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겨봐~

코메디언에게 갑자기, 너 한번 웃겨봐 라고 하는게 제일 짜증난다고 한다.
가수에게 갑자기 노래한번 불러봐라고 하면? 음… 그건 좀 덜 짜증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좀 무례한 것일수는 있겠다.
목사님에게 갑자기 설교해봐~ 라고 하면… 음… 그건 목사님에 따라 다를지도?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때 입영훈련, 2학년때 전방입소 훈련을 했던 마지막 세대이다.
2학년 전방입소때에는 정말 전방에 있는 부대에 가서 한주동안 지내게 되는데,
어느날 밤에 작은 콩크리트로 만들어진 초소 비슷한 곳에서 보초를 서는데, 내가 어떤 학교 학생이라는걸 알던 그 사람은 내게 갑자기 내 IQ가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얼마라고 대답을 했고,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책 보면 보는대로 다 외워지고 그러냐고…. 숫자 100개 불러주면 그거 다 외울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음… 그런거 못한다고 하니 그 사람이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만일,
다소 무례한 천사 한분이 내게 와서,
“오승아 너 이거 한번 해봐” 라고 한다면…
내게 그렇게 요구할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보라던가,
노래를 불러보라던가,
무거운 것을 들어보라던가…

정말… 정말….
‘너 깊게 사랑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줘봐” 라고 이야기할만한 그런 사람이 되면 참 좋지 않을까.

AI?

정말 AI 때문에 다들 난리다.
요즘 start up들도 AI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funding 자체가 잘 안된다고 하기도 하고,
웬만한 회사나 회사 내의 웬만한 팀들도 다 AI 비스무레한것을 끼워서 자기들이 그런걸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AI가 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결국 Chat GPT때문에 지금의 AI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실제로 AI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좋은 모델이 아직 없다.
    Chat GPT 혹은 Google Gemini 써보면, ‘cool’하긴 한데, 그래서?
    이런 회사들이 이 서비스들을 유로로 내어 놓으면… 그게 정말 충분히 큰 사업기회가 되는 걸까?
  2. AI가 너무 돈이 많이 든다. 실제로 사람들이 아주 편하고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수준의 AI가 되려면 적어도 현재로서는 너무 많은 computing power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매우 고 성능의 반도체, 대용량의 데이터 센터, 엄청난 양의 전기 등등… 너무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돈을 지금 많이 들여서 꽤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럴 수 있을지…
  3. Data는 충분한가?
    나는 잘 모르지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벌써 Data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powerful한 AI를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Data가 학습되어야하는데, 지금 학습 가능한 Data만으로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AI가 만들어낸 Data로 다시 AI를 학습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내가 박사과정을 마칠때 쯤,
소위 nanotechnology라는게 엄청 hot 했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resume에 어떻게든 nanotechnology라는 단어를 억지로 넣어서 자신을 어필하기도 했었다. (나도 그랬고)

nanotechnology라는게 정말 그 후로 필요없게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닌데,
마치 온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nanotechnology의 새로운 기술들 (그래핀 같은)은 지금은 그냥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 조금씩 쓰는 물질정도가 되었고,
소위 nanotechnology의 메인스트림은 조금 더 큰 사업분야, 가령 반도체 같은 쪽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가기도 했다.

나는 어쩌면 AI도 그렇게 되어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중이다.

완전 비 전문가의 생각.

YOLO

YOLO는 You Only Live Once 의 약자로, 인생 한번만 사는데 잘 즐기면서 살자는 구호다.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인

내 딸을 포함해서, 20대, 30대, 그리고 40대를 만다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 젊은 시절 다시 오지 못하는데 이때 즐길 수 있는것을 즐기면서 살자는.

그런데,
삶은 단절되어 있는 매 순간, time slice를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연속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 time continuum을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젊은 시절을 time slice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나이가 들어서 time contiuum을 살지못한 안타까움이 크게되지 않을까. 젊은 시절에 뿌려야만하는 씨앗이 제대로 뿌려져야, 나이가 들어서 그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건 미래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면서 준비하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진정한 YOLO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두어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가령,
젊은 시절부터 더 성숙하고 너그럽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되기위한 씨앗을 계속 뿌려온 사람만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젊은 시절에 즐기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놓고 살아간다면, 나이가 들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뿐.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5)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13의 내용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쩌면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그냥 그야말로 정치권력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본문이 읽혀진다.

Tom Wright이 정치에 대해 자주 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막상 누군가가 선출되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Tom Wright의 이 말은,
결국 교회가 하는 중요한 역할은, 어떤 정치 집단의 agenda를 분별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정치권력에 꼿꼿하게 맞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옳다.

나는 그렇게 된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절대반지를 추구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중 누구와 한편을 먹어야 하나를 고민하는 기독교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4)

자크엘룰에 따르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trivialize해버리면서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를 다 뒤집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기독교가 돈, 정치 ,종교, 도덕, 문화에의해 뒤집혀져 버렸다.

나는 깊게 공감하고 동의한다.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돈에의해 타락하는 모습을 비판하곤 한다.
현재 교회에 있는 배금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교회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설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을 용인하고,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특정한 정치세력의 agenda를 교회의 agenda로 받아들여 버린다.

Tim Keller는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1980-90년대 미국의 mainline denomination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liberal’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mainline church = 민주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급속이 일어나고 있는 evangelical denomination의 몰락은 그쪽 교회들이 ‘conservative’의 agenda를 교회 안으로 수용해서, evangelical church = 공화당 지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버린데 그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권력을 뒤집는 것이니, 권력에 순응하거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3)

돈은 개인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모방(mimic)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살아가면서 돈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돈을 허락하셔서 내 필요를 충족시키신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돈이 많으면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기 매우 쉽다.
그러니,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그런 의미에서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합당하다.

그런데, 정치권력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펼쳐내시는 선한 통치,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로인한 질서와 안정.
정치는, 특히 좋은 정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세상에 펼쳐내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 정치 권력을 확보하면, 하나님 없이도 선한 통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매우 쉽다.
그러니 정치 권력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 권력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돈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이해들이 있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돈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면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찬 가지로, 정치 권력, 정치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이해들이 있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정치권력과 정치의 위험에 대해 경계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2)

The Lord of the Rings (반지의 제왕)에 보면 ‘The Ring’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잘 보여준다.
꽤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들도, 그 반지만 보면 갑자기 딴 사람이 되어 그 반지를 갖고자 집착하게되고,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절대반지’는 The Lord of the Rings에서는 결국 ‘권력’을 상징한다.
그 권력을 막상 사람들이 보게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이게 소설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정치에서 이런 것들을 늘 보곤 한다.
그건 독재국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기집권을 하는 지도자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과 정당들에서도 그런 모습은 잘 보인다.

자크 엘룰, 리차드 포스터는 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돈은 그 자체가 가지는 ‘영적 힘’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가치중립적이고 그것을 잘 쓰기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고,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그 돈에의해 (악한) 영향을 받게된다고 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고, 정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낸다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naive) 생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1)

에베소서 6:12에 나오는 Principalities and Powers (한국어로는 정사와 권세 혹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대개는 이걸 ‘영적인’ 힘으로 해석을 많이 하는 것 같다.
google search에 요즘 AI overview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그곳에서는
“In the Bible, principalities and powers are invisible angelic forces that can be good or bad, and that rule and influence nations” 라고 정리하고 있다.

나도 그런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점점 그 정사와 권세가 어쩌면 조금 더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의미하는 쪽으로 더 무게를 옮겨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진짜 정치권력(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게 에베소서의 context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지는 일은 사실 꽤 많은 공부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직접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고, 그러므로 그 서신의 저작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꽤 넓은 해석의 스펙트럼이 있으니.

여기서는 에베소서 context에서의 뜻을 더 깊게 찾기보다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로 그 뜻을 생각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