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14) – 맺으며

어찌보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몇번에 나누어서 적어 보았다.
뜬금없이 내 회심의 경험을 적게된 동기는, 처음 글에서 썼던 것 처럼,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과, 내가 겪은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이 세대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대의 교회와 기독교를 내가 담아내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이 특별한 경험을 한 내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까.
왜 내게는 이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신 것일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 경험을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만일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강렬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다른 이들에게 강력한 하나님과의 대면의 경험을 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도울 여지는 과연 있는 걸까.)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뭔가 좀 더 clear해 질 것 이라는 기대를, 20여년 전에 했건만, 여전히 나는 clue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두렵다.

회심 (13) – 내 회심의 특징/한계

1. 나는 회심 경험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경험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신앙이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다.
 
2. 나는 회심 경험이 내 신앙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새로운 경험등을 결국 내 회심경험으로 해석해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나는 매우 보수적이다.

3. 개인적 회심이 매우 중요한 이슈일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어떤 상황이 되었건, 누군가가 ‘결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90% 이상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고인다. 구원 자체가 과정임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회심의 순간이라는 것을 중요하게여기는 이율배반성이 내 신앙 안에 있다.

4. 회심 이후에 경험했던 변화가 나름 매우 큰 것이었다. 따라서, 회심과 변화(성화)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고, 빠른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5. 내 신앙과 신학이, 내 회심 경험이라는 다소 주관적 경험에 근거하는 부분이 많이 때문에, 내 신앙을 객관화시키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Gospel Coalition에서, Don Casron, John Piper, Tim Keller 이 세사람이 대담하는 것을 podcast에 올려놓아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역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대담이었는데…
많이 내가 공감할 수 있었으면서도… 한편 듣고나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것은…. 이 세사람의 어조가 대충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우리는 복음도 알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는데… 우리처럼 그거 아는 사람 구하기 참 힘드네요.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처럼 좀 제대로 믿는 사역자들 어디 없나요.”

그 세분이 이야기한 내용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는 식의 그런 자세는 참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회심 경험이,
나를 그런 편견/교만의 함정으로 인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회심 (12) – 회심의 지속성/현재성

만일, 회심이 한번의 ‘경험’이고,
그 후에는 그로부터 자라가는 과정이라면…

그 회심의 강한 경험을 한것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 책을 읽은 것, 영감있는 강의를 들은 것등과는 어떻게 그 경험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그 강한 과거의 경험을 곱씹어가면서 그것에 내 삶의 근본이 있음을 기억해나가는 여정일까.

만일 회심을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그 과거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강한 결단력과 정신력으로 그 과거의 사건에 걸맞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말 그런가?

회심이후에 내게 생긴 변화는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

우선, 매우 사고/생각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생긴 변화가 아닌가 싶다.
글로 써서 남기기에..좀 머쓱하긴 하지만, 사실 회심의 경험이후에 나는 학과목의 평균 평점도 더 나아졌다.
그야말로 회심 이후에 비로소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심 이전에는 글쓰기 한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회심이후에는 글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훨씬 더 쉬워졌다)

그리고, 의지력이 몹시 강해졌다.
정말 결심하고 결심해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회심 이후에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것이 훨씬 더 쉬워졌다.
이것은, 회심의 경험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통일성을 갖게되어, 그야말로 내면세계의 질서를 갖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에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할수도 있겠다.

내 지,정,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지속될 뿐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는 것을 경험해왔다.

감동적인 영화나 책, 강연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게 있어 회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심 (11) – 회심과 삶

회심과 일상과의 관계, 회심과 삶의 여러 영역과의 관계, 회심과 세계관/가치관과의 관계를 생각해볼때,
다음의 두가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번째 그림은, 회심으로부터 바로 파생되어 연결되는 생각/생활/삶/가치관 등이 있고,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점차적으로 2차, 3차적으로 그것이 발전되어가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고,  그것으로부터 발전되어나가게되는 일종의 씨앗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번째 그림은, 생각/생활/삶/가치관등의 모든 영역이 다 회심과 직접적으로 혹은 1차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고는 모델이다.
이런 경우에는, 회심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 사건일수 밖에 없고, 계속해서 돌아가서 점검해야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의 혼합형이 될 가능성이 많지만, 그 근간이 되는 모델이 첫번째인지 두번째 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매우 명확하게 두번째 그림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삶이나 생각에 내적 통일성 (integrity 혹은 internal consistency)가 없다고 느낄때 마다, 혹은 내 삶이나 생각등이 너무 사변적이 되거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회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과 연관시켜 풀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것이 잘 맞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자신을 ‘출애굽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반복해서 그 출애굽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했던 구약의 전통이나, 예수의 희생과 죽음, 부활을 반복해서 기념하고 기억하는 신약의 전통이…
첫번째의 그림보다는 두번째의 그림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역시,
내 회심의 경험때문에 내가 가지게된 특정한 관점일까,
그렇지 않으면 모든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일까. 

회심 (10) – 회심의 순간?

나는 과연, 언제 회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였을까?

대학교 3학년 언젠가,
마음 속의 공허함을 발견하고, 성경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였을까?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소망을 찾아내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터지고,
통곡을 하듯 몇시간씩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 경험을 하던 그 순간이었을까?

어느순간,
내가 나 스스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처음 그 강렬한 경험 후 10년이 지난 때,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얻어지게된 그 순간이었을까?

태어나서 30년넘게 가지고 있었던 ‘꿈’을 주님께 드리고,
내 삶의 앞길을 주님께 넘겨드리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직도 온전히 회심하지 못한 것일까?

—-

짜장면은 언제부터 짜장면일까?

처음 밀 이삭이 뿌려졌을 때 부터?
그 밀을 수확했을 때 부터?
밀가루로 만들어졌을 때 부터?
중국집에서 그 밀가루를 사들였을때 부터?
면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했을때 부터?
면발을 뽑아내었을때 부터?
면을 익혔을때 부터?
짜장면을 손님이 주문했을때부터?
면과 양념이 섞여졌을때 부터?
그릇에 담겼을 때 부터?
손님의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손님이 짜장면의 맛을 처음 느낄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소화가 되기 시작하는 순간?
소화가 다 되어 배설되는 순간?

글쎄…

회심 (9) – 회심과 헌신

나름대로, 내 회심의 경험은, 내 근본을 흔들어놓은, 아니 뒤집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내가 주체할 수 없을만큼 강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내 회심의 경험이 강렬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 성향/성품이 그래서일까.

나는 그 회심이후에 아주 ‘강한 헌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반드시 건강한 헌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내가 여전히 이 헌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머리속에 염두에두고 신앙생활을 했다.

만일, 내가 경험한 이 회심이 ‘진정한’ 것이라면, 정말 이 복음이 진리라면, 예수의 사랑이 그렇게 큰 것이라면, 도무지 그럭저럭 사는 option이 내게는 불가능 했다.
그래서 정말 좌충우돌하며 ‘강한 헌신’을 추구했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절제된(?) 헌신’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만난 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대충 헌신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진리로 받아들인 이 복음을 진리로 고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자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이 모자라서, 아직 잘 알지 못해서 건강한/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도 있다.
혹은 헌신의 좋은 지침을 얻지 못해 좌충우돌 건강하지 못한 헌신의 모습을 보일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더 깊이 헌신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의 죄성에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회심의 경험에 따르면, 배교와 헌신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내 경험이 특별한 것이었던 걸까?
내가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에, 일반적인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회심 (8) – 회심의 오염, 비종교적 회심

처음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을때, 마치 나는 내 마음 속에 커다란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느꼈다.
환한, 어둠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런 빛.

그런데, 점차 ‘교회생활’을 해 가면서, 그 빛이 일부 가리워지기도 하고, 어두어지기도 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른바, 회심의 오염이다.

물론, 건강한 공동체 생활이 어린 그리스도인이었던 제대로 서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오염은, 공동체생활이 가져다주는 오염이 아니라, 어그러진 종교체제가 내 안의 빛을 자꾸만 꺼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 생활, 혹은 종교 생활이 내게 익숙해 지면서, 나는 그런 종교생활 혹은 교회생활에 의해 오염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내 안의 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자주, 내 자신을 종교생활로부터 끄집어 내어, 그 빛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면, 무슨 대단히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종교생활이 열정적인 내 회심의 경험을 희석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 회심 경험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종교인이었다. 세례를 받은.
내 회심 경험은 나를 종교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 후에도 내가 종교인으로 안착하고자하는 유혹을 느낄때마다 내 회심의 경험 자체가 희석되고 오염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아…

내 회심 경험은, 대단히 비종교적, 아니 어찌보면 반종교적인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회심의 일반적인 성향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게 특별히 일어난 어떤 현상인지는 잘 알수가 없다. 

회심 (7) – 개인적 회심

나는, 복음을 받아들인 과정이 지극히 개인적이다.
말하자면, 혼자 성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지금도 대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어느 겨울날, 추운 기숙사 방에서 혼자 성경책을 읽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내게 복음을 소개해 준 것도 아니고,
함게 구도의 길을 걸었던 동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내 신앙은 두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우선, 어떤 ‘사람’으로부터 지배적으로 받은 영향이 없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제한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주변에서 보면, 특별히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한 사람이 뚜렷한 경우, 그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남들은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나는 꽤 어렵게 얻어야 했던 경우도 많았다. – 나는 그래서 지금도, 어떤 사람을 다짜고짜 신앙적 영웅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단체/조직 등을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것에 반대/저항한다.

또, 내 신앙은 다분히 ‘개인적’이다.
물론 내 회심의 경험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나는 참 좋은 신앙의 공동체를 만났다. 그곳에서 heavenly fellowship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앙의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가 많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몇번의 건강한 공동체 경험을 통해서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신앙/회심이 ‘개인적’이라는 basis는 내 한계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회심 (6) – 죄

죄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성적인 단계’에서나, 그 후에 복음에 빠져들었던 ‘감정적인 단계’ 모두에서,
죄에대한 깊은 회개, 고백 등은 없었다.

내가 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된 것은,
그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어던 갈등은,
“이렇게도 죄에대한 인식이 희박한데, 과연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긴 한건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 깊이 감격했지만,
그것은 내 죄를 용서하셨더는 감격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랑 때문이었다.

죄에대한 인식 없이, 십자가의 희생이 어떻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겐 처음 단계에서는 그 십자가가 ‘죄의 용서의 도구’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

죄에대한 분명한 인식, 그것에 대한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전제조건일까?

내 초기 회심경험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야…
일종의 신비체험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죄에대한 더 깊은 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내 초기 회심경험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확실한 인식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제가 아니라는 내 생각, 또 그런 내 경험은…
지금 내가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 복음을 전하는 방식,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나 복음에 막 입문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회심 (5) – 개인적 구원, 우주적 구원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근거한 개인적 구원이다.
반면 이머징 교회등에서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우주적 구원,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이다.

나는 처음 회심의 경험때, 무엇을 받아들였을까?

앞의 글에서 언급한대로, 나는 매우 이성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먼저 거쳤고, 그것에 바로 연이어서 아주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먼저 이성적 깨달음을 거칠 때,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성경책은 에베소서였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거의 충격적일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라면 정말 소망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땅에서의 여러가지 어그러짐이 회복되는 그림을 성경에서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보면,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담론에 먼저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이 이성적 깨달음은, 나를 복음의 길에 들어서게 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격렬한 감정적 경험을 할때에는,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예수의 고난 이었다. 그 고난을 생각하며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까지 창조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 벅찬 감격에 나도 나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격렬한 감정적 경험은, 나를 복음에 헌신하게 했고, 더 깊이 들어가도록 인도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 – 복음을 받아들임”
“감정적 경험 – 예수의 십자가/고난 – 복음에 헌신함”
이 두가지가 시간차이를 두고 내게 꽤 강력하게 다가 왔는데…

만일
이성적 깨달음 – 하나님 나라 라는 framework만 가지고 있었다면, 깨닫긴 했더라도 헌신하지 못했을 것 같고,
감정적 경험 – 예수의 고난, 이라는 framework만 있었더라면, 일시적으로 헌신했을지 모르나 금방 싫증을 내거나 밑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이 두가지가 모두 꼭 필요한 것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