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 관한 생각을 3-4 페이지 썼다가 지웠다.

내 신앙과 삶에 가장 영향을 크게 끼친 분 가운데 한분인, 어떤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가 떴다.
(내가 조선일보 기사를 링크하게 될 줄이야. ㅎㅎ)

이 기사를 읽고나서,
이 블로그에 올릴 생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3-4 페이지 정도 써내려갔다.
정말 쓰고 싶은 생각들이 많았다. 3-4페이지의 글을 한번도 쉬지 않고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닥 소리가 나게 키보드를 치며 써 내려갔으니까.

그런데,
그 글을 써내려가다… 내가 그 글을 써서 올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 기사에대해 어떠한 말도 덧붙일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매우 바쁘고 혼란스럽고 기쁘고 힘들고… 하여간 복잡했던 주말

지난 주말은,
정말 몹시 정신없었다.

금요일 저녁, KCF의 개강 파티가 있었다.
(내가 준비해야하는 일은 뭐 없었지만, 늘 내 마음과 생각이 많이 가는 사람들이므로)

토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이 하나 있었다.
이 모임에선, 내가 주제넘게…
몇가지 issue들에 대한 짧은 presentation을 했다.
개혁주의, 평화주의, 속죄이론, New Perspective 등등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했지만,
함께 다른분들이 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참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들었다.

주일 저녁,
오랜만에 한국에서 온 소똥이 아빠와 함께…
우리 집에서 SF “tribal”(“clan”) meeting을 가졌다.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듣기도 했고,
재미있는 여행보고도 듣고…
함께 음식도 나누고.

지난 주말을 그렇게 지내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또 사람들을 보면서…

산더미와 같은 생각의 숙제들이 내게 쌓였다.
이번주는 한주동안 이 생각의 숙제들을 좀 풀어내어야 할 것 같은데…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뫼비우스의 띠란, 위의 그림에서 보는것과 같이 띠의 안쪽과 바깥쪽의 구분이 없는 띠를 말한다.
최근, 개혁주의와 평화주의를 내 삶의 context에서 생각해 보고 있는데,
분명히 시작을, 내 삶의 영역 속에서 내가 적용하며 살 수 있는 평화주의적 관점으로 삼아 생각을 develop 시켰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문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따라간) 그 생각이 다다른 곳이 개혁주의적인 관점이 되어버리는 것을 경험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갔더니 그 띠의 반대면에 다다르게 되는것과 같이.

내 논리의 흐름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는 그런 역설적인(?) 구조가 내재하고 있는 것일까.

1930년대에 내가 20대였다면…

작년 봄 부터였던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상황을 곱씹어 보면서,
만일 내가 그 시대에 한참 피 끓는 20-30대 였다면,
거의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공산주의자의 역사인식이,
소위 보수적이었던 그리고 친일적이었던 우익보다는 훨씬 더 건강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70-80년이 지난 이후에 그 당시 상황을 역사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산주의의 한계랄까 그런 것이 더 잘 드러나는데…
그 당시의 상황에 함몰되어 있었다면 그것을 보기 참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KOSTA 시카고 집회에서,
홍정길 목사님이 이와 거의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다.
그분이 하신 말씀중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당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매력에 빠지지 않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씀은 참 공감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던 지성인들은 결국 기독지성인이었다는 것.

지금 내가 옳다고 믿고있는 것은 과연 역사 속에서 얼마나 옳은 것으로 드러나게 될까.
지금 내 판단으로 최선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훗날 잘못된 길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런 이유로,
작년 봄 즈음 부터는,
몹시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상이나 생각, 이론이나 주장등에대해 너무 쉽게 흥분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나로서는 그리 쉽지 않을때가 많지만…)

그러한 자세와 생각의 근저에는,
결국 역사의 주관자가 이성이나 계몽주의적 낙관론에 경도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있다.

짧은 고백, 깊은 생각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하는 짧은 고백들 –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 드립니다. 등 -을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믿음이 어릴땐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그냥 그 고백들을 입에서 하는 것으로 내가 그렇게 산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찬송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짧은 믿음의 고백들이 진정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내것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진통이 필요한지…

내 인생의 모든 여정이,
내 믿음의 고백들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