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고백, 깊은 생각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하는 짧은 고백들 –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 드립니다. 등 -을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믿음이 어릴땐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그냥 그 고백들을 입에서 하는 것으로 내가 그렇게 산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찬송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짧은 믿음의 고백들이 진정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내것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진통이 필요한지…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이,
내 믿음의 고백들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길 기도한다.

New Year’s Resolution

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2: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2:3 Endure hardship with us like 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2:4 No one serving as a soldier gets involved in civilian affairs–he wants to please his commanding officer.
2:5
Similarly, if anyone competes as an athlete, he does not receive the
victor’s crown unless he competes according to the rules.
2:6 The hardworking farmer should be the first to receive a share of the crops.
2:7 Reflect on what I am saying, for the Lord will give you insight into all this.

불확실한 미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사람을 매우 유치하게 만드는 것 같다.
무엇이든 붙잡으려하고, 어떻게든 확실함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함을 의미하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는 기대를 의미한다.

나는,
내 미래가 불확실한 것에 감사한다.

단 한번 만이라도

나는 유난히 이 말이 참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내 일생에 단 한번 만이라도…

때로는,
그 소망이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내 일생에 단 한번 만이라도… 식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어차피 일회적이니,
단 한번 만이라도 라는 표현은 인생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내게,
‘단 한번 만이라도’ 라고 이야기할 소망과 기도는 무엇이 있을까.

I Love You, Have a Nice Day!

아침에 민우를 교실에 데려다 주고는,
꼭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해주고 볼에 뽀뽀를 받고나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Edith, I love you. Have a nice day. See you in the afternoon!’

오늘은 민우를 그렇게 데려다 주고 나오면서 문득…
어쩌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벙하게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해 주시고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승아, 너를 사랑한다. 멋진 하루가 되거라! 그리고 오늘 하루도 너와 종일 함께 있을께.”

민우는 제가 아침에 꼭 안아주는 것을 하고 나서야 학교 교실로 힘차게 뛰어갑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안아주시면서 삶의 현장으로 저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민우가 저로 부터 받는 포옹에 힘과 자신감을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그 포옹을 받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저의 하루를 힘차고 신나게 만드는 것이겠죠. 문제는 제가 그걸 자꾸 잊는다는데에 있지요.

권리를 위한 삶과 소명을 위한 삶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조롱당하시면서…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을 묵상해보면,

그것처럼 unfair 한 재판이 또 있을까 싶다.
창조주께서 피조물로부터 공평하지 못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런 부조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순간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 ‘부조리한(absurd)’ 상황을 받아들이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의 자신의 ‘권리(right)’보다 ‘소명(calling)’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는 지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문화인 것 같다. 특히 미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인가!

그런 사회 속에서,
소명을 위해 권리를 포기하면서 사는 삶은…
또 다른 Contra Mundum (세상에 대항하여) 의 한 모습이 아닐까…

구호와 노래와 깃발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함께 외칠 구호가 없고,
함께 부를 노래가 없고,
함께 흔들 깃발이 없다고.

그래서 이들이 방황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런데,
복음 안에서는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흔들 깃발도 모두 있지 않은가!

정말 이것을 위해 내 삶을 완전히 다 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으리라.

Risk-taking faith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risk-taking 하는 측면이 있다.

므나의 비유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밑천을 그냥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낸 종들을 책망한 것은,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는…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한 것에대한 책망의 성격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하고,
risk taking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이 책망한 것이다.

내가 주위에서 보는 많은 ‘지식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아주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이지!)

안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과감함’을 포기하는 자세.
정말 ‘믿음’을 가지고 risk-taking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고 재고 따져보다가 결국 ‘안전함’을 선택하는 자세.

오늘 아침 말씀 묵상에서,
주님께서 내게 하신 책망이자 격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