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4) – 무척 감성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감성적인 것이었다.
나는 꽤 전형적인 ‘nerd’ 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
매우 ‘나만의 세계’가 좁은 사람이었고, 내 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거의 배척하는, 그리고 감성을 이성에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 그렇고. ^^)

그런데, 내게 큰 변화가 생겼다.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가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왔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마다, 도무지 어쩌할 수 없는 감격에,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무슨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게 아니냐고 주변에서 생각할수도 있었을만큼 (다른 이들 몰래 울었기 때문에,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다.) 몇달 동안은, 밤이고 낮이고 울었던 것 같다.
어떤때, 약간 여유(?)가 생기면, 학교 뒷산 같은 곳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통곡을 하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기도를 하다가 울고, 성경을 보다가 울고, 찬양을 부르다 울었다.
좋아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또 망가진 세상을 보며 울고,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며 울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희생의 피를 흘리시는 것을 생각하며 울고, 그것을 알아차리지못하는 군중 속에 내가 있음을 보고 울었다.

반면, 참 많이 웃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말 많이 웃게 되었다. 사람들을 보며 많이 웃었고, 특별히 같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정말 환하게 많이 웃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감사해서 웃기도 했고, 한끼 식사를 앞에두고 감사해서 크게 웃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에 크게 웃었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이전보다 훨씬 더 밝고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많이 웃고 우는 것은 그러나…
그 “회심의 기간”동안에만 있다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22-23년이 지난 지금도, 내 회심의 경험 이전의 나에 비하면, 참 많이 웃고, 참 많이 운다.
 

회심 (3) – 무척 이성적이었다.

소위 ‘회심체험’하면 이야기하는 갑자기 뽕 맞는 것(?) 같이 감정적으로 확~ 격양이 되더니 갑자기 신비한 체험을 하고, 감정적으로 뜨거워지고… 하는 식을 떠오르기 쉬운데,
내 경험은 그것과는 꽤 많이 달랐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어려서부터 많이 접해왔던 ‘복음’이 어느날 ‘새롭게’ 깨달아지게 되었다.
기존에 그저 파편적인 윤리강령 정도로 생각했던 복음의 여러 내용들이 한꺼번에 쭈루룩~ 맞추어 지면서, 정말 ‘말이 된다’하는 탄성을 터뜨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중에, 꽤 많이 ‘성경공부’를 하는 과정이 있었다.
글쎄,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어느순간 성경말씀이 ‘말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정말 미친듯이(?) 공부를 했었다.
그 당시 기독교서점에 가서, 여러 대학생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교재들을 한 20-30권 한꺼번에 사다가 혼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한달에도 몇권씩 여러가지 신앙/신학 서적들을 읽어나갔다. 하루에 몇시간이고 성경을 읽고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처음 그렇게 읽었던 ‘한영 현대인의 성경’ 책은, 곧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 대단히 격렬한 감정적인 반응이 따라오긴 했으나, 그것은 이성적인 프로세스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만일 이 복음이 진리라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계관과 가치관이 모두 사상누각으로 허물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대단히 깊이 했었다. 그래서 소위 세계관, 신학과 철학, 역사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과 과목’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회심 (2) – 불연속적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본격적인 ‘회심 경험’을 했던 것을 대학교 3-4학년 때로 보지만,(벌써…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군. ^^) 기본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 그리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건성으로나마 나갔던 이력등이 있으므로, 아예 무신론자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것과 같은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
어찌보면 상당히 답답한 모범생이었다. 대학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턱이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었다. 결국 찢어진 부분을 꿰메러 가면서도, 그것 때문에 수업을 빼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꽤 깊이 고민했을만큼, ‘샌님’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드러나는 대단한 일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위 ‘허랑방탕하게’ 살아본적도 없었다. 

소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던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불연속적인 경험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뢰할만한 신’이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고,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세계가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매우 비뚤어진 형태이기는 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고등학교때 세례도 받았었다!

회심 이전에도 모범생이었고, 회심 이후에도 그 모범생의 길로부터 심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내가 회심의 경험을 했던 것이, 어떤 한번의 event라기 보다는, 대학교 3학년-4학년을 지나면서 넓게보면 2년, 짧게보면 몇달 동안의 기간에 걸쳐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이 찌릿한 경험을 했다거나, 입에 거품을 물었다거나(^^), 대단한 신비체험을 한것도 없었다. 그저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 경험을 하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회심경험이, 특별히 종교적인 배경을 거의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회심체험을 하던 그 2년여의 기간은, 도무지 내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아마 앞으로의 글들에서 이런 부분을 더 다루게 되지 않을까…)

대단히 불연속적인 경험을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연속적으로 보일수도 있는 경험이었다고… 그렇게 애매하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회심 (1) – 우리의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가?

지난번 제주에서,
내 “기도멘토”인 동국이형과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머리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동국이형이 “정말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었던걸까?” 라고 자문했던 것이었다.

동국이형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복음을 타협하는 사람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살마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정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직면하는 경험을 하면, 그 사람의 본질부터 달라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많이 부족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한 이후에, 삶이 근본으로부터 달라졌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일까?
혹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제한적으로 그 만남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우리와 같이 완악한 사람을 바꿀 수 있었는데, 왜 훨씬 더 선하고 좋은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우리의 경험이 특별하다는 말인가?

동국이형과 그 이야기를 나눈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도록, 내 머리속에서는 그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그래서,
내 회심 경험을, 앞으로 몇편의 글들을 통해, 나름대로 분석적으로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 내가 신앙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무기가 아니라,
은혜와 사랑, 그리고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정리해보고 싶다.
잘 될른지는…. 글쎄… ^^ 

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내가 처음 복음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처음 예수와 ‘관계’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두가지 중요한 혼란/변화가 내게 있었다.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가 여태껏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든 기초가 다 부정되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세계관의 변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내 세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기둥 자체가 무너져 버렸으니…
그리고 여태껏 내가 기둥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것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니…
정말 기뻤지만, 한편 말로 다 할 수 없는 혼란을 겪었다.
그래서 정말 거의 미친듯이 공부했었다. 성경을 줄쳐가면서 읽고, 각종 신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심지어는 여러가지 성경공부 교재들을 사서 혼자서 답을 달며 참고서 풀듯 공부를 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말씀과 함께 사는 삶이 체득되었던 것 같다.

두번째로,
정말 내가 새로 눈을 떠 알게 된 이것이 ‘진리’라면… 
내 모습 그대로의 ‘나’는 왜곡 투성이었다.
내가 그저 ‘괜찮다’, ‘정상이다’, 심지어는 ‘멋있다’고 여기던 내 모습은,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한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내 어그러진 모습을 고쳐나가는 일에 정신없이 매달렸었다.
잠깐 화가 나서 내 성질을 누르지 못하는 때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위해 나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이런 내 모습을 고쳐주시도록’ 참 많이 기도했다.
일상 생활 중에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내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보며 참 많이 가슴아파했었다.
그러는 중 점차로 성화 과정을 겪어가는 것을 배워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익숙해 지면서…
‘사명’, ‘비전’, ‘감동’, ‘뜨거움’, ‘개혁’… 등등과 같은 개념들이 점차 위의 내용들을 치환해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교회생활을 하면 할 수록 내가 성경을 통해서 만났던 진리의 태양빛보다는… 종교생활이 가져다주는 네온사인에 익숙해져가는 것을 경험했다.
한때는 그것이 성숙의 과정인줄 알기도 했으나…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알게된 것은, 
나는 처음의 순수했던 ‘신앙 생활’을 버리고 ‘종교생활’에 오염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코스타 집회를 통해서…
내게 주어졌던 그 순수한 열매들이 잘 회복되길…

그리고,
코스타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가는’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것이 그저 종교생활로 대체할 수 없는 얼마나 멋진 것인지…
보게되면 좋겠다.

현대 기독교가 제공하는 종교생활로부터 벗어나,
복음이 이야기하는 신앙생활로 회귀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예수를 막 믿게되었던 시절

나는 모태출석 교인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태중에 가지고 계실때부터 교회 출석을 했다.

내가 그 신앙을 내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인것은 대학교 3학년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 신앙을 깊이 곱씹어볼만큼 내가 넉넉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던 시절,
신앙이 없으면서 신앙이 있는 척 했던 시절,
진리에 대하여 목말라 했던 시절,
그리고…
그 진리를 막 발견한 직후 내 생각과 감정과 마음이 급속히 바뀌어 가던 신앙의 초기 단계…

이것들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그래서,
내가 그 당시에는 매우 어렵게 받아들였던 개념이나 깨달음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다.

기회가 되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에 했던 고민들,
또 내가 막 예수를 믿은 직후에 했던 고민들만을 다시 깊이 곱씹어보는 시간을 좀 갖을 수 있으면 한다.

이 블로그에도 간단하게 그것들을 좀 올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