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 학벌, 경력…

나는, 내 능력보다 학벌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나랑 비슷한 수준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에 비해 학벌이 더 좋다는 것이 솔직한 자평이다.

사실 이게 살아가다보면 솔직히 도움이 될때가 있다.

일종의 후광효과 같은걸 경험하기도 하고, 

professionally 만나는 사람들이 나는 기억할때, 아… 그 어느학교 출신…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괜히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지난주,

M 학교를 졸업한, 일단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함께 통하는 이야기도 많고, 특유의 문화적 공통점 때문에 대화가 즐거웠다.

그렇지만… 내가 이 불공정한 상황을 영유하려고 하는 듯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스스로 보여서, 

못내 불편하고 마음이 쓰렸다.

이제 박사를 마친지 10년이 지나가는 마당에,

아직도 어느학교 출신이라는 것 가지고 먹고 살려고 한다면,

참 비겁한 일일 뿐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를 마치고 나름대로 참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긴 했지만,

이제는 내가 학벌에 비해 실력이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음….

정복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 때,

기계적 하나님 나라 – 그리스도의 주권 이라는 개념에 젖어 있을 때,

혹은 반대쪽 극단인, 피상적, passive, 평화주의의 아류의 생각에 끌렸을때에는,

내 학벌, 실력, 세상 에 대한 꽤 단순한 도식이 가능했는데,

이제 그 어느것도 ‘내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지금은,

도대체 내게 주어진 이것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활용되는 것이 가능하긴 한건지…

여러 복잡한 생각들만 가득하다. ^^

무엇을 향해 우는가 (updated)

지난주 금요일 “무엇을 향해 우는가” 라는 글에서 약간 더 update된 version이다.

1.상실의 울음

어떤 이들은,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혹은 자신의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서 운다.

2. 정의의 울음

어떤 이들은, 깨어진 세상을 보며,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며, 불의와 악을 보며, 안타까움으로 운다.

3. Coram Deo의 울음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바라보며 운다.

여기서 각각,

건강한 형태의 울음과 건강하지 못한 형태의 울음이 더 있을 것 같아 세분해본다.

1-1 건강하지 못한 상실의 울음

내가 이루고 싶은 아주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번영신학, 기복신학은 인간의 이 부분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울음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1-2 건강한 상실의 울음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등을 잃었을때 우는 울음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때 우는 울음 등과 같은… 이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2-1 건강하지 못한 정의의 울음

이 울음이, 공정하지 못한 분노로 연결되어 고착화 되면, 나와 남이 모두 함께 망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울음의 근거가 건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울음 자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나쁜 사람은 참 많다. (홍정길 목사님의 표현)

히틀러도 그 생각을 찬찬히 보면 참 좋은 생각을 많이 했었다.

2-2 건강한 정의의 울음

그런 의미에서, 울음을 통해 다다르게 되는 곳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 하나님의 주권, 악의 심판에 대한 약속을 믿음 등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건강한 울음을 울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또한 정의의 눈물을 흘리는 과정 중에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어야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것 같다.

3-1 건강하지 못한 Coram Deo의 눈물

사실 Coram Deo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눈물이 있을 수 없다.

Coram Deo 없이,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자기 연민, 절망, 자포자기 등등의 모습이 이 부류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3-2 건강한 Coram Deo의 눈물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자신의 무익함을 겸손하게, 절신하게 깨닫고,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그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하나님께 무익한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아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로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무지 소망이 없음을 더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무엇을 향해 우는가

1.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혹은 자신의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서 운다.

2. 

어떤 이들은,

깨어진 세상을 보며,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며, 불의와 악을 보며, 안타까움으로 운다.

3.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바라보며 운다.

기독교는,

1, 2, 3 세가지 눈물을 모두 이야기한다.

그러나,

1,2는 하나님 없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가능한 것이지만,

3은, 하나님과의 대면 (Coram Deo)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진정으로 기독교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눈물이 아닐까.

나는, 신앙운동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앙을 운동으로 치환/환원/축소 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그런 의미에서 너무 shallow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운동으로 이해하는 관점에는, 너무 자주, 1과 2의 눈물만 있고… 3의 눈물이 없다…

한때 나는,

내 자신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보잘것 없는 나를 보며…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3의 눈물이 내게서 사라지고, 1과 2의 눈물만 남게 된 것 같다.

다시….

나 자신을 보며 울기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가슴을 치며, 가슴에 멍이 들도록 가슴을 치며… 그렇게 흘리는 눈물…

Red Sox in SF

지난 3일동안,

Red Sox가 SF Giant 구장에 와서 경기를 하였다.

내가 몇달전 이 schedule을 확인하고,

민우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민우가 흥분하면서, 꼭 보러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민우가 학교를 시작하는 시점이 9월이나 될줄 생각하고는,

꼭 민우와 함께 Red Sox 경기를 SF에서 구경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민우가 학교 개학 이후에 경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이 실망을 했다. 그렇게 흥분하면서 기대하고 좋아했었는데…

내년 Red Sox 경기가 SF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Oakland 경기는 있을 테니, 거기라도 민우 손 잡고 꼭 한번 가면 좋겠다.

Am I religious?

민우와 ‘종교적'(religious)한 것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민우야, 민우는 아빠가 religious하다고 생각하니? 라고 물었더니,

한참 생각을 해보더니,

Sometimes…라고 이야기했다.

언제 아빠가 religious한 것 같아? 라고 불었더니,

그 hiking 좋아하는 목사님(^^)하고, 귀여운 커플 아저씨(JW를 의미함 ㅋㅋ), 야후 아저씨 (이 아저씨는 yahoo 떠난지가 언젠다 아직도 yahoo 아저씨다. ㅎㅎ) 같은 사람들하고 이야기할때는 아빠가 좀 religious해보여.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할때는 많은 input이 있는 것 같아 보여, (할말이 많아보인다는 영어식 표현 ㅎㅎ) 

민우의 이야기를 내 말로 풀어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내가 크리스천 동지들과 이야기할때는, 내 일상의 모습과는 달리 종교적인 것 같이 느껴진다. 

2. 그럴땐 나는 좀 말이 많은 편이다.

이원론적인 삶의 모습을 탈피하고, 말을 줄여야 겠다. ^^

자신의 패를 까라!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심한 조울증이 있는 아내와 살면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분의 신학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며, 더 깊이 이해가 되었다.

늘 깊이있는 설교를 하시는 A 목사님이,

평생 깊은 우울증에 시달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분의 설교의 더 깊은 곳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저렇게 쉽게 나올까 하며 설교를 듣게되는 B 목사님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게다가 그 B 목사님의 깊은 신학적 깊이에 한참 이르지 못하는 사모님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분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자신의 한계를 잘 열어서 드러내놓는 C 장로님이,

어릴때부터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라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분의 삶이 더 많이 이해되었다.

….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과 사상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의 ‘패를 까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이야기가, 오해 없이 훨씬 더 잘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깨달음, 경험, 사색 등을 이야기함에 있어,

그 경험의 부분을 떼어놓고, 일반화 해서 풀어내려 하면,

자주 과잉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도 되고,

심하면 그것이 폭력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뭐 포커 이런거 전혀 칠줄 모느는 사람이지만, 이련 표현 한번 써봤다. ㅎㅎ)

믿음은 전투적인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 깨어진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다보면,

삶의 전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뭐 이런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런 frame 속에서… 문득…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음이 깨달아졌다.

믿음은 전투적이어야 하는가?

믿음은 liberating 한 것이어서,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전투적 삶은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번주 초,

Lake Tahoe로 이틀짜리 짧은 휴가를 다녀왔는데,

그 휴가 기간,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의 웃음을 보며…

믿음생활 3개월차에나 했을 고민을,

문득 다시 깊이 해본다.

여전히 또 다시 헌신 vs. 일상의 대결 구도인가.

성경통독을 하며 느낀점

참 오랜만에,

성경 통독을 끝냈다.

예전엔, 하루에 열장이고 스무장이고, 앉은 자리에서 많이도 읽었었는데,

너무 그렇게 쭉~ 읽어내려가는 practice를 하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금년 새해 시작하면서 통독을 결심했었다.

금년에 두번 통독이 목표였는데, 8월 상반기에 겨우 한번 끝냈으니, 두번 통독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금년 나머지 시간동안 신약 한번 더 읽는 쪽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성경통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발견, 느낌 등이 있었다.

1. 성경의 ‘배치’가 절묘하게 느껴졌다.

구약도 그렇지만, 특히 신약 서신서들의 배열되어 있는 순서가… 마치 흐름을 타듯 배치된 것 같이 느껴졌다.

2. 내가 가슴뛰던 성경본문에서 별로 가슴이 뛰지 않았다.

에레미야, 느헤미야, 호세아, 에스라… 이런 본문들은, 

내가 읽으며 가슴을 뜯기도 했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었고, 읽다가 가슴이 뛰어 성경을 덮고 좀 숨고르기를 해야하는 경험도 있었던 본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본문들이 그냥 밋밋하게 느껴졌다.

내가 뭔가 병들어 있는 걸까?


3. 예전에 별로 감흥이 없는 성경본문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시편, 욥기, 요한복음 등등.. 예전에는 그냥… 그야말로 성경 내에 끼어 들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던 본문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예전에 가슴뛰던 본문들이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 놓는 것들이었다면, 이 새롭게 다가온 본문들은… 내 마음에 좀… 싸아~ 하게 남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4. 성경 내의 다양성이 특별히 더 많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구약성경은 떼고 얘기하더라도,

신약성경 내에서도…

아마 조각조각 띄어내어서 다시 재조합을 하면, 전혀 다른 가르침의 종교를 3-4개는 만들 수 있겠다…. 라고 생각이 들만큼, 

성경 본문이 다루고 있는 scope도 넓고, spectrum도 넓고, 내용도 다양헸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같은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았다.

바울의 초기 서신과 바울의 후기 서신은 거의 다른 가르침인 것 같이 느껴졌다.

바울서신과 비-바울서신 역시 매우 달랐다!

서신서와 복음서도 완전히 다른 내용같이 느껴졌다.


성경의 이 다양함과 dynamic함을 신앙과 신학에 담으려 할때,

reductionistic하게 접근하면 정말 안되겠다… 그런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되었다.

지난 목요일 아땅님이 던지신 질문에 대한 답 ^^

헌신에 대한 글에 아땅님이,

종합적인 질문을 던지셨기에,

여기 한번 답을 올려봅니다. ^^

 질문

‘원래’ 내 대답 (5년쯤 전의 대답)

 ‘요즘’ 내 대답

 헌신그룹 – 일상그룹은 continuum 상에 있는 양 극단인가? incompible 한 가치인가? 두개가 함께 추구될 수는 없는 건가? (theoretically, practically)

컨티뉴엄 상의 양 극단이 아니라, 흑-백과 같은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대단히 incompatible 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는 점차 일상으로부터 헌신의 과정으로 옮겨 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보면 컨티뉴엄 상에 있다고 볼수도 있겠다. 

 컨티뉴엄상에 있는 양 극단이다.

그렇지만 대단히 incompatible하다고 본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양립가능할지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느 그룹에 속했을까?

당연히 헌신그룹 ^^ 

 아마 어떤 그룹도 아니셨을 것 같다. ^^

 제자들은 어느 그룹에 속했을까?

당연히 헌신그룹 ^^ 

 헌신그룹에 가까웠을 것 같다. 특별히 그 당시 복음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성, 정치성에 비추어 보아, 헌신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면 복음에 헌신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그룹의 인물들이었을까?

바리새인들은 당시 거룩운동을 통해서 

헌신그룹! 

결국 새로운 종교적 시도를 통해 시대적 breakthrough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헌신그룹… 

옆의 대답과 비슷 ^^

 가장 이상적인 헌신그룹 멤버의 삶을 그려낸다면 어떨까? / worst한 헌신그룹 멤버의 모습은?

 자신의 보든 것을 던져 하나님 나라 가치에 헌신한 모습

많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내면적 기쁨이 넘치는 모습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나쁜 모습은, 타인을 향해 judgmental 하고, 사려깊지 못하고, 가치에 비해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

옆의 대답과 같음 

이상적인 / 나쁜 일상그룹의 삶의 모습은?

 이상적인 일상그룹이란 존재하지 않음. ^^

 이상적인 일상그룹이 존재하는지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없지만, 일단 그럴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고 있는 중. ^^

아마 따뜻한 마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많이 배려하는 모습이 아닐까.

 가장 이상적인 헌신그룹의 삶의 모습과 가장 이상적인 일상그룹의 삶의 모습은 상당히 닮아있지는 않을까?

이상적인 일상그룹이란 존재하지 않음. ^^ 

여전히 많이 다르지 않을까…

헌신그룹은 가치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것이라면,

일상그룹은, 좀 더 관계에 잔잔하게 머무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두 그룹의 나쁜 모습은 웬지 안 닮아 있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은 어떨까?

헌신그룹: 폭력적이고, judgmental하고, 잔인하고 따뜻하지 않은…?

일상그룹: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음?

옆의 대답과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