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코스타 이야기 (4)

함께 같은 교회에 다니던 분중,
지금은 인하대 교수로 가신 송순욱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DC의 지구촌교회 출신이었고, 당시 워싱턴 지구촌교회는, KOSTA 운동을 주관해서 섬기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였다.

이분과 연결이 되어서 “Boston 팀”에서 KOSTA VOICE를 맡아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KOSTA newsletter인 KOSTA VOICE를 만드는 일에 1997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집회 중에 발간되는 KOSTA VOICE와, 집회 전후로 발간되던 KOSTA VOICE update 라는 두종류의 newsltter가 있었다.

99년이었던가… 98년 이었던가에는…
그 KOSTA VOICE update 라는 것을 web에서 띄워서 web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고 정하고.. html로 딱 한페이지를 만들어서 web에 띄웠었다. 이것이 지금 eKOSTA (http://www.ekosta.org) 의 시작이다.

98년에는 KOSTA에서 처음으로 ‘지역 리더쉽 훈련 program’이라는 것을 시도한다고 했다.
Boston이 첫 대상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 일에 연관이 되었다. (이것이 제 1회 gpKOSTA 이다.)
내가 집에서 가지고 있던 ink-jet printer로, 그당시 전 참석자의 교재를 print하고… 하나씩 바인더로 만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Boston에서 황지성, 강동인, 지금은 한국에 가신 이동헌… 이런 분들과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98년에는 그 당시 총무간사로 섬기던 황지성 간사님이 내게 전체집회에서 ‘코스탄의 현장’ 간증을 해 줄것을 요청했었다. 나는 깊이 고민하였는데… 지도교수가 허락을 하지 않아서 결국 그해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때 딱 한번 빠졌다. ^^)
너무 죄송해서… 그때 황간사님에게 직접 이야기했는지… 내가 속으로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이 한몸 부서지도록 열심히 대신 노가다라도 할께요…” 그랬다…  (뭐 사실 그 ‘결심’은 현실화 되었고… ㅋㅋ)

나의 KOSTA 섬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코스타 이야기 (3)

96년 집회 이후,
내 안에는 정말 ‘불덩어리’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를 하면서… 한시간씩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회복하시도록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였고… 정말 지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하고 말씀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참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모임에 생명력이 급속히 생겨났다.
불과 15명 남짓 되는 모임이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70명 수준의 모임으로 커졌고, 사람들이 모임에 참여하는 표정이 달라졌다.

아침에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하러 모이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새벽기도 밴 운전을 했고, 그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는…
어제 언급한, 한국 제주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기면서 외국인 학생들과 학생들을 섬기는, 코스타 강사로 섬기고 있는 팽동국 교수,
KOSTA 찬양인도도 하고… 작곡도 하고… 한 박성호 목사,
“내려놓음”의 저자인 이용규 선교사
등등이 있었다.

모임을 섬기면서, 나의 부족함에 답답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간장종지같이 부족한 내 믿음에… 나이아가라 폭포같이 쏟아지는 은혜에 감당할 수 없어 정말 많이 울었다.

97년에는 몇몇사람들이 바람을 잡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만 60명 정도의 사람이 함께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후, 섬기던 청년부는 더 생기를 얻었다.

나의 코스타 이야기 (2)

95년 8월20일에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았다.

나는 스스로 ‘학생사역자’라고 자처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참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참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녔던, KOSTA 초기 시작에 연관이 있으셨던 어떤 유학생 출신 선배님이 보스턴에 가면 자신이 섬기던 성경공부인 Gate Bible Study 라는데를 한번 가보고 섬겨봐라, KOSTA에도 가면 좋겠다 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나는 KOSTA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어쩌어찌하다가 Gate Bible Study도 그 당시에 바로 join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첫 일년, 많은 감사한일들이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참 고갈되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자꾸 내가 진이 빠지는 것과 같은 교회 청년부 섬김, 나의 얄팍한 신앙의 깊이 등등의 이슈가 내게 있었다. 그리고 참 영적으로 외로웠다. 동역자를 잘 찾지 못한채 많이 지쳤다.

그러던중 96년 여름에 처음 참석한 KOSTA 집회는 내게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96년 집회에 참석하기 전, 당시 내가 많은 신앙의 도움을 주던, 내 믿음의 형이자 동역자인 팽동국 형과 함께 미리 집회를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제를 미리 묵상하면서 관련된 이야기들도 나누고 그랬다.

일주일간의 집회 내내 거의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울었다.
나의 부족함이 답답해서 울고, 외로움이 서러워서 울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울고, 여전히 나와 이 시대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격해서 울고, 이렇게 많은 동역자들이 있구나 하는 사실에 흥분해서 울었다. 아예 전체집회 장소에는 큰 세수수건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이것이 내가 KOSTA를 처음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나의 코스타 이야기 (1)

내가 KOSTA 라는 것을 처음 들은 것은 91년.
당시 한국의 대덕 연구단지에서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대덕 연구단지의 특성상,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로 부터 KOSTA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당시, 송인규, 서재석, 방선기 같은 분들이 편집위원이었던 계간지 “그리스도인과 학업” 이라는 잡지도 참 흥미롭게 보았다.

92년엔가…
그 당시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에 KOSTA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죽해야 그 기사를 몇부 copy해서 몇사람들에는 나누어주기도 했고… 나 자신도 잘 간직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그 KOSTA를 섬기게 될 줄이야…

(이번 한주 동안, 내가 경험한 KOSTA 이야기를 5번에 나누어 써보려고 한다.)

허둥지둥 바쁘게 사는 것 vs. 부지런하게 사는 것

내가 쫓겨서 살고 있는것과 (being hurried)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같이 느껴질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차이는 때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적용하는 기준은,

내 아내로부터의 전화를 반갑게 받느냐, 그 전화를 급한 마음에 받고 건성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쁠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전화를 반갑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게 바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전화 조차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쫓겨서 허둥지둥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2004년 7월에 다음의 글을 쓴것을 발견했다.
그러부터 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의 상황도, 나 개인적인 깨달음과 성숙도 전혀 발전된 것이 없어 보인다.
가슴이 아프다…

=====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장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을 그 사람의 참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관점에서보면 이것은 그 사람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이기도 하다.

궁지에 몰려있는 사람의 그러한 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어떤 이는,
일시적으로 그러한 궁지에 몰리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몰려서 살게되기도 한다.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최근… 내가 어떤 사람을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으로부터의 공격적 (정확하게는 방어적 defensive) 반응에 처음엔 기분이 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원인이 내게 있는 것 같아서…)

엄살은 이제 그만…

최근,
블로그에서 바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보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했나?

만나는 사람마다 나보고 바쁜데 괜찮냐고 묻는다.

사실… 최근 한 두어주…  상당히 안바쁘다.
회사일도… sample이 없어서 실험이 꽤 한가한 편이고,
코스타일도… 생각보다 괜찮고…

오히려 나름대로 시간이 꽤 괜찮은데…

진짜 엄살을 너무 많이 떨고 살았나보다… ^^

People to Love, People to Work with

내 심각한 인격적(?) 결함 하나.

나는 사람과 사귀어 가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나와 함께 일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오히려 약간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더 마음을 쓰고 care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막상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쉽게 neglect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이러한 결함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물론 내 가족이다. 특히 내 아내.

내가 좀 더 성숙해 가면서…
내게 가까운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더 깊이 인식하는 전환이 더 많이 일어나길

내 동생

나와는 1년 3개월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있다.

엄청

똑똑하고, 능력있고, 예쁘고… ^^ (키가 좀 작고, 잠을 좀 많이 자긴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서울의대 교수이고…

지난 1년동안 미국에 교환교수로 있다가 최근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는데
여기 있는 1년동안 마음을 많이 쓰지 못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린다.

나는 중학교 졸업이후 집을 떠나와서 내 동생과는 지난 25년동안 한집에서 살지 못한 셈인데…
지난 1년이 어쩌면 내가 더 내 동생에게 많이 마음을 쓸 수 있는 기회였을 텐데.

오늘은,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의 생일이다.

올해는 유난히 동생의 생일이 내게 기쁘다.
하나님께서 내 동생이 어렸을때 부터 그 작고 똘망똘망한 어린 여자아이를 보시면서 기뻐하셨을 그 기쁨이… 왠지 더 느껴진다.

지난 세월 내 동생을 붙들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더 tangible 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