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함

편협함, 독단성은 늘 공격을 받는다.
폭 넓게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대한 기독교 변증의 대응은 대충 이렇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다양한 관점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독단적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원주의도 여전히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이고, 기독교도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이라는 면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것을 위해서 기독교 변증가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예화를 역으로 이용한다.

대개 장님 코끼리 만지는 다원주의자들이 다원주의적 관점을 변호할때 사용하는 그림이다.
어떤 장님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 있고, 어떤 장님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 있고, 어떤 장님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있다.
이 장님들이 나중에 모두 모여서 자신이 관찰한 코끼리에 대해서 기술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설명은 다양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긴 호수와 같다고 표현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기둥과 같다고 표현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코끼리를 너풀거리는 양탄자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지 못한채 코끼리를 관찰한 사람들중 누구도 코끼리 전체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른 코끼리를 기술하고 있지만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예화를 들때, 코끼리의 전체 그림을 모두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예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예화를 들면서 다원주의를 변호하는 사람은, 누구도 전체를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독점적인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그 독점적 진리를 소유한채 그 그림을 그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한 의견이 분명히 다른 의견보다 더 설득력도 있고, 월등히 논리적이기 한데도…
아무도 독점적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신화에 빠져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독단적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상황을 만난다.

나는,
일반적으로 독단적이고 편협한 자세는 파괴적일 뿐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편협함을 거부한다는 미명하에 논리적인 대화를 거부한채 억지주장을 고수하는 일들도 분명히 가능하다고 본다.

포용과 다양성이라는 무기로 논리와 진정성을 눌러버리는 잘못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