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극 동아리 실패담

1.

대학때, 나는 연극을 꽤 열심히 했었다.

시간만 나면, 대학로를 다니면서 연극 대본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고,

극단에 찾아가서 한수 가르쳐 달라고 해서, 연극 배우가 직접 학교에 와서 연기 지도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기본기에 충실하게 연극을 배웠다.

발성법, 무대 동작, 소품 만드는 법 등등…

2.

나는 학교가 신생 학교여서, 전통이라는게 없었다.

동아리도 뭐 그냥 몇사람이 모여서, 우리 동아리 만들자 하면 만들게 되는 거였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같은 활동을 하는 여러개의 동아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연극도 두개의 동아리가 생겼다.

우리가 속한 A 동아리는, a 과학고 출신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고,

우리 라이벌 B 동아리는, b 과학고 출신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다.

이 두 동아리는 분위기가 꽤 달랐다.

우리 A 동아리는, 연극 자체에 집중했다. 소위 본질에 집중한 거다. ^^

연극에 대해 토론도 하고, 연극을 차근차근 열심히 배웠다.

옆 B 동아리는, 함께 몰려다니며 엄청 술을 마셨다. ^^

그러다보니 솔직히 그쪽에서 올리는 연극은… 살짝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다.

우리는 그게 늘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본질에 충실한, 연극을 더 잘하는 그룹이라고.

3.

우리 A 동아리는 그런데, 계속 a 과학고 출신들이 들어왔다.

거의 a 과학고 동문회 분위기의…

그러다보니, a 과학고에서만 통하던 농담 그런것도 많이 하고… 

점점 a 과학고 출신 아닌 사람들은 들어오기가 좀 힘든 모임이 되어갔다.

B 동아리는,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뭐 술마시고 노는게 큰 일이었으니.. 당연히 오디션 같은거 보더라도 문턱도 낮았고, (우리는 오디션 진짜 깐깐하게 했었는데… ㅎㅎ)

2년 정도가 지나자 b 과학고 색깔은 거의 없어졌다.

4.

내가 학교에서 졸업한지 벌써 20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

지금 찾아봤더니, A 동아리는 아마 버얼써 없어진 듯 하고, B 동아리는 아직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본질에 충실했고, 나름대로 그것이 자랑스러웠으나…

쪼그라들어 소멸했고,

저쪽은 기초도 부족했고, 우리는 그것을 우습게 여겼는데…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

(기독)운동, 교회, 회사, 가치, 사람 등등을 생각하며…

나는 내 실패담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요한 것 보다 더 망가진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소위 ‘갑’ 이다.

이게 보통 갑이 아니고, 완전히 울트라 짱 수퍼 갑이다.

이 회사가 가지고 있는 cash가, US government가 소유하고 있는 cash보다도 많단다.

이 엄청난 돈의 힘으로, 정말 무지막지한 권세를 휘두른다.

그러다보니, 나 같은 엔지니어에게도 꽤 큰 파워가 있다.

가령, 내가… vendor들에게 이야기하는 말투는 이런거다.

“내일 아침 몇시까지 무슨 데이터를 준비해서 보내라. 이번 데이터는 매우 중요한거다. 지난번 처럼 빼먹는 것 없이 꼼꼼하게 해라.”


vendor들이 나에게 하는 말투는 이렇다.

“우리가 논의해보니 이런것들이 위험요소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을 부탁한다.”

“원하는 데이터를 바로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여기 요청한 데이터를 보낸다. 검토해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더 요청을 해주길 부탁한다. 이렇게 함께 일할 수 있어 기쁘다.”



관계가 이렇게 되어있다 보니,

vendor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아주 가관이다.


vendor들은 잘 대해주면 안돼. 걔네들은 하루에 한번씩 혹독한 이메일로 독촉을 하고, 이틀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서 따져야 일을 제대로 한단 말이야. 

뭐 이런 식의 태도를 아주 흔히 접한다.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힘이니까..

그 돈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구조가 되기 마련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 어그러진 구조 속에서 살아 가면서,

적절한 수준으로 망가지는 법이 거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이…

망가진다.

이렇게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복음이다.

신명기를 읽어내려가며 생각한 한가지

요즘 내 QT 본문인 신명기는,

노예로 수백년간 살았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이드해주는 모세의 설교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백성이 어떤 모습인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원하셨고,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들어나 있다.

그런데,

신명기를 읽어내려가다보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진보적 지식인이 동의할 만한 내용이 참 많이 나온다. ^^

사람에 대한 배려, 생명에 대한 존중, 생태계 보호,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 등등.

OK…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자세와, 

샌프란시스코의 진보적 지식인이 살아가는 자세가 이렇게 비슷하다면…

무엇이 그 둘을 다르게 만드는 걸까?

결국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과 자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반면,

샌프란시스코의 지식인은, 그렇게 살아감으로서 얻어지는 결과/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삶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결국 이 땅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자세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 이후는 하나님의 몫이다.

진보적 지식인에게 있어서는,

건강한 삶의 자세들을 통해 결국 원하는 목표를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한다.

따라서 삶의 자세는 목표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과정은 그 의미가 심각하게 diminish 한다.

….

소위 ‘지식인’ 이라는 부끄러운 옷을 입은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보다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고자 하는 때가 자주 있는 듯 하다.

기독지성인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은,

우리 삶의 열매를 우리 힘으로 맺고자 하는 욕심이 아닐까 싶다.

삼위일체?

음…

이거 잘못하면 이단 삼단으로 몰릴 수 있는 언급이긴 한데…

최근 ‘삼위일체’ 라는 것이 과연 기독교의 핵심 교리여야 할까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만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급’의 Godhead가 아니라면 어떨까?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의 ‘신성'(divinity)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접근과 점검이 필요할 것 같은데,

특별히 구원론적 차원에서, 기독론적 차원에서 이 내용이 많이 궁금해졌다.

이런 종류의 건강한 debate이 있는 자료등이 어디 있을까?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ㅎㅎ)

아는 얘기를 또 듣는 이유는?

지난 토요일 아침,

나는 인터넷에서, NT Wright에 대한 강의 하나를 들었다.

내가 그걸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아내는,

그거 다 아는 거 아니냐고, 저 정도는 당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음…

뭐 내가 그분만큼 강의를 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아는 것이긴 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걸 그렇게 듣고 있었을까?

그걸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음… 다음의 몇가지 관점에서 그 강의를 들었던 것 같다.

–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강사가 얼마나 잘 정리하는지 (강사의 강의 능력 평가랄까..)

–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 지식에 대한 재 확인/검증

–  혹시 내가 그런 비슷한 류의 강의를 한다면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하는 것에 대한 idea 수집

…결국 나는,

그 강의를 통해 어떤 새로운 것을 더 배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내가 설교를 듣는 자세도 그런 것이 아닐까 반성을 해본다.

내가 설교를 그런 자세로 듣지 않으려면 다음 몇가지 가운데 한가지 부류여야 한다.

– 설교자가 늘 내게 새로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쳐 준다.

– 설교자의 통찰이 늘 많이 앞서 나가 있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 깊이에 반복해서 감동한다.

– 그렇지 않으면… 설교가 communal 한 것이어서, 함께 공동체가 마음에 담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위 설교 잘하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쉽게 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설교가 communal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의 신비

몇주전,

이 동네에 사는 ‘하늘나라 동창생’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이 ‘생명에의 신비’를 깊이 느끼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러워한적이 있었다.

깊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생명에의 경외, 생명을 사랑함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내 자신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보면…

내게는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형편없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내 self-assessment 였다.

그러부터 몇주가 지나면서 계속 나는 그 생각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여전히 나는 그로부터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집에 들어온 개 한마리를 보면서,

뭔가 생명을 신비롭게 여기는 ‘기운’이랄까 그런게 조금씩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버려져서 몇년동안 길거리에서 사는 동안,

쓰레기통을 뒤져서 연명을 했을 테고, 쥐 같은걸 잡아 먹었을지도 모르고…

하여간 나름대로 tough한 삶을 살았을 이 친구를 보며…

그리고,

이제는 우리와 많이 친해져서 재롱도 피우고 꼬리도 흔드는 모습을 보며…

아… 저 작은 몸안에 있는 생명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

세월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과정은,

그저 작은 improvement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대형 공사가 필요한 작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Shallow Passion?

예전에 이 블로그에 쓰기도 했지만,

나는 한때…

내 나름대로는 ‘주님을 위한 열정’을 주체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복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혼자 아무도 없는곳 까지 차를 타고 가서, 차 안에서 소리치며 기도하고 복음을 외쳤을 때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주님과의 동행이 길어지면서…

그때 그 열정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을 위한 열정이었다고 백보 양보해서 인정을 한다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시시콜콜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외쳐야’했던 ‘불’이 마음 속에 있었다면…

요즘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 그리 쉽게 밖으로 뿜어져 나오질 않는다.

우선,

내 한계에 갖혀 경험한 주님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이고,

또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것을 다시 시시콜콜 풀어내는 것이 너무 천박하다고 느껴진다고나 할까.

신앙의 영역에서 경험한 초월과 신비가, 언어로 표현되면서 마치 식어버린 군만두 같은 느낌을 주게되는 것 같다.

한편…

내가 shallow한 passion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으로부터 grow 했다는 것은 기쁘고 감사하지만,

또 한편…

주님의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뼈가 녹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예레미야의 passion이 네게 어떤 모습으로 자리해야 하는 걸까 하는 해답이 없는 것은 혼란스럽다.

참…내…

이만큼 주님을 믿고 따랐으면 그래도 좀 어느정도는 통달(?)할 수 있는거 아닌가.

아니 주님께서는 가끔 한번씩… 내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붙들었던 것을 확~ 흔드시면서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시는데…

이거 참… 

주님이 도무지 내 장단을 맞춰 주시지 않으니,

내가 주님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마주치신 본문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하나 떠나가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이 본문을 생각해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시기 전에,

먼저 그럴 정죄하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군중을 향해,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먼저 돌을 놓고 돌아가게 만드신다.

교회 내에서도,

정말 정죄가 난무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저 상황의 피해때문에,

억울한 사고 때문에,

능력의 부족 때문에…

혹은 이런 것들의 조합으로, 

많은 정죄를 받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받는 정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너무나도 자주, 내가 정죄하는 입장에 서곤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너무 나도 자주.. 그냥 automatically 정죄라는 못된 버릇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

정죄의 피해자들에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당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제 안에 있는 못된 악의 습관이 나와서, 당신을 정죄하는 것 같이 반응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제 잘못된 자아 입니다. 사실 그놈은 벌써 죽은 놈인데… 가끔 그렇게 발악을 하곤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정말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주님, 제게… 정말 죄가 없다면 그 사람을 돌로 쳐라 라는,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제게도 좀 아프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옛 자아 라는 이 못된놈이… 자꾸만 정죄라는 죽음의 카드를 빼어 들곤 합니다.

이렇게 요청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요즈음,

주님께서 그런데 정말 그 질문을 던지신다.

“네가 정말 죄가 없느냐?” 

나는 

허걱… 

저는 당신을 수십년간 믿어 왔고,

당신을 위해 헌신했고,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질문을…

“너는 죄가 없느냐?”

아…

음…

아….

음… 주님…

….

그렇게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저는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주 아주… 제 자신으로 봐서는 소망이 없는…

그 질문을 깊이 이렇게 받고서야 비로소,

제게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정죄의 나쁜 습관이 약간 치유되는 듯 합니다.

Do I miss Boston? Sure I do!

최근,

보스턴의 어떤 회사로부터 올 생각이 없느냐는 요청을 받았었다.

사실은 회사라기 보다는,

내 예전 직장 상사였던 사람이 보스턴의 어떤 회사의 부사장으로 가면서 나를 자기 팀에 불러오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쪽으로 이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래 저래 보스턴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되었다.

내가 보스턴을 그리워 하는 걸까?

지금쯤 보스턴은 막 단풍이 시작하려하는 시즌일테고,

찰스강가에는 초가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때, 던킨 도넛 헤이즐넛 커피는 더욱 맛있게 느껴질 테고,

아참… 금년에는 Fenway Park에서 Red Sox 경기가 10월 내내 열리게 되겠지!

바닷가에서 사먹는 clam chowder, 

Rock port 해안가의 예쁜 상점들과 작은 등대,

별로 friendly 하지 않은 보스턴의 지하철 T.

음… 

보스턴이 그리운건 정말 맞는 모양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다 난다.

보스턴에서 나보고 오라고 하는 그 사람은,

너를 불러오는건 내가 괜히 이기적인 욕심은 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며… 

이야기했지만,

지난 한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는,

내가 보스턴으로 훌쩍 이사가고 싶어하는 것은, 

내 이기적인 욕심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든것도 사실이다.

I surely miss Boston a lot! 🙂

가슴을 뛰게 했던 clip

예전에 youtube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는데,

예전에 왜 미국이 위대한 나라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미국에서는,

양당이 government shut-down을 놓고 chicken game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파렴치한 보수정파와, 무능력한 진보정파가 맞서도 있는 상황.

Liberal과 Conservative의 frame이 몹시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즘… 다시 한번 생각을 자극하는 clip.

(이 앵커의 comment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의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대화가 될 수도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