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 vs. 자질

새 회사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서 일하고 있는 product가 4~5개 된다.
그중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많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워낙 많은 product를 만드는일을 아주 적은 사람의 사람들이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만들고 있는 product가 워낙 신기한(?) 것들이어서,
이것을 위해 개발되어있는 재료나 process 같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내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인데도,
내가 ‘전문가’가 되어서 문제를 급히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의 task들을 해 내는데 꽤 근사하게 일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A 회사에 있었던 1년의 기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직장에서는 모두 이런 식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전문가 코스프레를 해야만하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대충 전문가가 되어버리는.

나는,
어떤 조직 등에서 사람을 뽑을때,
어떤 사람이 가진 specialty를 보고 뽑는 것 보다,
그 사람이 가진 ‘자질’을 보고 뽑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질에는,
분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훈련)
새로운 challenge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
creative하게 생각하고 접근하는 자세와 능력,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의지
등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이것은,
회사와 같은 이익조직 뿐 아니라,
non-profit organization에도 적용되고,
심지어는 교회의 리더십이나 기독운동의 일꾼들을 세우는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아, 물론 교회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질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포함되겠지만)

오랜 동역자의 외로운 싸움

어제는 참 오랜만에 보는 한 동역자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
나름대로 미국에서 함께 30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벌써 한국에 간것이 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스턴에 있었고, 그 형제는 뉴헤이븐에 있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막상 함께 만나는 곳은 늘 코스타였다. ^^

사역을 위해서 만났어도,
만나서는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 나라, 성경, 신앙,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많이 외롭다고 느끼고 있을때,
그렇게 함께 만나서 섬기며 토론하고 논쟁하고 배울 수 있었던 fellowship은,
내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어제 교회에서 했던 것은 아주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 나눔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에서 너무 혼자서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참 가치있다고 생각도 되고,
그걸 참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정말 허허벌판에서 혼자서 창 하나 들고 대군과 맞장뜨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누가 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악의에 찬 공격들을 받아가며 힘들어할때 그것을 함께 견디도록 힘을 주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찌 그 동역자만 그렇겠나.

사실 젊은 시절에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기도하며 토론하며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흩어져서 다들 외롭고 힘들게 버텨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예수 믿는 다는건 다 그렇게 외로워야 하는 걸까.

우리 우교수님의 건투를 빈다.

잘난 사람들?

새로운 회사에 와서 보니, 정말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회사에서 자주 보는 어떤 허름한 아저씨가 있어서 그냥 친절하게 인사하면서 지냈는데,
오늘 알고보니.. Stanford 공학박사에다가, UCSF에서 의학박사(MD)를 받았다.
그리곤 완전 유명한 회사들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가 여기 와 있다.

어떤 hardware engineer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인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Stanford 심장외과 교수에다가 Stanford 의대 무슨 director 그런거 하다가 여기 왔단다.
이 사람은 MIT에서 전자공학 석사하고, Stanford 의대 나오고, Harvard 의대에서 전문의 하고, Harvard에서 뭐 석사 하나를 더 했다.

Harvard 의대 꽤 유명한 스타 교수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고, (이 사람 이야기는 신문에도 났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Yale에서 MD 받고 Harvard에서 석사한것 말고 다른 박사는 더 없는 것 같다 ㅋㅋ

또, 어떤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 꽤 똘똘하다 했더니 벌써 회사를 두개나 차려서 CEO를 했던 경험이 있고,
(물론 그거 잘 안되었으니 여기 와 있겠지만)

University of Washington의 tenured professor 였는데 그거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고,

Google VP 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대학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서 일해왔던 사람도 있고,

중국에서 2류쯤 되는 학교 학부만 졸업하고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별로 유명하지 않는 대학원을 다니다가 학위를 마치지 못한채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뭐 물론 다들 ‘잘난’ 사람들이겠으나, (그리고 실제로 얘기해보면 참 잘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되지만)
그렇게 ‘잘난’ 것이 그냥 학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 참 보기 좋다.

아이비리그 박사학위가 두개 있는 사람하고 대학 중퇴한 사람이 맞장뜨는 직장이어서 참 좋다. ^^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인’들이 물론 많이 있긴 하다. ㅎㅎ

비종교적 기독교 (7)

성경에 나와있는 어떤 이야기를,
‘해석’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prescription 혹은 명령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성경적 원칙’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참 단순하고 쉽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저 단순한 ‘명령들’을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뜻을 작은 box 안에 가두어버리면 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칙’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전형적인 종교의 특징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떤 frame 혹은 box 안에 가두어버리려는 시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따위는 귀찮은 것이다.

그냥 원칙만 지키면 되니까…
그냥 고민하지 않고 지키면 내게 면죄부를 주니까…

바로 그런 차원에서 나는 지금 내가 이 시리즈에서 쓰고 있는 이러한 접근을 ‘비종교적’ 기독교라고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명

지난 주말에,
후배 간사 몇 사람에게 좀 긴 이메일을 보내면서 사랑이 없는 사명에 대해 잠깐 이야기 했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자신을 dry하게 만들고, 급속히 burn-out 시킨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인정에 매달리게하고,
쉽게 실망하게 하고,
인내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랑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드는 힘을 공급해 주지만,
사랑 없는 사명은 점차 그 사명을 감당할 힘을 고갈시킨다.

사랑없는 사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지만,
사랑은 사람들을 사람으로 대하게 한다.

사명으로인해 지치는 사람은 있지만,
사랑으로 인해 지치는 사람은 없다.

낙망하고 지치는 이유는,
사명이 흐릿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 이메일에다가 뭐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써보려고 했으나,
잔소리가 되는 것 같아 말았다. ^^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기가막히고 감탄하게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식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역자들이 되면 참 좋겠다.

Tangible한 도움을 주는 일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나서,
나를 몹시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공부하는 ‘재료공학’이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데 기여한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이걸 열심히 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유익이 간다거나 그런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의 직접적인 열매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나는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정말 전공을 바꾸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게 대학교 3학년 때 였으므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여태껏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냥 가보자… 이렇게 그냥 결정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정말 내 적성에 100%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은 더 없어갔고, 석사과정 2년차때에는 그 회의가 극에 달했었다.

그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모든 tangible한 열매를 다 내가 맺도록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쩌면 불합리한 생각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내 적성에 딱 들어맞지 않는 이걸가지고 결국 박사까지 받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 새 직장에서 하는 일은, 정말 이 product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들이다.

당뇨병, 뇌전증(간질), 심장질환, 우울증, 시각장애 등 여러 분야의 질병이나 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정말 내가 만드는 이 제품이 바로 어떤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상태를 계속 monitor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 그렇게도 내가 바랐던 ‘tangible하게 사람을 돕는 일’을 마침내 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인한 excitement가 내게 별로 크지 않다.

왜 그럴까?

어쨌든 내게 허락된 이 값진 일을 하면서, 그 일의 효과와 결과와 consequene들을 깊이있게 생각하는 일들을 더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수렁에 빠졌을 때 말씀 묵상

1.
깊은 수렁에 빠져 있을때,
그래서 혼자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닐때,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2.
혹시 그 상황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나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3.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고 엉뚱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려움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셋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세가지를 분별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기르고,
나 자신을 좀 더 자라도록 이끌지만,
그저 좀 ‘제 정신’을 찾도록 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게 말씀 묵상이 없었다면,
그나마 이 정도 정신차린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새해 소망

새해에 약간 긴 시리즈의 글을 쓰느라,
새해 소망, 새해 결심 이런거 하는 글도 쓰지를 못했다. ^^

그런데 사실,
내 새해 소망은 ‘소망’이다.
혹은 ‘희망’이다.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망’을 깨닫게 되면 좋겠다.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진 그 ‘희망’을 발견하게 되면 좋겠다.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remind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작년보다 조금 더, 조금 더,
우리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따르고 싶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그 ‘사랑’이 유난히 마음 깊이 담긴다.

Urbana 2015

인터넷에서 중계되고 upload되고 있는 Urbana 집회의 설교들을 듣고 있다.
혼자서 들으며 눈물도 흘리고, 회개도 하고…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한가지는…
그래도 참 미국 교회가 부럽다.

Francis Chen이나 David Platt같은, 신학적으로 ‘많이 보수’쪽에 있는 사람들의 message가 참 건강하게 빛난다.

여기는 정말 이렇게 건강한 보수적인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으니.
한국 교회의 세팅에서는 건강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것만 같이 느껴질때가 있는데…

뭐 신학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정말 무엇보다도 내 젊은 시절을 지탱해준 그 ‘보수신앙’의 외침이 fat 없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참 한편 감사하기도 하다.

부디, 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순전하게 헌신하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싼타마스? 크리스마스!

예전에 보스턴에 살때, 다음과 같은 글을 쓴적이 있었습니다.. 2002년에 쓴 글이니, 벌써 10년이 훨씬 지난 글입니다.
우리 민우에게 크리스마스가 정말 upside-down kingdom이 도래했다는 뉴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글쎄 정말 그런지 자신이 없습니다.

제 허접한 블로그에 가끔씩이라도 들려주시는 분들께 모두 성탄인사를 올립니다~ ^^
며칠동안 이 블로그 update도 좀 쉬겠습니다.
모두들 우리 주님의 탄생의 기쁨이 마음 한 가득 담기는 성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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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결혼한지 4년만에 처음으로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살고 있는 집이 워낙 좁아 트리를 놓을 자리도 없었고, 그리 비싼 것은 아니지만 트리를 장만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결혼을 한지 1년만에 낳은 – 이제 세돌이 막 된 – 딸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을 쉽게 집안에 들여놓기 어려웠던 터였다. 그러나 금년엔 이제는 조금씩 사리분별을 하는 아이의 정서를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더욱 드러나게 기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인공 소나무 하나를 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장식품들이 문제였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훈련을 시작한 딸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크리스마스 트리인 만큼 정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들을 달고 싶었다. 반드시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들로만 장식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크리스마스 정신(spirit)에 맞는 장식을 하고 싶었다. 하나씩 장식을 걸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살박이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식품들을 하기 위해 가까운 백화점이나 할인 매장등에 갔을 때 우리는 정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저 반짝이는 전구들, 가짜 눈, 반짝거리는 금줄, 눈사람, 산타 클로스, 루돌프, 호두까기 인형 등은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정말 예수님의 탄생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장식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곤, 크리스마스 트리의 맨 꼭대기에 다는 별과, 일부 천사의 날개(?)를 단 눈사람 장식들이 전부였다.

결국
우리는 제법 떨어진, 작은 기독교 서점에 가서 아주 빈약한 장식 몇 개를 살 수 밖에 없었다. Joy 라고 크게 써 있는 반짝이가 박혀있는 글자 장식과 천사 장식 몇 개… 그 가운데 내 시선을 붙들었던 장식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한쪽에 있고, 그 반대 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트리를 받치고 있는 장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은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 하고 있지만 사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비교적 단순하고 작은 장식이었지만, 나는 그 장식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예수님의 생일에, 다른 화려한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지는 장식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구석의 후미진 기독교 서점의 한구석에서라야 이렇게 작은 장식을 찾을 수 있는 현실. 어쩌면 산타클로스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구석에서 찾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내 자신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아도 그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기대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끼리 따뜻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말 밥통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보겠다는 결심은 별로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 교회에서도 함께 윷놀이를 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에 대한 감격으로 함께 끌어안으며 감격해 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

어느덧 모든 사람들에게 ‘싼타마스’가 되어버린 이번 ‘크리스마스’엔,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기뻐해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으시면서 (upside-down) 태어나신 왕께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를 마음껏 드리는 크리스마스를 갖고 싶다.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내 사랑하는 딸이 후에 성인이 된 후 기억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것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