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얼마나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게는 일종의 working theory가 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얼마나 큰 것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짓는 다는 것.
어떤 사람은 복음을 알게된 이후, 자신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경험한 것 전체는 완전히 재해석하고,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복음을 알게된 이후에도 자신이 받았던 교육, 자신이 생각해왔던 사고방식, 자신의 성품, 자신의 상처 등등에 여전히 사로잡혀 살기도 한다.
그건 변곡점은 물론 한순간에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삶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복음이 그 사람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있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에 사로잡혀 살지 못하게 된다.
이게 유치하게 그 사람이 구원받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식의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난히 자신이 받았던 상처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것은 당연히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상처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의 배리어를 넘어서는 수준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비로소 그 상처를 넘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영적 지도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음을 경험한 만큼 그 사람은 자신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을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
얼마나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순절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은 나를 얼마나 뛰어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