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어느 그룹이나 단체나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 나름대로의 ‘내부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때로 그 그룹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내부논리가 지나치게 강화되면 그 외부와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리는 일들이 나타난다.
나는 목회자 그룹을 대할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도 나름대로 교회 생활도 오래 했고, 다른 평신도들에 비해서 여러 목사님들을 많이 만나본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사님’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할때에는 그분들께만 특별히 사용하게되는 언어가 있다. -.-;
나도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그렇게 되어버리곤 했다.
그게 언어만 그런게 아니고 논리도 그렇게 되기도 한다.
가령 예를 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은, 목사님들에게 이메일 쓸때 써주면 완전 잘 통하는 말이다.
소위 ‘주의 종’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도 비판을 한것들이 많이 있으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표현을 가지고 한번 난도질을 해보자.
교회가 주님의 몸된 공동체라는 말이 성경에 사용되었을때, 나는 이것이 주로 ‘보편적 교회’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님들이 섬기는 각각의 개교회가 각각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보는 것에는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적어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 신약 성경의 구절을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만보를 양보해서, 각 지역교회가 주님의 몸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논리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을 참 많이 보아왔다.
대개 지역교회 담임 목회자들은, 소위 ‘개혁적인’ 목소리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많이 너그럽게 넘어가다가도… 그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확~ 틀어져버린다.
예전에 나는 이걸 제대로 읽지 못해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아니, 이 목사님은 왜 이 사람은 좋다고 하고, 저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신학을 가졌다고 비판을 하는데… 그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거지?
그게 헷갈릴 경우, 결국 그 목사님의 nerve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대부분 교회에 대한 비판이다. 신학적 논리 전개가 아니다.
자신이 섬기는 일의 정당성을, 자신이 처한 상황을 glorify함으로써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있는 목회자이므로 자신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따라서 자신도 중요하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가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사업가도,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엔지니어도, 예술가도… 그런거 다 있다. 자신이 하는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모습에서 목회자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많은 예를 들어가며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목회자들에게는 이런식의 내부논리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내부논리들이 이제는… 너무 많이 게토화 되어서 외부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본다.
M.Div. 졸업하고, 교회 안에서만 계속 있는 목회자들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