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예전에 회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슨 개념을 설명해주려고 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그걸 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분명히 모르고 있는데….

자기는 학교다닐때 그거 관련된 과목도 들었고, 그 후 직장들에게 그것과 관련된 일들도 해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내가 애써서 설명해줄 필요가 없단다.

나중에 막상 그쪽 전문가와 함께 미팅을 할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 완전히 모르는 거다.

그러면서 나중에 하는 말이,
자기는 그게 그런 건지 몰랐단다.
자기는 자기가 알고 있는게 전부인줄 알았단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너는 그걸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그걸 몰라…
네가 알고 있는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니야…
이걸 설득하는것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다.

아, 겸손하자.

분포의 오류?

내가 알기로 IQ는 100이 딱 평균이되도록 맞추어진 수치이다.
그리고 대충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IQ의 표준편차가 대충 16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표준편차의 세배가 되는 수치인 IQ 148이상이 되는 사람들은 전체의 0.15%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100명중에 0.15명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음…
그런데,
나는 그냥 아주 보통의 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대충 IQ 145넘는 사람들이 한두명씩은 대충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때는 중학교 1반에 70명씩이긴 했지만, 내가 이해하는대로 다소 비과학적인 경험적 수치로 따지면 IQ 145넘는 사람들이 2~3%정도나 된다는 이야기.

애들이 자기 IQ 높다고 뻥치고 다녔던 거라고 이야기해볼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선생님들의 총애를 많이 받던 반장이었던 나는 반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는 일을 할 때가 꽤 있었고 그럴때 대충 보면 그런 데이터를 수집해 볼 수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보면 당연히 학생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되는 것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심지어는,
내가 고등학교때에는 우리 학년의 2/3가 넘는 아이들의 IQ가 155가 넘었다.
음… 그게 말이 되나?
아, 물론 내가 약간 특수 고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우리때는 과학고등학교가 그렇게 유명했던 때도 아니고, 경쟁률이 엄청 세지도 않았다.

게다가,
IQ 145를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표준편차 곡선의 반대편에서 IQ 52이하의 사람들이 IQ 148이상 되는 사람들과 비슷한 수가 되어야 한다.
역시 IQ 132이상 되는 사람들과 IQ 68이하되는 사람들의 수가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가?

그러니…
현재 IQ 테스트라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 대충 다 엉터리여서 모두들 실제 보다 한 20정도씩은 더 나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도

최근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매년 2월 마지막 목요일은 Collegiate Day of Prayer라고 한다. 금년이 200주년 되는 해였다고.
게다가 금년에는 그 기도회를 Asbury University에서 한다고 광고가 떴다. Asbury에서 하는 집회도 이걸 마지막으로 끝낸다고 했다.

Collegiate Day of Prayer 웹사이트에서 자기가 마음에 두고 기도할 대학교들을 선택하라고 해서, 나는 나와 내 아내가 다녔던 학교, 민우가 다녔던 학교, 이 근처 학교등 몇개를 선택했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서부시간으로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온라인에서 중계하는 기도모임에도 참석해서 기도했다.

정말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도 많이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정말 무언가를 해주시도록… 하나님께서 정말 이 젊은 사람들을 깨워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내가 기도를 게을리 한 것을 회개했고, 내 마음에 있는 냉소를 고쳐주시도록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을 온 세상이 알게 해 달라고 그렇게 정말 기도했다.
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에 충만해서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마치 바짝 마른 들에 불이 번져가듯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번져가길 기도했다.

post-COVID-19

이제 전 세계적으로 COVID-19은 endemic이 되어버린 듯 하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위태위태 했는데, 중국도 이제는 그냥 이럭저럭 soft-landing을 하고 있는 것 같다. (hard landing인건가?)

글쎄,
어디에선가는 이런 논의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제는 정말 인류가 COVID-19에 잘 대처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review를 해야할때가 아닌가 싶다.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 못했었는지.

이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일 수 있으니, 어떻게든 과학적인 data를 근거로 review가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COVID-19은 세계를 아주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하는 것 조차 제대로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얻은 교훈들은
– 과학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 현재의 기독교는 이런 사태 속에서 아무런 일도, 말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내 사순절 계획

오늘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우선, 월터 브루그만의 사순절 묵상 A Way other than Our Own: Devotions for Lent
를 매일 보기로 했다.
나는 정말 웬만하면 성경말씀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쓴 묵상집을 매일 보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요즘의 내겐 존경할만한 신앙의 선배가 이끌어주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내 전화에 있는 모든 게임을 지웠다!
나는 아주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닌데, 최근들어 내가 조금만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 전화에 있는 게임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중 어떤 것은 내가 정기적으로 가서 해야 진전이 있는 종류의 게임이어서 심지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게임부터 하게되는 때도 많았다.
지난 주일부터 일단 그렇게 시작했는데…
우아, 생각보다 내가 그 게임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없던 시간이 생긴다!약간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때나 조금 심심할때 그냥 잠깐씩 그렇게 하는 게임에 꽤 시간을 쓰고 있었던 것.
게임을 할만한 시간동안 대신 ‘묵상’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긍휼을 베푸셔서 이 기간동안 조금 더 내 마음이 새롭게 되길

수학

나는 수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학교 정도까지는 뭐 그래도 수학 잘하는 아이라고 평가를 받았지만 고등학교때 부터는 수학을 잘 따라가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개념을 이해하고 쉬운 문제를 푸는 것은 잘 했는데, 조금 더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드리면 그걸 푸는데는 시간이 오래걸렸다.

대학에 가서도 수학과목이 대개 학점이 나빴다.
대학교 2학년때 배웠던 engineering mathenatics의 후반부에 가서는 정말 허덕거리면서 수업을 따라갔다.

그렇지만 나는 늘 수학을 재미있어 했다.
끙끙거리며 수학문제를 푸는 것은 재미있었다.
오죽해야 내가 대학교 2학년때 학기중에 과목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서 겨울방학때 혼자서 그 수학책을 다시 공부해가며 문제를 풀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냥 수학이 재미있었다.

사실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 수학을 많이 쓰는 쪽의 일을 하지 않았고, 수학을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박사과정 거의 끝난 즈음에 내가 해내려고 하는 어떤 문제가 꽤 복잡한 nonlinear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 (비선형 편미분방정식)들을 풀어야 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랴부라 그때 그런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해야 했고, 나름대로 꽤 복잡한 system의 equation들을 그 당시 옆 실험실에서 개발해놓은 software를 이용해서 풀어내었다.

아마 그렇게 박사논문을 썼던 것이 내 일생에 마지막으로, 가장 intense하게 수학을 다루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후에도 나는 혼자서 시간이 나면 집에서 대학때 배웠던 미분방정식 교재를 가져다가 혼자서 연습문제를 푸는 이상한 ‘취미 생활’을 즐기기도 했었다.

나는 수학을 잘하지는 않지만 재미있어 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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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인것 같지는 않다.
나는 태생적으로 겁이 많고, 자아가 강해서… 신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자기부인, 믿음의 도약 그런 것들을 참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우 critical한 순간에 제대로 올바른 결정이나 생각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긴 하다.
더 배우고 싶고,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고, 더 그분의 발자취를 뒤따라가며 살고 싶다.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그 열심이 하나도 좋아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종교적 언어를 계속 쓰면서 뭔가 기독교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많이 들지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사람이다.

또,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냥 그 사람의 매력 때문일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일’을 열심히 하게되는 사람들도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과는 기독교와 관련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되지만, 막상 함께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의 언어와 성품과 모습과 행동…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있을 수록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중,
세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올해 ‘rekindle’이라는 새해 결심을 중간 점검하면서,
가능하면 나도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 늘이고,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줄이고,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과는 아예 만남 자체를 없애도록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찬양

뜨겁게 찬양을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는 것은 참 감격스럽다.
거기서 방방 뛰기도 하고, 한껏 얼굴에 기쁨과 감격을 담아서 찬양하는 모습이 참 예쁘다.

그런데…
때로 그 찬양하는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허걱. 정말 이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자신의 말로 생각하고 찬양을 하는걸까.

뭐 가령 예를 들어서, 내가 매우 좋아하는 찬양.
Christ is enough.

이거 가사를 가만히 곱씹어보면,
그리스도 한분이면 충분하다. 내가 원하는건 예수님 밖에 없다.
이제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헌신의 말이다.
다른 모든 것 다 필요없고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고?
세상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된다고.
아니 그런데 그렇다고 자기 입술로 그렇게 하나님께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나 스스로도 찬송을 부르다가 그렇게 섬뜩해질때가 있다.
이런 엄청난 말을 내가 내 입으로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정말 이 찬송의 내용을 내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부르는 찬양의 절반 만큼이라도 그것을 마음에 새겨 살수만 있다면…

Asbury Revival

켄터키의 Asbury universtiy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듣는다.
학생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줄이어 일어나고 있다.
어제 저녁 현재, 하루 24시간 계속되는 예배가 벌써 7일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한때 부흥을 위해 정말 열심히 기도했었다.
내가 속해있는 교회에서 부흥이 있기를,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부흥이 있기를… 그렇게 기도하다가 내 기도는 점점…
내가 그 부흥을 목격하지 못해도 좋으니 어디에선가 하나님의 부흥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그나마 그런 기도도 어느새 내게 점점 없어져갔고,
내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은 한 10년은 더 된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목마름,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이것을 이야기하면 그 목마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다가 그냥 진이 빠져 버리기 십상이고,
정말 점점 나만 이상한 사람같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외로움이 참 힘들었다.

나는 애스베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정말 어떤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정말… 정말… 간절히 바라기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런 부흥이길.

그리고…
정말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그런 일들이 정말 필요한…
죽어있는 교회들에게도 그 부흥이 옮겨 붙어 퍼져 나가기를!

Extra time?

미국의 노동자들이 일년간 노동시간이 1951년에 2031시간이었다.
2017년에는 그것이 1757시간으로 줄었다.
한국은 1980년 2864시간이던 것이 2017년에는 2063 으로 줄었다. (아마 요즘은 더 줄었을 듯)

어쨌든 이제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 자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산업혁명시대에 노동자들이 하루에 12~15시간 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료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물론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은 결국 생산성(productivity)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많은 것을 해 내는 사회가 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여러 기술의 발전은 사회의 생산성을 더 높여줄 것이고, 어쩌면 사람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더 줄어들것이다.

그런데…현대인들이 그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탐닉’하는데 사용한다.

netflix/youtube 같은 영상 자료들을 탐닉해서 보거나,
낚시/등산/운동 등등의 야외 취미활동을 탐닉하거나,
컴퓨터 게임 같은 것에 탐닉 하는 것.

나는 이것들이 나쁘다고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에 빠지고 탐닉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일반화하기에는 분명히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나는 줄어든 노동시간으로 인해 얻어지는 시간을 활용하는 어떤 방식은…
대단히 건강하지 못하거나, 대단히 게으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천년전에 쓰여진 잠언 같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 게으름 말이다.
혹은 2천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7 deadly sins에서 이야기하는 그 게으름 말이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어떤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채 취미활동에 매달리던 어떤 사람.
분명히 무너져 있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등한시 한채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자꾸만 탐닉하던 어떤 사람.

게으름을 그 사람의 잘못으로 모두 돌리긴 어렵다.
어떤 사람은 overwhelm한 상황 속에서 일종의 도피처로 게으름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게으름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교회에서는 최소한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