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로부터 배운다? –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전서의 고난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

Disclaimer: 나는 영지주의를 절.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영지주의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참~ 많다.

피조세계가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도 아주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육체’는 그것 자체로 칭송받기에 매우 어려울만큼 죄로 물들어 있는 존재이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 예수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육체’ (혹은 피조세계)에 물들어 있는 죄를 소멸시키시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고난을 통해 그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고, 죄악된 육체를 소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러면 다음의 성경의 내용들이 훨씬 더 잘 설명된다.

– 우리의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개념

– 고난을 통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선이 될수 있다는 개념

– 아무런 자신의 죄와 무관하게 받는 고난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질병, 상황의 변화 때문에 겪는 고난 등등)

혹시 시간이 좀 있다면,

소위 ‘주류’ 신학에서 육체를 악한것으로.. 정말 많이 악한 것으로 여기고, 그 육체의 죄를 소멸하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설명한 입장이 있는지 좀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이런 것에 대해 좀 아시는 독자가 계실른지? ^^

나를 표현하자? – 겸손함이 실종된 시대

facebook을 보면, 셀카가 난무한다.

뭐 굳이 셀카가 아니라 하더라도 먹은 음식 얘기, 여행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등등 ‘자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좀 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깊이 있는 생각과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뭐 내가 쓰고 있는 이 블로그도 다르지 않다. 결국 내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어른 그리스도인이었을 시절만 하더라도,

정말 겸손한 크리스찬을 종종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뭐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유교적 겸손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무익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겸손함.

사람이 완벽할 수 없으므로, 사람의 겸손함 역시 완벽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그런 겸손함을 virtue로 여기고 그것을 더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요즘 정말… 그렇게 ‘겸손한’ 사람 찾기가 참 쉽지 않다.

그중 특히 위험한 사람은,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를 개혁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부류의…  

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다른 옳지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한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내 주장을 펴고,

나를 표현하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균형을 이루어야할 반대 방향의 균형 추가,

현대 기독교에서 상실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내게도 역시 그 겸손이, 진실한, genuine한 겸손이 사라져 버린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찬양

하나의 씨앗교회찬양인도자가, 휴가를 떠났다.

그래서, 졸지에 내가…

지난주일과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주… 찬양 곡집을 뒤적이며… 기타를 치며 혼자 집에서 찬양을 부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아… 이게 참 좋다.

참 오랜만에 내 삶에서 찬양이 살아난 느낌이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따뜻한 분이신 적이 있었나?

내 신앙과 삶의 여정을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분이시라기 보다는,

계속 흔드시고, 훈련시키시고, drive 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처음 접했을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에 사로잡혀 많이 울고 울고 또 울었지만…

그 후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들들 볶으시는 분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깊은 죄의 뿌리를 정말 고집스럽고도 끈질기게 다루시는 하나님.

가끔,

삶이 무겁게 느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아픔을 당했거나,

여러가지 부담 때문에 힘들 때에는…

때로 하나님께서 너무 그렇게 나를 심하게 하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하나님은 “immovable mover” 이신게 분명하다.

꿈쩍도 않으신다.

주변의 많이 힘든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내게 대하시는 것 같이 그렇게 harsh하게 대하지 마시고,

좀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주셨으면…

그런 바람을 좀 가져보기도 한다.

Unread email 278개!

아시아 출장을 가 있는동안,

모든 이메일을 다 읽고 답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얼른 얼른 읽고 넘어가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열흘 남짓 지나는 동안 밀린 이메일이 200개가 넘었었다!

어제 아침 9시 현재, unread email이 278개 였다.

그도 그럴게,

보통 나는 하루에 이메일을 200개쯤 받고, 30개쯤 쓰는 것 같다.

자기 직전까지 죽어라고 이메일들 답을 하고 잠자리에 들고나서 새벽에 일어나보면…

밤새… 보통 이메일이 50개쯤 와 있다. -.-;

아시아쪽에서 실험 데이터 같은 것들을 그야말로 산더미와 같이 보내오는 것이다.

하루에 어떤 때는 미팅만 8개.

식사시간 찾기도 힘들만큼 정신없이 일이 쏟아지는데,

그 일의 대부분은 이메일이다. -.-;

어제(월요일) 하루 종일,

그 208개의 unread 이메일을, 자그마치 10개 남짓으로 줄이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아, 나는 또 오늘 이백여개의 이메일 폭탄을 또 받을 예정이다.

이메일 열기가… 두렵다.

@ 혹시 제게 이메일을 보내셨으나 바로 바로 답을 못 받으신 분들은, 제가 여러분 이메일을 고의로 씹는게 절.대.로.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예수의 십자가 – Mission vs. Love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많은 일을 이루셨다.

이와 관련해서 소위 다양한 atonement theory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 다양한 견해들을 대부분 다 인정하는 편이다.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강조점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 깊이 천착되어 있었다.

악에대한 궁극적 심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등등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번에 아시아 출장 동안 말씀묵상을 하면서는,

어쩌면 지금 내게 더 필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mission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깨어진 피조세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의 완성이라는,

멋진 스케일의 복음이 참 소중하지만…

사도 요한이 많이 이야기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사랑으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다셨다는 것.

예수의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의 mission이었지만…

그러나 또한… 어쩌면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는 그분의 사랑이셨다.

다시 QT를…

아직은 아시아에 있다.

시차 때문에 아침 해가 뜨기전에 일어나서,

밤 12시 넘어서 잠이 들때까지,

계속 일을 하는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감사한것은,

이곳에서 나만의 별도의 office를 하나 마련해주어 나름대로 개인적인 시간을 짬짬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든 일정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일까.

나름대로 의지적으로 QT 안하고, 통독하면서 지내던 것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말씀을 짧게 읽고 묵상하는 QT를 다시 하게 되었다.

마음이, 혹은 영혼이 바짝바짝 메마르고, 주님이 멀게 느껴지고…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에 얼른 그렇게 말씀을 들었다.

아… comforting…

참 신기했다. 

내가 이전 글에 썼던 것 처럼, 이론적으로는 QT를 고집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QT라는 방법론으로 주님과 교제해온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주님과의 교제가 소원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참 어두워지는 경험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국말로 계속 대화해 왔는데,

갑자기 인위적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고 하다보니…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고, 소통도 잘 안되고 뭐 그런 거라고 해야할까.

나름대로 내가 많이 힘들때마다 그래서 이불 밖으로 나갈 힘이 없을만큼 고통스러웠을 때에도,

아침에 겨우 기운을 차려 몸을 추스려서 말씀을 좀 읽고,

내 노트 한페이지~반페이지 정도의 노트를 적어가며 주님과 교제했었는데…

다시 이제는 그 포근함으로 돌아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름대로,

<<QT 안하기>> 의 실험은…

적어도 내게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

지난 주말 나눈 대화중 얻은 몇가지 깨달음

지난 주말에는, 참 유익한 시간을 갖었다.

개인적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우리의 소망에 대해 함께 나누고 한 것들이 모두 좋았다.

그런데, 특히 여러 대화 도중에, 내 개인적으로 참 유익한 것들을 많이 얻었다.

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아직 충분히 passive하지 않다.

작년 가을, 나는 내가 passive하고 vulnerable해지는 연습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거의 일년동안 그 practice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몸에 힘을 빼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2. 나는 여전히 메시아병에 걸려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해야하고,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그 해결사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나는 자유해질 필요가 있다.

3. High-performer disease

40대 중반이 되도록, 끊임없이 high performance를 추구하고 살았다.

공부, 일, 관계, 심지어는 신앙 까지도.

그렇게 high performance를 추구하며 사는 모습이, 여러가지 내 생각의 왜곡을 가지고 온 것 같다.

4. 촉촉해지는 일

나는, ‘문제’를 맞닥드리면, 그것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 문제를 넘어서 소망을 보고, 그 문제를 품고 기도하고, 절망이 깊을 수록 소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하는 비분석적, 비논리적 approach를 여전히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

5. 나는 말이 너무 많다.

대화를 하다가 문득 문득, 

허걱… 또 내가 이렇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네…

하며 놀라곤 했다.

나는 말이 너무 많다.

내가 왜 이 사람들만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얼마전에 우리 동네 사는 어떤 분이 내게,

왜 당신은 K 간사들만 보면 그렇게 우냐고 물었다. ^^

K 간사들을 위해 기도할때마다 그렇게 우냐고…

나는 그때, 

아마도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 가치에 헌신한 모습을 보면서 감격이 되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소망을 생각하며 벅차서 운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글쎄… 그런걸까?

이번 주말에는,

K 간사들이 이 동네에 온다.

매년 하는 간사 수양회이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 (더 지났나? ㅎㅎ 시간 관념이… ㅋㅋ)

몇명 안되는 간사들이… 간사 수양회라고 모여서… 워싱턴 지구촌교회 지하 베다니룸에서 밤을 새며 삶과 사역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학생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다시 집으로 와서는 며칠동안 가슴이 뛰어서 지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내 20대 후반, 30대 전체, 그리고 40대 초반을 코스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 내가 더 이상 player가 아님을 자각하며 참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한다.

이번 주말,

여기에 모이는 이 사람들을 보며,

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될까?

이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

간사 수양회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저는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 출장을 떠납니다. 아마 두주정도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동안 블로그 글을 거의 못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일 없으면, 아시아에서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내가 불편해하는 여러 표현들

나는 좀 속도 좁고, 너그럽지도 못해서…

어떤 언어 표현이 많이 귀에 거슬리곤 한다.

그런 표현 몇개를 골라보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I knew it” (or “I know that”)… 

어떤 사건, 인과관계, 방향 등에 대한 확신을 표현할때 영어에서 이렇게 쓰는데, 

(가령, 내가 처음 무슨 일을 시작했을때, 나는 이 일이 내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

나는 이 표현이 참 불편하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무얼 그렇게 잘 안다는 것인가.

자신의 안에 있는 강한 선호 (지극히 주관적 내용)를, 객관적 진리(지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표현인데…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I deserve it”

내가 그걸 받을 가치가 있다… 뭐 그런 식의 표현인데,

You can get the money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lawyer들의 광고,

You should take a great vacation that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여행사 광고 등등을 보다보면,

정말 culture entitlement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은혜, 인간의 본질, 깨어짐, 하나님의 영광 이런 개념들과 도무지 양립하기 어려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I need to find myself”

나는, ‘자아(self)’란 찾아지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복음이 이야기하는 자아는, 내가 찾는 존재가 아니라…

망가진 나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구원해내시고 나면… 아… 내가 그런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Extra nos) 은혜, 계시가 소망의 근거이지, 

내면의 빛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소망을 찾으려는… 여러 시도들이 불편하다.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도 이런 시도들은 편만해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데…

너무 까칠한 사람으로 비추어 질까봐… 오늘은 이만큼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