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는 삶과 경험하는 삶

‘삶’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20대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삶을… 나는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든… 절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지난 10여년 동안 참 깊이 경험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그런 모델이 아닐까.
그분이야 ‘알기’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테지만,
우리에게 그런 삶의 자세와 모델을 보여주시려고.

나의 가치, 나의 행복

내가 스스로 매우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록,
그것만큼 나를 무가치하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무가치 함을 가슴깊이 인정할 때야만 비로소 내가 가치있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행복함을 추구할수록,
그것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스스로 superficial한 행복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품으면,
비로소 내가 행복해 지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얼마나 내가 성숙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 가운데 어떤 쪽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95% 이상의 관심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지만,
점점 성숙해 가면서 그것 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길까 하는 것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

내가 보는 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

1. 내 professional field에서
나는, 내 지도교수가 나를 underestimate 한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지도교수가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는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의 성향과 내 성향의 차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내 지도교수에게 (아니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100% convice 시키지 못하면 정말 많이 답답하다.

2. Christian environment 에서
사람들이 나를, 실제 나보다 훨씬 더 괜찮게 본다.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Christian들에게는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문화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포스트모던 세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소위 ‘신세대’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특징은 포스트모던적이고.

오랬동안,
나는 내 모더니즘식 접근법이 ‘정공법’이고
포스트모던적 접근법은 ‘꽁수’라는 생각을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tool은 모더니즘식 논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복습

요즈음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배웠던’ 기초 개념들을 복습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나 내가 그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고 있는지 깜짝깜짝 놀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것,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조절하셔야 내가 안전하다는 것,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것…

내 삶이 나를 지치게 만들때,
내가 돌아가 휴식할 유일한 ‘그곳’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자꾸 깨닫는다.

그것 없이… 세상을 뒤집겠노라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 하겠노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겠노라고… 방방 뛰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1990년에 나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바로 그 모습을 꼼꼼하게…
‘복습’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자주 눈을 감자

나는,
유난히 ‘번잡한’ 사람이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하다못해 그것이 web surfing이든, 전자오락이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오늘부터는,
자주 눈을 감는 훈련을 해보려 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

점심 시간에는 적어도 10분 정도씩 나만의 아지트에서…
내 말을 쏟아놓는 기도가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하나님과 함께 앉아있는 그런 시간을 가지려한다.

약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적어도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다소 편애가 있다고 보일 정도로….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강자의 웃음보다는 약자의 눈물에 더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너무 ‘강자’이다.

이런 시각에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내 강함을 정말 <<completely>> 약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일까.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거기 우리 집에선 우리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테고,
거기 우리 집에선 이런 서러움 따윈 없을꺼야…


한 6년 쯤 전에(-.-) 제가 제 이메일(?)의 시그니처로 썼던 문구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유학 생활이 그렇게 힘드냐고…
뭔 시그니처가 그렇게도 서럽냐고 하더군요.

유학생활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사실… 정말 ‘거기 우리집’ 이외에 정말 ‘서러움’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일로 눌리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할 때,
역시 유일한 안식처는… ‘내 아버지’ 뿐이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네요.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