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니 캠폴로가 신학교에 다닐때였다.
설교학 실습 시간이었는데, 학생들이 각자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하고 교수가 그것을 평가해주는 시간이었다.
토니 캠폴로는 아주 훌륭하게 설교를 해 내었다. (아는 사람을 알지만, 토니 캠폴로는 아주 뛰어난 설교가이다.)
다른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고, 토니 캠폴로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교수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설교가 훌륭하긴 했는데, (훌륭한 말솜씨, 적절한 예화, 정확한 본문 분석 등등) 너무 ‘훌륭한 설교자’가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2.
내 스스로를 판단해 보건데,
나는 다른이들로부터 칭찬과 칭송을 많이 받는 편이다.
(실제로 내가 괜찮은 수준보다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또 큰 문제는, 내가 그것을 매우 즐긴다는 것이다.
나는 대표적인 people-pleaser이다. 다른 이들이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을 매우 줄기는 사람이다.
3.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내가 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만 목매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깊이 복음의 감격에 빠져 있을 때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나도 내가 주목받게되는 것을 몹시 불편해하면서 피했었다.
심지어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좋은 일’ 인것같아 보이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내가 드러나는 것 같으면 그냥 그 ‘좋은 일’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마음들이 많이 무너지고,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나 자신을 높이는 것이 자꾸만 다시 올라왔다.
사역의 need가 크니까, 내가 좀 드러나더라도 일단은 이걸 좀 해야하지 않겠나.
내가 이걸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하기가 어려운데, 일단은 눈을 질끈 감고 내가 드러나는 일을 해야하지 않겠나.
그러면서 점점 내 자신도 ‘내가 드러남’에 대해 둔감해졌고. 어느순간 내가 드러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사람들이 내게 ‘칭찬’을 할때에도,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드러나셨는가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말을 잘했나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4.
고린도전서 말씀이 나를 깊이 찌르고 있다.
내가 드러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함께 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