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어

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다고 이야기하는건 무슨 조폭영화에서 나올만한 말인 것 같다.
너, 나 잘 못 건드렸어…

뭐 그럴수도 있겠는데…

살다보면 내가 꼭 다루어야만하는 어떤 문제를 만나기도 한다. 일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이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게되는 이슈를 만나기도 하고.
그럴때는 정말 꼭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때로는 두려울 수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고,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괜히 다른 것이 문제라고 여기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해결하려고 들때도 있다.
아니면 지금은 그것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최면을 하면서 넘어가고 싶어할수도 있다.

그러나
싸워야하는 대상이 있다면 맞서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쉽나. 그게 안되니 그 상황에서 panic하고, 날카로와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주저 앉아서 멍때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내 기도가 이랬다.
하나님 내가 싸워야하는 싸움을 잘 싸우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요즘은 내 기도는 이렇다.
하나님 내가 싸우지 못할것 같은 싸움을 만났을때,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정말 큰 문제가, 마치 등에 큰 용 문신을 한 ‘형님’과 같은 모습으로 떡 하니 지켜 서 있을때,
잘 싸워야지 하고 달려들기 보다는 그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거지.

나는 정말 이런 이야기를 지금의 20대, 30대에게 해주고 싶다.
아니, 내가 잘 해줄수 없더라도 그렇게 누군가가 좀 가서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KOSTA에서의 은혜를 갈망한다.

협상

요즘 회사에서 하는 일의 거의 70~80 % 는 협상이다.
여러 회사들과 여러 형태의 합의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합의서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문구들을 가지고 양쪽의 변호사들이 잔뜩 redline과 edit을 넣어서 서로에게 보낸다.
어떤 것은 수천만불짜리의 합의서도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수천만개의 제품을 만들것과 관련된 합의서도 있다.
어제도 이곳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저녁 늦게까지 아시아의 어떤 회사와 conference call을 하면서 그 협상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 회사쪽에서 유난히 특허와 관련된 어떤 문구를 지나치게 고집하는거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실리콘밸리의 어떤 회사와 예전에 비슷한 형태의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그 회사가 자신의 기술을 쪽쪽 다 뽑아가서 자기것으로 삼아버리더니 결국 그 기술을 자신의 경쟁회사에 주더란다.
그런 일들을 몇번 겪고 나서는 자기 회사와 기술을 지키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이렇게 하는 거라고…

그런 짓을 한것으로 알려진 그 실리콘밸리의 회사는 그런 갑질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
그러나 그 회사가 워낙 수퍼 갑이기 때문에 부품 공급업체들을 그렇게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불평등 계약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게 다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이 결국 되더란다.

아… 그래서 나는 이 협상을 하는데 죽을 맛이다.
우리회사쪽 변호사와 저쪽 회사 변호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하고 있다.
그 수퍼갑 회사가 퍼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진짜 그것 때문에 협상이 많이 어렵다.

어떤이의 탐욕은, 그 탐욕의 직접적 피해자 뿐 아니라, 간접적 피해자들도 만든다.

나의 KOSTA 이야기 (2008년 글)

1.
내가 KOSTA 라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91년.
당시 한국의 대덕 연구단지에서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덕 연구단지의 특성상,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로 부터 KOSTA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송인규, 서재석, 방선기 같은 분들이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그리스도인과 학업” 이라는 잡지도 참 흥미롭게 보았다.

92년엔가…
그 당시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에 KOSTA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해야 그 기사를 몇부 copy해서 몇사람들에는 나누어주기도 했고… 나 자신도 잘 간직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그 KOSTA를 섬기게 될 줄이야…

2.
95년 8월20일에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았다.

나는 스스로 ‘학생사역자’라고 자처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참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녔던, KOSTA 초기 시작에 연관이 있으셨던 어떤 유학생 출신 선배님이 보스턴에 가면 자신이 섬기던 성경공부인 Gate Bible Study 라는데를 한번 가보고 섬겨봐라, KOSTA에도 가면 좋겠다 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나는 KOSTA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어쩌어찌하다가 Gate Bible Study도 그 당시에 바로 join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첫 일년, 많은 감사한일들이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참 고갈되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자꾸 내가 진이 빠지는 것과 같은 교회 청년부 섬김, 나의 얄팍한 신앙의 깊이 등등의 이슈가 내게 있었다. 그리고 참 영적으로 외로웠다. 동역자를 잘 찾지 못한채 많이 지쳤다.

그러던중 96년 여름에 처음 참석한 KOSTA 집회는 내게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96년 집회에 참석하기 전, 당시 내가 많은 신앙의 도움을 주던, 내 믿음의 형이자 동역자인 팽동국 형과 함께 미리 집회를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제를 미리 묵상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도 나누고 그랬다.

일주일간의 집회 내내 거의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울었다.
나의 부족함이 답답해서 울고, 외로움이 서러워서 울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울고, 여전히 나와 이 시대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격해서 울고, 이렇게 많은 동역자들이 있구나 하는 사실에 흥분해서 울었다. 아예 전체집회 장소에는 큰 세수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이것이 내가 KOSTA를 처음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3.
96년 집회 이후,
내 안에는 정말 ‘불덩어리’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를 하면서… 한시간씩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회복하시도록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였고… 정말 지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하고 말씀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참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모임에 생명력이 급속히 생겨났다.
불과 15명 남짓 되는 모임이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70명 수준의 모임으로 커졌고, 사람들이 모임에 참여하는 표정이 달라졌다.

아침에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하러 모이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새벽기도 밴 운전을 했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는…
팽동국 교수,
박성호 목사,
이용규 선교사
등등이 있었다.

모임을 섬기면서, 나의 부족함에 답답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간장종지같이 부족한 내 믿음에… 나이아가라 폭포같이 쏟아지는 은혜에 감당할 수 없어 정말 많이 울었다.

97년에는 몇몇사람들이 바람을 잡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만 60명 정도의 사람이 함께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후, 섬기던 청년부는 더 생기를 얻었다.

4.
함께 같은 교회에 다니던 분중,
지금은 인하대 교수로 가신 송순욱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DC의 지구촌교회 출신이었고, 당시 워싱턴 지구촌교회는, KOSTA 운동을 주관해서 섬기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였다.

이분과 연결이 되어서 “Boston 팀”에서 KOSTA VOICE를 맡아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KOSTA newsletter인 KOSTA VOICE를 만드는 일에 1997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집회 중에 발간되는 KOSTA VOICE와, 집회 전후로 발간되던 KOSTA VOICE update 라는 두종류의 newsltter가 있었다.

99년이었던가… 98년 이었던가에는…
그 KOSTA VOICE update 라는 것을 web에서 띄워서 web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고 정하고.. html로 딱 한페이지를 만들어서 web에 띄웠었다. 이것이 지금 eKOSTA (http://www.ekosta.org) 의 시작이다.

98년에는 KOSTA에서 처음으로 ‘지역 리더쉽 훈련 program’이라는 것을 시도한다고 했다.
Boston이 첫 대상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 일에 연관이 되었다. (이것이 제 1회 gpKOSTA 이다.)
내가 집에서 가지고 있던 ink-jet printer로, 그당시 전 참석자의 교재를 print하고… 하나씩 바인더로 만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Boston에서 황지성, 강동인, 지금은 한국에 가신 이동헌… 이런 분들과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98년에는 그 당시 총무간사로 섬기던 황지성 간사님이 내게 전체집회에서 ‘코스탄의 현장’ 간증을 해 줄것을 요청했었다. 나는 깊이 고민하였는데… 지도교수가 허락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해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때 딱 한번 빠졌다. ^^)
너무 죄송해서… 그때 황간사님에게 직접 이야기했는지… 내가 속으로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이 한몸 부서지도록 열심히 대신 노가다라도 할께요…” 그랬다… (뭐 사실 그 ‘결심’은 현실화 되었고… ㅋㅋ)

나의 KOSTA 섬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5.
KOSTA를 섬기면서 나는 정말 말할 수 없는 blessing을 경험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편승해서… 거의 최전선에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고 있는 사람들, 특히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통찰과 인격, 신앙과 꿈들을 매울 수 있었다.

함께 잠을 자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때로는 콩크리트 바닥에서 쪽잠을 자면서 그렇게 섬기는 내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전우들, 동료와 후배 간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만한 blessing을 또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되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renew하고, 생명의 빛을 얻고, 삶의 방향을 정비하는 일들이 있었다. (사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내가 평생 KOSTA에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나는 KOSTA에 큰 빚을 졌다. 내가 몇년씩, 몇십년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이 KOSTA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이제 내일이면 또 KOSTA 집회를 섬기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지난 10년여간 KOSTA를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그 은혜를… 내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KOSTA를 섬기고 집회를 섬기지만… 매년 내게 그 빚은 늘어만 간다.

이제는, 내가 그 빚을 갚을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예쁘게 보아주셔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것을 뻔뻔스럽게 누리기로 했다.

‘나’ 중심의 질문, ‘너’ 중심의 질문

사랑이 많은 부모라면,
자신이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에게 충분히 잘 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때로는 그 안타까움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자책한다던가, 아니면 왜곡된 자기 보호 기재로 인해 비뚤어진 감정표출을 하게 된다던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이 아예 없다면 그것 역시 대단히 이상한 모습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사랑의 모습에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묻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나’가 있는 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너’가 있기 때문이다.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중심의 질문을 하는 것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부모로서 살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역자로서,
선생이 되어 가르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public servant로서,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 중심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너’ 중심의 질문을 많이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느냐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없는 내 모습에 많이 안타까워하며 아파할 것이다.
능력이 제한된 인간으로서 그런 안타까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리더가 정말 진실된 리더인가를 평가할때,
그 사람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가 하는 것이 참 좋은 판단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Sloth

Dorothy Sayers는 The other six deadly sin 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The sixth deadly sin is named by the church acedia or sloth. In the world it calls itself tolerance; but in hell it is called despair. It is the accomplice of the other sins and their worst punishment. It is the sin that believes in nothing, cares for nothing, seeks to know nothing, interferes with nothing, enjoys nothing, loves nothing, hates nothing, finds purpose in nothing, lives for nothing, and remains alive only because there is nothing it would die for. We have known it far too well for many years. The only thing perhaps that we have not known about it is that it is a mortal sin…. But theseareall disguisesfor theempty heart and theempty
brain and theempty soul of Acedia

흔히 ‘게으름’이라고 번역하는 Sloth는 사실 의미없이 열정없이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뭔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대해 그저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등은 다 Sloth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Dorothy Sayers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It is one of the favorite tricks of this sin to dissemble itself under cover of whiffling activity of body. We think that if we are busily rushing about and doing things, we cannot be suffering from sloth.”

바쁘게 사는 것은 때로 sloth의 죄를 짓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부지런히 살면서 의미 없이 사는 것은 sloth 인 것이다.

정말 가만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가지 사이에 위치한다.

의미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의미없이 바쁘게 살거나.

정말 은혜가 필요하다.

송철호 이야기

이번에 울산 시장으로 당선된 송철호 변호사 이야기가 뉴스와 여러 인터뷰등에 떴다.
아는 사람을 알지만, 송철호 변호사는 이번에 당선되기 전에 자그마치 8번이나 여러 선거에서 낙선했다.

김어준과의 인터뷰에서 송 변호사는 몇번 떨어지고 나서는 아예 주소도 옮겨서 출마하지 않으려 하기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그래도 지역주의에 누군가는 도전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강변하는 바람에 계속 출마하게 되었다고.

1992년 40대 초부터 이제 70이 다 되어서까지 계속 그렇게 안되는 싸움을 도전을 했으니…
송철호 변호사는 결국 자신의 인생 전체를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과 싸워온 셈이다.
이번에야 그래도 될만한 싸움이었지만, 지난번 선거까지만 해도, 울산에서 민주당계열로 도전하는 것 자체가 패배할것이 빤한 싸움이었다.
그래도 싸워야할 가치 때문에, 그리고 그 가치를 가지고 함께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그 안되는 싸움을 계속 싸워왔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안되는 싸움을 계속 싸우라고 격려하는 동료가 없다고 느낄때는 참 외롭고 힘들다.

이런 정치인들의 동료의식과 헌신을, 왜 더 이상 기독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걸까.

은혜의 복음이 인간에게 담겨질 수 있을까

은혜의 복음은 대단히 급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또한 혁명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은혜의 복음이 어떤 사람의 인격에 담겨졌을때, 그 인격이 그 은혜의 복음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여 ‘터져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그 사람의 본성 자체를 흔들고 바꾸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그 사람 감성의 혼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겉보기에 그 사람 전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침체와 눈물 속에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아픔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마음의 무너짐을 사모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헌신하고, 도전하지 않는 복음은… 적어도 내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삶속에 담겨져 있던 그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복음은 아니다.

노예의 쇠사슬 자랑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에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하여 정복당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By Amiri Baraka, formerly known as Leroi Jones

은혜가 편해진다면

은혜가 편해진다면 그것은 은혜로서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사이에서,
은혜를 이야기하면 고루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있다.
기독교의 클리셰를 그저 이야기하는게 아니냐는 거다.

그런 속에서 은혜는 그 효과를 잃어버린 것이다.
은혜를 결코 편해질 수 없다.

마치 단물이 빠진 껌이나,
오래되어 향을 잃어버린 향수,
더 이상 켜지지 않는 오래된 TV와 같이…
현대에 은혜는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뭔가 좀 신박한 방법으로 re-brand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냥 은혜로는 relavancy가 없으므로 그 relavancy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가 relavancy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람이 은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그걸 잔뜩 package를 하고 사탕발림을 해보고자 하는 모습이 슬프다.

Too many messages…

나는 내 전화번호를 거의 절대로 회사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주기 시작하면 전화와 voice message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하는게 거의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 내 전화를 알게된 사람들이 부지런히 전화를 하고 message를 남기는데… 대부분 그 전화들을 무시하곤 한다.

그래도 회사 전화, 회사 전화로 오는 text message, 내 개인 전화, 내 개인 전화로 오는 text message들이 벅차게 느껴질때도 있다.

게다가 카카오톡도 있고, 나는 facebook message도 있다.
카카오톡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만 연락하고있고,
facebook message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씹는 때가 많다. ^^ (아니면 며칠 후에 답을 하거나.)
그도 그럴 것이 나는 facebook app을 전화에 넣어놓고 살지 않기 때문에 facebook message를 바로바로 체크하지 못한다.

또, 회사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message도 있다. (회사에서는 google hangouts를 쓴다.) 이게 또 장난아니게 계속 터지고.
그리고 아내와 민우와는 Allo를 사용한다. 이 둘은 내가 세계 어디에 있든지 가장 급하게 연락할 수 있는 hotline을 가진 셈이다. ^^

아 물론 내게 가장 많은 message가 들어오는 것은 email이다.
뭐 email은 그래도 좀 manageable 하다. 왜냐하면 급한것이 아니면 읽지 않은 상태로 표시해 놓았다가 나중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해볼 수 있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manage 하면서 사는지 잘 모르겠다.

내부분 그래서 이렇게 분류를 해놓고 산다.

– Allo : 아내와 민우
– Duo : 가족
– 카카오톡 : 잘 아는 사람들. 그렇지 않는 경우는 notificatoin을 다 꺼놓고 지냄
– 회사 전화 : 회사 내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줌.
– 개인 전화 :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줌
– 회사 이메일 :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쭈악~ 뿌림
– 개인 이메일 : 여기저기 뿌리는 버전의 이메일(자주 체크 안함)과, 조금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는 이메일(들어오는 족족 push message가 뜸)이 따로 있음.
– Facebook messenger : 거의 사용 안함. 이쪽으로 연락오는 사람들은 어차피 나와 아주 가깝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런데 이것도 늘 나는 manage 하는게 벅차서 허덕허덕 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결국 message들을 제때 대답을 못하고 놓쳐버리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내가 꼭 얘기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끈질기게 몇번씩 전화를 다시 하지만,
내가 꼭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오히려 배려해서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거다. -.-;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다 manage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accesible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사는게 참 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