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flexible display를 개발하는 일이다.
아주 새로운 분야에서 아주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분야의 제품을 개발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eco-system”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flexible display를 만들기 위해서는, 휘어지는 기판(substrate)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substrate를 만드는 사람/회사가 없다.
그래서 포테이토칲 봉지 만드는 회사도 접촉해보고, 장판 만드는 회사도 접촉해 보면서… 그런데서 만드는 플라스틱 sheet가 쓸만한 것인지를 조사해본다.
그런데, 이런데서 플라스틱 sheet (substrate)을 가져다 쓰면 여러가지 defect(결함)가 많기 때문에, 도저히 좋은 품질의 display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한다.
여러 플라스틱 회사를 접촉해서, 한번 같이 해보지 않을래, 이런거 한번 해보라… 꼬시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하고….
비슷한 제품 개발을 하고 있는 다른 회사들에게, 이 기판을 만드는 일을 어떻게든 되게 함께 힘을 합쳐보자고 제안해보기도 하고…
그게 안되면, 기존에 수퍼마켓 비닐봉지 용 플라스틱을 가져다가 우리가 아예 가공을 해서 쓸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기도한다.
Flexible display를 만드는 일이 제대로 되더라도, 그 기술을 둘러싼 주변 환경 (eco-system)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몇배 더 힘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flexible display를 만들려면, 주변 환경 / eco-system을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KOSTA를 섬기다보면,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영광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고,
한국 교회는 급속히 쇠락해가고 있고,
건강한 목회자 그룹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렵고,
교인 일반 대중은, 바빌론 문화에 젖어, 거룩함을 잃어버렸고,
구 시대의 신학은 새로운 시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고,
생각이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너무 지극히 소수이고,
늘 돈이 없어 힘들고,
운동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학생 대중은 지극히 위축되어 피동적이다.
KOSTA를 처음 시작했던 86년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복음주의의 전성기가 열리던 때였다.
다소 허술하긴 했지만, 건강한 eco-system이 있었고,
어두운 시대를 뚫고 돌진해 갈 수 있는 희망으로서의 복음의 빛이 강하게 보이던 때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
…
…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김교신 선생을 많이 생각했다.
외래종교로서 이 땅에 전래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독교인으로서…
그야말로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한 줌 밖에 안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정신에 투항해버린 상황,
그나마 제대로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일제로부터 각종 탄압을 받고 있었고,
돈도,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이분은,
“조선을 성서 위에” 라는
어찌 보면 황당무계한 모토를 내걸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졌다.
초대 교회는 어떠했던가.
당시 세계 최대, 최강의 제국이 작정하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신흥종교를 말살하겠다고 달려들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들은, 예수가 주(Lord)다! 라는 ‘황당무계한’ 신앙을 고집스럽게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졌다.
KOSTA를 둘러싸고 있는 eco-system은 참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어 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주변이 어둡기 때문에 더더욱, 어디선가 밝은 빛을 치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둡기 때문에 더 밝게 빛나게 된다.
누군가는 그 밝은 빛을 치켜 들기위해 과감한 희생과 헌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테일러와 휘튼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씀에 결단하고, 흥에 겨워 찬양하고, 서로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가지는 소망의 근거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내 헌신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되었다.
간사님 글을 읽고, 지난 2010상담 요청했던 것의 follow-up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25주년 축하의 자리에서 참 건방지게도 코스타의 조직이 눈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코스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취지문이나 집회나 일하시는 분들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80년대식의 헌신된 엘리트, inflexible 한 조직, lofty ideal을 보았고요 (그냥 제 느낌입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 주어지는 데이케어와 가정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참석자의 절반인 부부들, 중상류층의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가진 학생들과 괴리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그때 상담을 빙자하여 간사님께 토로한 것이 이런 내용이었지요?
속으로 ‘코스타를 졸업’ 했다고 결정한 지난 2년간 개인적으로 신앙공동체 없이 갈급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코스타가 운전 거리에 있는 게 어디냐”는 낮은 마음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코스타를 갔던 처음 몇 해처럼,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왔고요. 또다시 코스타가 있음에 감사하였지요 🙂
작년과 올해 깨달은 것이 한두개 있는데요,
먼저는 코스타의 80년대 뿌리와 같이 저도 90년대의 편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2010년대 기독교나 코스타에 대해서 판단하였던 것이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코스타가 계속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2010년대에 코스타가 어떻게 쓰임받았는지, 아마 후에 뒤돌아 보면 보이겠죠?
올해 이성일 간사님 이외에 두 분 간사님이 더 중보기도실에 계셨는데요, 그 분들을 포함한 간사님들의 초인적인 사랑과 수고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코스타를 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박한 결론이지요. 휘튼에서 뵌 이후로 생각나서 들러 봤는데, 블로그에서 한~참을 머물다 가게 되었습니다.
ㅈㅇ 자매님,
잘 복귀하셨나요?
제 동생 말이… 냉방병 같은 증세 때문에 운전하고 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던데…
(시카고에서 의무실 자봉했던 의사가 제 동생입니다. ^^)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참 감사하네요.
25주년때 아마도 보셨을 모습들중 많은 부분은, 아마 제대로 잘 보셨을테고요…
또 일부 어떤 것은… 아마 차 한잔 마시며 설명을 좀 들어야 이해가 되시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잠깐 얼굴보고 이야기한게… 수요일 저녁에 잠깐 이었죠? 진짜… 한 1분 정도 되었나…
언제 기회가 되면 여러 이야기도 더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특히, 그 지역에서 정말 좋은 공동체도 만드시고, 하나님도 깊이 경험하시고… 그럴 수 있도록 기도할께요.
일 때문에 Ames에는 가끔 가는데,
언제 그 옆동네(?)도 좀 갈 기회가 나면 좋겠네요. ^^
네 여러 간사님들 덕분에 하루 더 지내고 잘 돌아 왔지요.
기회 되면 드모인이나 근처에서 한 번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