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 Spending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대충 30마일쯤 된다. 그런데 조금 덜 막히는 길로 가면 40마일이다.
어쨌든 회사를 다녀오면 70마일 (112 km) 쯤 운전을 하게 된다.
하루 출퇴근만으로 매일 70마일을 쓰는 거다.
나는 화수목 3일을 office에 가지만 일이 생기면 월요일이나 금요일에도 office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기타 장보러 가는 일, 주말에 교회 가는 일 등등 하면 한주에 300~350마일 정도 차를 쓰는게 일반적이다.
내차의 평균 연비가 30 mile/gallon이 되지는 않지만 대충 그정도 잡고,
그러면 한주에 10갤론정도의 기름을 쓰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대충 1갤론에 5불 가까이 하니까, 한주에 내차 연료로만 50불정도를 쓰는거다.
한달이면 기름 값으로만 200~250불 정도가 나간다.

한가지 예를 들었지만 살면서 돈 쓰는게 다 그렇다.
내가 사는 콘도에서는 HOA만 600불을 넘게 낸다. (한국으로 말하면 관리비 쯤 된다고 하겠다.)

대개 주일날 예배 마치고 우리 세 가족이 샌드위치나 멕시칸 타코 같은 것을 사먹는것 이외에 외식을 거의 잘 하지 않는데도 식비로 어마어마하게 돈이 들어간다. 최근 몇년 인플레이션이 정말 미친 수준이어서 먹는데 돈을 많이 쓰게 된다.
물론 싼 음식이 아닌, 소위 full service restaurant를 가면 한 사람당 20불 아래로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고, 최소 30불 정도는 내야 한다.

뭐 사는게 그러니…
정말 엄청나게 돈을 많이 쓰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쓰는 세상이니, 그렇게 돈을 벌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더더욱 돈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High earning – High spending의 사회에서, 초연하게 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Monday After Easter

부활절 이후의 교회력은 부활절 제 2주, 부활절 제3주 이렇게 계속된다.
부활절 후 2주, 3주가 아니고 부활절 2주, 3주와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

나는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부활의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부활절 이후,
나는 새해를 시작하는 것 같이 월요일을 열고 있다.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다소 흩어졌던 리듬을 다시 잘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번 사순절-고난주간-부활절을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고,
내가 많이 무너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나는 정말 부활의 주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고난주간: 사랑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5:12-17)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1서 4:10)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물이 되게 하신 것.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받고 희생당하지 않으셨다면,
나 같이 눈이 어둡고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36년전.
나는 성경을 읽으며 그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이 세상을, 그리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랑에 압도되어 울고 또 울었다.

그 사랑이 그렇게 내게 다가온 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이었던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성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 어떤 순간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게 보였다.
다 이해할수는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깨달아졌다.

나는,
내가 나중에 우리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날까지,
계속 그 사랑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게 될것 같다.
그리고 그 깨달아지지 않는 그 사랑에 더 매료되어가길 바란다.

그 침울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의 징표다.
오늘 Good Friday.
이해되지 않는 그 사랑이 다시 내게 조금 더 보여지는 하루가 되길.

고난주간: 은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는데,
그분께서 내게 오셨다.

우리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온 세상의 불공평과 고통의 호소들을 잠재울 수 있는 solution은 그 모든 것을 다 능가해버리는 은혜가 그 모든 것에 다 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은혜를 그저 넙죽 감사하다고 받을 수 없는 이유다.

Are you serious?
라고 묻고 묻고 또 물은 후에도 도저히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대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루어내지 않은, 내 업적이 아닌… 은혜.
십자가는 은혜다.

고난주간: 자비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오래 참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데 침묵하셨다.
그분의 고통 속에서 자비의 얼굴을 숨기셨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님을 믿는 나는,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고통속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며 살고 있다.
때로 그 자비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자비의 얼굴을 숨기시는 듯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던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궁극적 자비가 온 세상에 펼쳐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 일차원적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사라진 것 같을 때에도,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곳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십자가는 정말 역설 투성이다!

고난주간: 믿음

생명의 주인께서,
온 세상의 소망이 되신 분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걸까.

교리적으로,
그것이 내 죄를 사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와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기 이전에…

아니,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어쩌면,
지금 당장 부활의 영광을 꿈꾸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십자가가의 고난과 부활이 어쨌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살리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성경에서 믿음이란 매우 관계적 단어이다.
어떤 사상에 대한 지적동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신뢰, 그 대상에 충성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똑같은 단어를 하나님에 쓰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것이 ‘신실함’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신실함과 우리의 믿음은 같은 관계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물론 부활의 영광을 믿지만, 승리의 부활을 믿지만,
심지어는 그것이 없더라도 그 고난과 아픔의 십자가 속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것…
그 속에서도 그분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그 관계에 계속 신실하게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나.

그리고 십자가에서 들어난 믿음의 본질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집스럽게 신실하신가 하는 것.

이 고난주간,
영광의 부활은 아직 멀리 있는 듯 한 그 어두움 속에서의 믿음을 생각해본다.

고난주간: 희망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가장 처절한 절망으로 인도한다.
영광의 왕께서 십가자에 처형당하시다니.

그분이야말로 민초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나마 그분이 이 망가진 삶을 고쳐주실 리더가 되실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영광의 승리가 이분을 통해서 이루지고,
내 꼬여있는 삶도 좀 풀려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는 희망.

그런데, 그 희망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러니…
고난주간에는 세상의 모든 망가진 것들이,
삶의 모든 어려움들이,
억울함과 고통과 아픔이,
내 뜻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 부조리에… 좀 머물러야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어그러짐과 깨어짐과 무너짐 이 해결되는 것이 희망이 아니고,
자체를 가지고 십가가에 우리 주님께서 가셨다는 것이 희망인 것.

고난주간과 십가가의 희망은 그래서 참 어이없는(?) 희망이라는 것

풍자

내가 집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TV를 마지막으로 본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거의 한 20년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내가 그래도 요즘 youtube를 통해서 꽤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그건 미국의 소위 ‘talk show’들이다.
밤에 코미디언들이 진행하는 것들인데, 내가 좋아하는건 “Jimmy Kimmel Live!”와 “The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 이다.
그 외에도 “Tonight Show (Jimmy Fallon)”과 “Late Night Show (Seth Meyers)”등도 가끔 본다.

그 프로그램을 다 보는건 아니고, 주로 opening monologue들만 보는 편이다.

아… 이 사람들 참 잘한다.

왜 한국에선 이런 톡톡튀는 풍자, 비판이 잘 되지 않을까?

그러던중 이번 탄핵 사건을 지나면서 보게된 한국의 어떤 프로그램이 있다.

이런 코미디/풍자를 코미디언이 하는것이 아니고 언론쪽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풍자/비판이 이루어진다. 약간의 조롱이라고 할수도 있겠고.

그러던중 내 youtube feed에 뜬 한 코미디 영상 하나.

난 이런 사람들이 좀 잘되면 좋겠다.

무례함

가끔 여러 경로로 내게 연락해오는 사람들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무례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함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례하다고 내가 느끼는 것이다.)

가령, linkedin을 통해서 연락을 하면서
멋진 기회가 있다. 네가 이 자리에 딱 맞는 사람인것 같다. 6개월짜리 계약직이고, 매우 넉넉한 pay가 제공된다. 시간당 25불이지만 너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는 시간당 30불도 고려할 수 있다.
관심있으면 연락해라.

처음에는 이 사람들에게 설명과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도 알아야 하니까.
나의 지금 자리에 비하면 그 자리는 내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아보길 바란다… 뭐 그런 식으로.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90%는 잘 알았다. 뭐 그런 대답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는 그중 어떤 사람들은 내게 얼마 후에 또 비슷한 연락을 해온다.
그러면 나는 너 지난번에 내게 연락했지않느냐, 나는 이런 이런 이유로 관심 없다…고 답을 해준다.
그러면 또 싹 무시하고는… 또 다시 나중에 비슷한 연락을….

그래서 요즘은 당연히 그런 연락에는 대부분 답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그런 무례함을 피하기 위해서 내가 무례해진것일까 하는 것.

그중 어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 채 진지하게 연락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도배급으로 너무 내가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정작 문제는,
내가 정말 관심있을 만한 자리에 대한 문의는 linkdin을 통해서 웬만하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 특히 요즘은 더 그렇다.

경건함 (Piety)

경건함은 참 소중하게 여길만한 자세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보는 모습. 믿음과 삶에 대한 진지함. 신실함.

실제로 그 경건함이 현실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주로,
개인적인 경건한 활동/종교적 활동 (기도, 예배 등)
나쁜 행동이나 생각으로부터 멀리하는 것
다른 이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때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경건함은,
이미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성경공부 하고, 더 열심히 종교활동 하고…

나는 이런것들이 경건함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경건함은 결국 종교적 고집, 자기 중심성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소위 ‘경건하다’고 일컬어 지는,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때로 그냥 고집만 세고 열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그런 것인듯.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차라리 그런 고집을 부릴만한 여유나 힘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건강한 경건함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