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과 고난

지난 주말에 교회 소그룹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나는 그룹에서 함께 기복신앙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가 뭔가 계속 찜찜하게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정말 꼭 되어야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

그래서 기복신앙에 대해 며칠 더 생각하면서, 기복신앙이 설명해낼 수 없는 가장 헛점은 어둠의 시기 / 고난 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면서 마음이 망가진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고난이 그 사람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기복신앙은 이걸 설명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날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생각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걸까,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고난의 시기를 지날때 하나님에게 이야기한다.
(Instead of talking about God, he/she talks to God)
기복신앙은 이걸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며 얻고자하는 최상의 것이 그 문제의 해결이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며 얻게되는 것이 하나님 그분이다.
욥이 고난의 끝에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잘 나타내어준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이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의 시기에, 중심에 자신을 가져다놓고 그로부터 생각을 펼쳐나간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의 시기에,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화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기복신앙은 자기중심성의 산물이지만,
진정한 신앙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신자를 해방시킨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지난 주말,
내가 좋아하는 형과 짧게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잘 지내냐, 뭐 그런 안부도 없이 그냥 틱~ 요건만 간단히 ^^

그 형이 내게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이었는데,
뭐 그래도 괜찮겠느냐는둥, 해주면 고맙겠다는둥 그런 말 없었다.

오승아,
이거 네가 좀 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 형이 부탁한대로 했다.

그 형이 그렇게 내게 이야기한건,
그냥 아주 당연히… 그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한 사람에게 당당하게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할수 있는거다.
명령조가 되어도 좋고, 그 사람 사정 다 봐가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나도 그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눈물 핑 돌도록 사랑하고,
그 형도 내가 마음 다해 섬기는 그 하나님을 고집스럽게 섬기고 있으니까.

그런 형이 있어서 참 좋다.
그런데 그런 형이 너무 멀리 있어서 아쉽다.

순교와 일상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이다.
특히 신약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이미 박해와 순교가 시작되고 있었고, 신약성경에는 그 순교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나는 신앙의 일상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그 신앙의 일상성이라는 모토가 내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신앙의 일상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일상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상수로, 일상을 변수로 놓고 방정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변수로, 일상을 상수로 놓고 방정식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히 일상을 긍정하고, 이미 형성된 일상에 신앙을 녹여보려는 시도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그런 신앙과 순교의 신앙은 과연 병립가능한 것인가?

당연히 모든 사람이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연장이 순교라는 논리적 전개가 불가능하다면,
나의 일상은, 그리고 나의 신앙은 변질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도 트럼프가 나올까?

미국에서 트럼프는 잘나간다.
나는 정말 그 사람 참 보기 싫어하는데… 뭐 그래도 잘 나가는걸 어떻게해.
트럼프는 사실상 중간선거도 이겼고, 이대로라면 대통령도 연임할 것 같다.

막말도 하고, 자기편만 끌어당겨 갈라치기 하고…
그래서 그런 비슷한 정치인으로 한국에서 홍준표를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트럼프가 뜨게된것은 사람들의 ‘분노’였다.
자기들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어가는것에 대한 분노,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것을 자극적, 분리주의적, 극우적 언어로 풀어낸 사람이 트럼프이고,
그것은 논리적, 이성적, 좌파적 언어로 풀어낸 사람이 샌더스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국의 양당정치체제가 공고해서 그것을 깨어버리는 버려야한다는 대중의 분노가 그렇게 쌓여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분노는 the established, 즉 기존 체제에 대한 분노이지만,
한국의 분노는 일종의 기득권에 대한 분노인데, 지금의 집권세력은 기득권세력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적폐청산’이라는 것을 1년 반이 넘게 계속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한국도 미국도 사람들이 정말…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태도로 정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비이성적 선택을 했고, 한국은 그보다는 조금 더 이성적 선택을 했다.
(아니면 그런 비이성적 선택의 option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나는, 만일 지금 한국의 집권세력이, ‘기득권’에 대한 대중/민중의 분노를 제대로 읽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지 않는다면,
결극 지금 집권세력도 ‘the established’로 여겨져 트럼프같은 사람에게 힘도 못쓰는 지금의 민주당같이 되어버릴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짜로 이대로는 못살겠다. 이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노가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한국에서도 트럼프같은 사람이 나오는 비극이 생길수도 있다고 본다.

권위, 폭력, 복종, 자유

1.
현대철학은 (적어도 그냥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수준에서의 현대 철학은) 모든 권위를 폭력적이라고 보는 듯 하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강제(coercion)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류의 생각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2.
그런데…
우선 이 논리는 스스로 모순을 가진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무엇이든 강제할수 없다는 명제는 무슨 근거로 강제하는가?
거부해야한다는 그 권위 자체를 이미 화자가 전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냥 shallow한 수준의 소위 ‘깨인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게 내적 통일성을 갖지 못한것 같아 보인다.

3.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그렇다면 과연 어떤 권위가 올바른 권위인가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올바른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될것인가 하는 고민이 따라와야 할테고.

4.
나는 현대 기독교에서 이런 권위를 잃어버린것 같이 느껴진다.
권위라고 하면 그냥 종교적 딱딱함만이 연상이 되고,
정말 그것에 복종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권위가 그냥 사라져버린것 같다.

5.
나는 그렇게된 아주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Lordship’의 부재로 본다.
결국 절대적으로 합당한 권위를 드리고 그것에 순종해야하는 대상에게 제대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외의 모든 권위와 복종 관계가 다 mess-up 되어버린 것이다.

6.
그리고 그런 권위에 대한 이해와 순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고급’을 선호하는 이유

최근에 몇군데 인터넷에서 읽은 글들과 혼자 생각을 짬뽕해서…

한국 사람들은 ‘고급’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좋고 나쁘고 하는 가치판단을 떠나서)

한국은 도로사정에 비해서 차의 크기가 큰 편이고,
도로사정이 좋은 미국에서 ‘중산층’이 타는 차는 소나타급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이제 그게 그랜저가 되었다지.

또 한국에서는 ‘명품’을 유난히 많이 추구하는 것 같고,
각종 광고들을 보더라도 ‘luxury’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옷, 집, 자동차, 음식점 등등..

그런데,
그게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속물’이어서 그럴까?

나는 그런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훨씬 더 정이 많고,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문화들에 비해 가치(이익과 대비되는)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유난히 ‘고급’ 혹은 ‘luxury’가 뜨는 걸까?

내 생각엔,
한국이 너무 많이 획일화 되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주 어릴때부터 한가지 기준으로 평가받고,
한가지 기준으로 줄을 세워지고,
똑같이 생긴 교복을 입고,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살고,
똑같은 형태의 lifestyle을 가지고,
똑같은 형태로 자녀교육을 시킨다.

그래서 거기서 뭔가 ‘특별함’을 추구하기위해서는 ‘고급’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게되는 것이 아닐까.

반면,
모두가 한가지 기준으로 줄을 서도 되지 않는 문화라면,
누구는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누구는 파스텔톤의 옷을 입고,
누구는 흑백의 옷을 입는 문화라면…
그러면 자신만의 개성이 존중되기 때문에 굳이 ‘고급’이 아니고도 특별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고급을 추구하고, 성공을 추구하고, 출세를 추구하는 물질주의적 문화가 기독교의 최대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에서만이라도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함을 좀 더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어떨까?
신학적 보수와 진보가 함께하고, 좌파와 우파가 함께 하고, 펑크머리와 포마드머리가 함께 하고, 찢어진 청바지와 나비넥타이 정장이 함께하는…

Wasting my time

예~전~ 직장에 함께 일했던 사람중에 C 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그 직장에 있을때 늘 나를 경계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늘 자를 경계하고 견제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야 뭐 그렇다고 해도, 이 사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일이 잘 되지 않은 적이 많았다.
상당히 답답하고 열받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사람이 계속 내게 친한척을 하면서, coffee나 하자, catch up 하자,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좀 듣자며 내게 연락을 해온다.
사실 한 6개월쯤전에 그렇게 연락을 해와서 한번 만났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회사에 무슨 자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 나를 찔러보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이번에 만나자고 하는 것도 그런 것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은 그렇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이 사람이 할만한 일이 딱 있는 것도 아닌데도, 계속 어쨌든 내게 친한척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C 말고도 몇명 있다. 주로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친절하게 대해주고, 진실되게 대하고 그래야 하는 걸까? 어떻게?
그냥 나를 이용하고자 내게 친한척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안그래도 바쁜데 이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혜롭게 시간을 쓰는 것일까?
이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시간을 버려지도록 그렇게 사용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들이 좀 있다.

Reality?

1.
요즘은 전화에 딸려나오는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진짜 잘 나온다.
그도 그럴게, 이게 그냥 사진만 찍는게 아니고, 소위 ‘인공지능’이 사진을 보정해주기 때문이다.
너무 조명이 어두우면, software가 자동으로 조명을 조정한 사진을 찍어준다.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오게 된다.

2.
그렇다면, 그렇게 찍은 사진은 ‘실재(Reality)’일까?
결국 카메라 software가 재구성한 사진이니… 현실에 근거한 실재의 재구성 정도로 생각될 수 있지 않을까?

3.
내 오른쪽 눈에는 소위 ‘floater’라는게 얼마전에 생겼다.
이게 일종의 노화현상의 일부라던데…
안구안쪽의 ‘gel’이 그 벽과 분리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마치 무슨 작은 날파리 한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의사에게, 그래서 이건 얼마나 지나면 없어지느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안 없어진다고 했다.
대신 내 뇌에서 그걸 무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현실속에 있지 않은 가상의 날파리가 내 눈 안에 생겼고, 내 눈 안에 생긴 그 가상의 날파리는 점점 내 뇌가 그걸 무시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내가 의식을 많이 하고 노력을 해야 그 floater가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Reality)일까?
내 눈이라는 일종의 ‘센서’를 이용해서 내 뇌라는 ‘software’가 재구성하는 이미지는 과연 실재일까, 아니면 실재의 재구성일까?

4.
만일 실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tool 자체가 어쨌든 실재를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실재(Reality)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속에서 내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5.
기독교적 관점은 실재와 본질을 분리하는 플라톤식 이원론이나 영지주의를 거부한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것들은 기독교가 싸워야 했던 주된 적들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식이 바로 실재라는 등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식과 실재를 등치시키면 초월이 들어갈 자리를 없애버린다.

6.
우리의 인식과 이성과 의식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어야, 그래서 실재(Reality)라는 것에대한 일부의 애매함(ambiguity)를 남겨 두어야만,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대로 우리 감각 기능과 뇌의 기능간의 역할분담이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된다.

7.
실재와 본질을 분리하는 이원론은 허무하고,
실재와 본질을 동일시하는 물질주의는 internal coherency가 부족한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관점이 이 애매함을 자연스럽게 수용해내는데 매우 적합한 관점이 아닐까.
뭐 이런 류의 생각을 혼자서 해 보았다. ^^

8.
보나마나 이런 생각들…
철학자/종교철학자/신학자들이 이미 많이 생각한 것들일텐데…
그런것에 내가 깡 무식하니… 혼자 이런 생각을 해볼수 밖에…

좋은 설교란

좋은 설교는,

동의하기 때문에 듣기좋고 공감가는 설교가 아니라…
동의하기 때문에 듣기힘들고 마음이 불편한 설교가 아닐까 한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동의하기 때문에 듣기 좋은 설교를 따르는 대다수의 대중들과 그들의 입맛을 맞추는 설교자
동의해야하는 이슈에 대해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설교에 불편해하는 대중
건강하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의 설교를 강요하는 설교자
이런 사람들만 넘쳐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 years

오늘로 우리 민우가 20살이 되었다.

참 아이러니컬한 것은,
아이가 어릴때 아이는 부모로부터 참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아이가 어릴때 부모도 역시 부모로서 가장 철 없는 시절은 지난다.

나는 만 29살에 아빠가 되었다. (내 아내는 25살에)
29살의 나는 참 형편없었다.
그럼 지금엔 훨씬 나아졌느냐 하면 뭐 딱 그런건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29살의 나를 돌이켜보면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지 못했다.

민우는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으면서, 자유를 즐길줄 알고, 창의력이 넘치는 아이이다.
그런데 나는 민우가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고 자유를 즐기고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더 잘 크도록 잘 support를 해주지 못한 것 같다.

그도 그럴게, 나는 마음이 따뜻하지 않고, 자유를 즐길줄 모르고, 창의적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우에게 최적의 아빠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우는 내게 참 분에 넘치는 딸로 자라주었다.
민우의 따뜻한 마음은 내 차가운 마음에 난로와 같은 역할을 해 줄때가 많았다.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얼굴로 민우가 내게 폭 안길때면 사랑 없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작은 사랑의 샘물이 고인다.

이제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민우는 아빠 엄마에게 와서 폭 안기길 좋아한다.
예전에는 그게 민우가 나로부터 사랑을 받기 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민우를 통해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