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조급함, 여유로움과 부지런함

스스로를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부지런하기 보다는 마음이 조급한 것이고,
스스로를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다기 보다는 게으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게으름과 조급함은 그 뿌리가 같고,
마음의 여유와 부지런함은 그 뿌리가 같은 것 같다.

문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게으르면서 조급한 쪽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마음의 참된 여유와 뜨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부지런함을 겸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Context와 Text

가끔 훌륭한 선배나 어른들의 걸어온 길들 듣게되면 여러가지로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분들의 어떤 특정한 생각들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일들을 겪게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는 물론 내 생각의 틀이 부족해서 그분들의 사상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살아오신 context 속에서 그분들이 내린 결론이 더이상 새로운 context에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내가 매우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아직도 1980년대 1990년대의 context에서 세워진 그분들의 신앙의 논리로 2000년대의 context에 적용하려는 분들을 만난다.

이분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깊은 감동을 받지만, 때로는 이 어른들이 새롭게 도래한 context에 대한 이해없이 논리를 펴기시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 context에서 개발된 논리를 다시 수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일들을 만난다.

내가 어른이 되어도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Bashing 이명박

나는 지난 한국 대선에서 투표권도 없었지만 (영주권자는 투표권 없다… 대한민국 국민 자격도 없는 거지)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가운데 하나이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어서 생길 여러가지 consequence들이 안타깝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채 이명박씨를 지지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안타까웠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것은, 역사의 후퇴로 생각했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또한…
내가 이명박씨의 실패들을 보면서…
그것에 대한 harsh한 말을 쏟아놓는 인터넷의 말들을 보면서…
이명박씨를 찍은사람들을 보는 것 못지 않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동안
비논리적, 비합리적 왜곡을 동원해서 정권 까대기에 앞장섰던 조중동의 행태와 크게 다르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이 팔리지 않게 되는 것이 한국 시민의식의 발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요즈음 오마이뉴스등이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은 10년동안 조중동에게 당했던 것을 치졸하게 복수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노빠’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이 쓴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 이거 까는거 재미있네. 조중동이 지난 10년동안 이맛에 신문 만들었구나”

한국의 수구세력들을 증오에 가깝도록 싫어하는 나로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언제쯤 치졸한 비난이 아닌 건강한 비판이 담긴 생각들을 나누는 언론, 커뮤니티, 지식인들을 볼 수 있을까.

통념과 통찰

내 고등학교 1년 후배인, 노종문 IVF 간사가 최근 한국 IVP의 대표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점차 꽤 visible하게…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책임을 맡게되는 일들을 본다. 더 이상 기성세대를 비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IVP의 대표간사가 된 이후, 어느 인터뷰에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는 질문에 노종문 간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통념을 주는 책은 나쁜 책이고, 통찰을 주는 책은 좋은 책입니다.”

정말 멋진 말이다.
흔히 많이들 이야기 하는 대로 “두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한번도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말과도 통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짧게 글을 쓰거나…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message를 전하는 일들을 할때마다,
사실 그럼 부담을 깊이 느낀다.

사람들은 나로부터 통념을 얻어 가는가, 통찰을 얻어가는가.

통찰을 주는 책도, 대화도, 글도, 사람도… 정말 찾기 힘든 세상인 듯 하다.

전체에 헌신할 것인가, 부분에 헌신할 것인가

내 신앙과 인격과 생각이 아직 미숙하던 20대,
(그렇다고 내가 지금 무척 성숙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수많은 것에 헌신했었다.

내가 헌신했던 “분야”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해외 선교, 가정사역, 학생사역, 목회, 빈민, 사회 개혁, 교회 개혁, 학문과 신앙의 통합, 캠퍼스 사역, 학문활동, 소그룹 성경공부, 무교회 운동, 성령운동, 기도운동, 부흥, 창조론, 기독교적 문화, 찬양사역, 반자유주의 (fundamentalism), 공동체…

물론 이것들에 내가 모두 깊이 involve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 후 내 생각이 바뀐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나처럼 가벼운 사람들은, 쉽게 헌신하고 그것들에 몰입하여 정신없는 시간들을 꼭 보내곤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헌신했다고 생각했던 그 헌신 자체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할 뿐더러, 그 헌신의 내용도 얼마나 편협하고 유치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러한 시간들을 보내고,
어쩌면 그런 시간들을 지낼 당시의 나보다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
역시 그러한 모습으로 헌신하는 후배들을 만난다.

내 인생을 바로 이것에 걸었다고 흥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런데 그런 모습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자신이 한 헌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그림 속에서 다른 헌신과 영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가령,
복음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것이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의 섬김들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을때 그것을 모두 ‘믿음의 부족’이라고 정죄하고 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에 헌신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그 자체에 헌신을 한다면,
자신이 편협하게 하고 있는 헌신에 관하여 끊임없이 점검하고,
자신의 잣대로 다른 이의 헌신을 재단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매우 더디지만,
그래도 조금씩 내 신앙이 자라가면서,
내가 편협하게 헌신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버리고,
부분이 아닌 전체에 헌신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아직도 갈길은 택도 없이 멀~기만 하다.

내가 회사일을 하는 이유?

우리 회사에서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start-up company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일하고 있는 Power Film 이라는 회사가 투자를 주로 많이 하고… 이 일을 주도했던 group member들이 참여해서 회사를 하나 만들고, 그 회사가 HP와 계약을 맺어서 HP에서 개발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일을 하려고 한다.

지난 화요일에는, 우리 Lab director가 현재까지 협상과정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정리를 하자면, 그리 썩 잘되고 있지 못하다.
HP 에서는, licensing 계약을 맺는데… 가능하면 새로 만드는 회사에 높은 로열티를 부과함으로써 HP의 수익을 극대화 하려고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인 새로운 회사는 그 로열티를 낮게 잡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순조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 lab director로부터 들은 것에 따르면, HP에서는 사실 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HP에서 요구하는 대로 만일 협상을 성사시키면, 새로 만드는 회사는 거의 5년 정도안에 망하게 되어 있다. -.-; 어떤 의미에서 HP는 자신들의 회사 내에서 개발한 기술이 성공하는 일들을 보기보다는, 당장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물론 모든 사업 협상이라는게, 쉽게 되는게 있을리가 없지만… 그리고 이 협상 과정 전체가 아주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이번 update는 다소 듣기에 불편했다.

나는 가민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이 회사를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가…

몇가지 이유 때문이다.

1. 나는 새로운 회사가 만들어 지면서 그곳에서 함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인 우리 lab director가 지난 화요일에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이 일을 함으로써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재미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을 내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충실하게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고, 이웃을 섬기며 그 안에서 우리가 보람을 얻는 것이다.

2. 처음 우리 manager와 이 회사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던 stage에서 내가 우리 manager에게 …  나는 ‘사람’과 ‘기술’ 이 두가지 가치 때문에 나는 이 일에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business를 돈버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함께 하는 기술 개발을 함께 하며 보람을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나누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인 우리 manager를 비롯해서 우리 그룹의 멤버들은 대부분 적어도 일정부분 이 가치들에 동의하고 있다.

3. 현재 한국과 미국 전반적으로 decline 하고 있는 physical science research 분야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일할 수 있는 형태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싶었다. 당장은 활력을 잃고 있는 HP Labs의 physical science 분야의 연구원들에게도 plausible한 exit strategy를 setup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이 생각들이 모두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 일을 주도해서 추진하고 있는 우리 lab director로부터 많은 influence를 받았고, 나도 그 가치들에 contribute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보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HP와의 협상 과정에서…
이런 난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꽤 해볼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들이 드러나지 않을까.

나도 내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겸손하게…. 성실하게… 그렇게 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화살기도

천주교에서 많이 practice 한다는
‘화살기도’를 요즘 꽤 많이 하게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본적인 감사나 찬양의 기도 이외에,
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해야 할때나, 어려운 충고를 해야 할때, 내 감정을 추스려야 할때 등등에 활용을 하곤 하는데… 이게 정말 꽤 괜찮다.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나서 흥분했던 20년전,
하루 종일 이런 기도 속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길을 걸으면서도 감사와 찬양, 간구와 회개의 수많은 기도들을 쏟아내며…

이런 짧은 기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가깝게 알게되는 듯 하다.

거시적인 관점에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

지난주에는 산타 바바라에 살고 있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우리 동네를 찾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우리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더이상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기 때문에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 다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 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나는 코스타등에서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 동역자의 말은, 자신도 10년전의 network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좀 더 update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바로 이어진 대화는… 지난 10년정도 동안 과연 새로운 network이 형성될 정도로 학생운동 / 신앙운동의 infrastructure가 성장하고 성숙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했던 80-90년대가,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 아니었겠느냐. 이제는 계속해서 decline 해가는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 아니겠느냐…
따라서 10년전의 network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network이 아니겠느냐…
하는 다소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의 생각의 나눔이 철저하게 틀렸길 바란다.

그후…
여러가지 생각들이 마음에서 떠돈다.
정말 이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기, 해야 할 말을 하기

해야 할 말을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비교해 보자면…

1. 어떤 것이 더 힘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2.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것이 더 큰 damage를 만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3. 했을때 더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4. 성숙함을 잴 수 있는 더 좋은 잣대는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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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20대와 30대에는, 해야할 말을 하는 데 내 성숙의 기준을 맞추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점점 해야할 말을 하지 않을 줄 아는 것이 내 성숙을 판단하는 더 좋은 기준임을 깨닫는다.

나의 성숙함은 왜 이리도 더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