 음식점에서 먹는게 아니라, 회사식당 같은데서 먹는 음식은 정말 퀄리티가 장난 아니게 허술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계속 먹는게 지겨워진다.

독일 같은 곳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본 출장도 조금 오래 하면,
뭔가 좀 매콤한게 막 먹고싶어 진다.

방문하는 회사에서 나름대로 식사 대접을 해 주는데,
그거 안먹기 깨작거리기도 미안하고…
덕분에 맛 없는거 잔뜩 먹고 살 많이 쪄서 돌아가게 된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