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건 2012년이었다.
일본의 vendor와 일을 하면서 좀 나이들어 보여야겠다는 압박도 있었고, 어쩌다가 연말에 면도를 며칠하지 않아 수염이 조금 길어진김에 그냥 수염을 길러보는 시도를 했었다.

그 후로 여름에는 그래도 좀 더워서 싹 밀어버리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금년 여름에는 그나마도 밀어버리지 않고 보냈다.

이제는 아마 내가 수염을 다 깎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선뜻 수염을 밀어버리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머리숱이 자꾸 없어져서 수염으로라도 그걸 좀 커버해야겠다는 생각때문에. ^^

나는 일본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내게 일본말로 말을 건다.
중극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중국말로 말을 건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을 만나면 내게 영어로 말을 건다. -.-;
그게 수염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동네 한인마트에 가서 계산하는 아저씨나 아줌마들도 앞사람까지는 친절하게 한국말로 하다가, 나를 보고는 얼른 영어로 대한다.
민우는 그럴때마다 그게 웃긴다고 까르륵~ 한다.

미국에서 산 기간과 한국에서 산 기간이 거의 비슷해져가고 있다.
내 수염은, 내가 더 이상 한국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신앙의 경험

신앙의 경험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흔히 ‘신비체험’비슷한 쪽으로 생각을 하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신앙의 경험은 새로운 성경해석을 접하여 관점을 새롭게하는 신학적 훈련같은 대단히 이성적인 부분도 포함되고, 상실이나 좌절과 같은 실존적 경험도 포함한다.
말하자면 외부에서 들어는 정보를 내부에서 해석하는 작업 전체가 신앙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경험이 대단히 중요한 종교이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무엇을 깨달았는지, 얼마나 무엇을 적용해보았는지 등등이 그 사람의 신앙을 define하게 된다.

신앙경험의 아주 깊은 것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 깊은 신앙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정말 뭔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땐 말로는 그거 다 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이야기를 해보면 정말 그걸 모르는거다.

어떤 신앙경험은 평생 한번의 경험이 그 사람의 평생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언제 한번 성경을 읽으며 뜨겁게 눈물 흘렸던 것, 좌절의 순간에 기도하다가 느꼈던 하나님의 임재, 무덤덤하게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무언가를 깨닫는 것,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던 가까운 사람이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을 목격하는 것 등등.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어떤 강렬한 신앙의 경험으로 평생 그것을 붙들고 사는데,
그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는 참 대화가 어렵다.
십자가 아래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심했던 평신도가, 십가가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느끼는 답답함도 그런 대화의 단절일수 있겠다.

신앙경험의 부재는 그리고,
상상력의 부재를 가지고 온다.

경험이 없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의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이 가지는, 때로는 무모해보이는 상상을, 그저 무모한 것으로만 치부해버리는 사람에게는 그 경험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삶의 경험이 ‘신앙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과 신앙을 깊이 성찰하고 묵상하는 일이 숨쉬듯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상성은 현대사회의 비극이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울음

최근에,
사는게 힘들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어떤 친구가 내게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무지하게 긴 대답을 썼는데, 그중 일부를 여기에 (그 친구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지 않게)

===

지금과 같이 어두운 시대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데 농사를 지어야하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

비가 내리지 않으니… 정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비를 기다리지만 비가 안오잖아.

그러면 바가지로 수도물이라도 퍼서 바짝 말라가는 논바닥에 가서 붓는 거지.
하다못해 오줌도 그기가서 싸는 거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밭을 갈고.

그러면 어느새… 그렇게 내가 눈물을 흘리며 밭을 가는 옆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게 보이는 것 같아.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나님께서 눈물 흘리시는게 보이면…
지금 비가 당장 오지 않아서 이짓 더 해볼 수 있겠다 싶은 용기가 정말 나는 거지.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랑 같이 울고 계시는 거니까.

내가 울때, 하나님을 함께 초대해서 우는게 참 필요한 것 같아. 내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제발 춤도 좀 추고, 울기도 하면 안될까?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7:32

왜 그때 그 사람들은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그렇게 배척했을까?
일종의 금욕주의적 자세를 가졌던 세례요한도,
전통파괴자와 같이 보였던 예수님도 그렇게 배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나 예수님보다도 그저 자신을 지키는데 급급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른건 모르겠고, 그냥 나는 이대로 나를 지키고 있으련다 그런 자세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있지는 말자.
이렇게 주저앉아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는 말자.
춤을 춰도 좋고 울어도 좋다.
뭐라도 하자.
정말 뭐라도 하자.

때로 죽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죽어있는 교회들을 향해,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을때가 참 많이 있다.

리더를 제비뽑아서 선출하는 공동체는

Thanksgiving 휴가기간에 정말 잘 쉬었다.
매일 늦잠도 자고 (그래봐야 아침 8시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면서 보냈다.
책을 전투적으로 읽는다거나 뭔가 이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려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냥 쉬었다.
오랜만에 집에온 민우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고, 많이 바쁘게 사는 (그리고 연말에 정말 장난아니게 바빠질) 아내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빈둥빈둥 누워서 youtube 보고, 음악듣고, 낮잠자고…

그러던중에 Stanley Hauerwas의 짧은 인터뷰 clip하나가 youtube ‘추천’에 떴기에 보았다. 10년쯤 전의 인터뷰인것 같은데. (링크)

Stanley Hauerwas같은 사람은 대답이 때로 불교 고승의 선문답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워낙 대답이 함축적이고 짧은 말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마디의 짧은 대답을 가지고도 아주 오래동안 곱씹을 것이 나온다.
위의 인터뷰에서 짧게 이야기한것 중에서 한가지가 유난히 내 마음에 남았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 리더를 제비뽑기로 뽑는다. 지금도 어떤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리더를 제비뽑기로 뽑을 수 있으려면 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할까?

리더십, 공동체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가 왔다

이렇게 시꺼면 것들이 공기에 있었던 거다.
비와 함께 이것들이 씻겨내려오니 좀 숨을 쉴 것 같다.

그동안 이곳 Bay area는 세계에서 가장 나쁜 수준의 공기 오염이 있었다.
근처(?)에서 일어난 큰 산불 때문이다.
아직 산불이 다 꺼지진 않았다.
이렇게 비가와서 산불도 공기오염도 좀 해결이 되었으면 한다.

때로,
아무리 버둥거리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건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해결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Smart Contact Lens

지난 금요일 우리 회사의 공식 블로그에 glucose sensing smart contact lens 개발을 멈추기로(shelf) 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발표를 읽는 사람들의 몇가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1. 하나는 아… 안타깝다… 이다.
실제로 아주 genuine하게 이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거다.

2. 두번째는 그거 잘됐다… 이다.
이건 뭔가 Verily가 잘되는 것이 배가 아픈 사람들인 듯. ^^ 실제로 이쪽 어느 뉴스 미디어는 유난히 우리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가짜뉴스’를 많이 배포해서 우리 회사 리더십이 좀 골치를 썩기도 했다.

3. 세번째는 그럴줄 알았어… 이다.
사실 눈물 속의 혈당량과 피 속의 혈당량의 상관관계가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희박했다. 우리는 이 device를 만들어서 그 상관관계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는데 그개 잘 안된거지.

나도 이 프로젝트에서 한 부분을 담당했다. 내 책상 서랍과 책상 위에도 이런 저런 종류의 샘플들이 무지하게 많이 쌓여있다.^^

그런데 혹시나 이쪽을 좀 아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더 드리자면…
Verily에서는 이 혈당 측정용 smart contact lens를 포함해서 최소한 3종류의 smart contact lens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걸 비밀로 지켜왔는데 우리 회사 블로그에 떴으니 나도 써도 되는거지.)
실제로 비슷한 technoogy를 사용해서 이것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래서 혈당측정용 smart contact lens를 그만둔다고 해서 Verily가 smart contact lens 자체를 그만두는건 아니다. 내부적으로는 꽤 바쁘게 다른 contact lens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같아선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으니… 뭐 이정도만 설명을 해야 할 듯.

하여간 걱정(?)할건 아니고, 우리 회사 내부에서는 뭐 당연히 그런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솔직히 궁금한건 왜 이 시점에 그걸 announce했는지 하는것이긴 하다.)

집으로

1.
민우가 감기에 걸려서 아프다.
열도 좀 있고 그래서 지난 주말에는 그냥 많이 잤다고 한다.
불쌍한놈…

안그래도 많이 안타까웠는데 민우가 우리에게 text를 하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썼다.
아… 거기서 완전 마음이 무너졌다.
우리 아가가 아파서 집생각이 나는구나.

오늘밤에 집에 온다. 오면 많이 안아줘야겠다.
(우리 민우는 스무살이 된 아직도 아빠와 엄마에게 안기는걸 참 좋아한다.)

2.
그런데,
살면서 우리도 많이 아프다. 때로는 그게 우리의 잘못 때문일때도 있고,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고, 우리 잘못 하나도 없이 억울하게 아플때도 있다.

그럴때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killer 기도는…
“하나님 아파요. 하나님 품이 그리워요. 안아주세요.” 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정말 그렇게 꼭 안아주시는 것 같다. 그게 어떤땐 당장 그렇게 하신다고 느껴질때도 있지만 어떤땐 나중에야 하나님께서 안아주셨다는걸 알게되기도 한다.

살면서 지치거나 낙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아플때,
하나님의 품으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해보자.
빨리 낫게 해달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안아달라고 이야기해보자.

3.
우리 민우가 오늘 밤에 집에 온다.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오면 많이 재우고, 많이 안아줘야겠다.
민우가 좋아하는 갈비도 사 먹이고, 버블티도 함께 먹고.
오늘 밤 민우가 SFO에 도착하기까지 오늘 하루는 몹시 길 것 같다.

바쁜 한주가 지나고 있다

이번주는 좀 더 많이 정신이 없었다.

아침7시 뭐 이렇게 일찍 첫 미팅을 하는 날이면, 그 밤에는 미팅을 잡지 않는게 그래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지만,
그런게 마구 망가지는 주였다.
그래도 나는 좀 낫지.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은 1am-8am 미팅이 있었다. (영국과의 conference call) 그리고 나서 아침 10시부터 다시 미팅들이 잡혀 있으니… 완전 팀 전체에게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는 주였다.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어오는 일과,
엄청나게 돈을 많이 쓰는 일 두가지로 모두 바빴다.

사람들과 엄청 이야기 많이 하고,
사방에 전화하고, conference call 하고, 새로운 사람들 무지하게 만나고,
크고 중요한 meeting들 organize도 하고,
특허도 쓰고,
새로운 특허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도 하고,
그러면서 그냥 또 일상은 일상대로…

이번주에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 때문에 나는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하기도 했다.
오늘 미팅 몇개 넘기고 나면 주말인데…

I need a break.
이번 주말에는 혼자서 밀린 공부들을 좀 하면서 relax 할 여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바울을 생각하며

N T Wright이 바울 전기를 썼다.
참, N T Wright은 정말 엄청나다. 이 사람은 내가 읽는 속도보다 이 사람이 책을 쓰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어떤 소문에 의하면, N T Wright은 양쪽에 타이핑을 하는 두 비서를 앉혀두고서 양쪽의 사람들에게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해주면 두 사람이 타이핑을 하고 그렇게 한번에 두권의 책을 쓴다고… (설마 그럴리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나온걸 보면서 잠깐 바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바울은 가만보면 정말 완전 goal-oriented person이다. 완전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고, 완전 열정 넘친다. 강한 신념도 있고, 고집도 세다. 그래서 충성심도 엄청나다. 아마 바울은 군대에가서 기합을 주면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받았을 것 같다.

내가 바울과 같은 성품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건 사실 좀 자신이 없다. 워낙 바울은 넘사벽의 넘치는 에너지가 있어서…
그런데 적어도, 나는 바울과 같은 성품을 매우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바울의 논조가 정말 마음에 든다.
가령 로마서 8장같은 건 정말 읽으면서 가슴이 뛴다. 바울이 심장박동이 정말 들리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것도 숨이차도록 몰아쳐 한번에 읽으면 마치 내 가슴이 터질것 같이 느껴진다.
에베소서 1장의 기도같은 것도 그렇고, 빌립보서 2장도 그렇고…

그런데,
바울과 같은 성품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혹은 바울과 같은 성품을 그렇게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본문들을 그렇게 읽을까?
오히려 그런 본문들은 살짝 부담스럽고, 대신 요한일서 4장 후반부같은 것이나, 아니면 시편23편같은 것이 훨씬 더 마음에 다가오지 않을까.

바울은 어쨌든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성품이 그 바울의 성품과 잘 match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것 자체가 더 힘들지는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정말 중요하지만, 성경이해를 위해 바울에 몰빵하는 것에는 그런 위험성도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바울을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은 그렇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정부분 치우치거나 왜곡되어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