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된 본성과 싸움 vs. 성령님의 작은 음성에 귀 기울임

때로는,
내가 매우 건강한 동기를 가지고 꼭 하고 싶은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경우가 있다.

상황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막히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성령님께서 gentle nudge를 해가며 그것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막히는 경우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마음의 이끌림으로 막으시는 경우,
내가 그걸 그냥 무대뽀로 진행시키면, 물론, 일이 진행이 되어버린다.
하나님께서 내 무대뽀 고집에 양보를 해주시는 것이다.

무엇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도 먹었고, 그게 옳다고 생각도 되는데,
막상 계속 마음 속에서 질질 끌면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 때…

정말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것을 내 ‘악한 게으름’이라고 생각하고,
그 ‘질질끄는’ 성향과 싸우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혹시…
내가 그렇게 하는 와중에,
성령님께서 ‘gentle’하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동안은,
내 안에서 조용히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도 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참 즐기기도 했었는데…

문득,
그렇게 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 내 감정의 이끌림, 내 선호 등등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sinful nature가 대단히 tenacious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사실 내가 강한 선호를 가지게 될때, 일단 그 선호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런 성향과 싸우려는 시도를 더 많이 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성령님의 작은 음성을 듣는 일을 함께 잊고 산것은 아닌가…

일을 덜하기

새해에 내가 결심한것 가운데 하나는,

일을 덜하기 이다. (음…. 가능할까? ㅎㅎ)

내가 지금의 나를 assess 해보면 이렇다.
내가 일을 많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 하고 있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뭐 열심히 일을 잘하는 것은 중요한데…

그런데 일을 정말 많이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해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일정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나를 drive 하는 아주 큰 것 가운데 하나는…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이 이야… 쟤 대단하다… 뭐 그런 얘기를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소위 ‘갑’의 위치에 있다보니…

‘갑질’을 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정말 많은데…

나는, 적어도 내가 관장하고 있는 영역에서는, 함께 일하는 회사들과 사람들이 ‘페어’한 대접/취급을 받도록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 manager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인 가운데 매우 큰 부분은, 그렇게 해서 내가 그 함께 일하는 다른 회사 사람들로부터 ‘저사람 괜찮다’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

그래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야…

이렇게 나를 칭찬해줄 수 있게 되고 싶은 거다.

지난 연말에 좀 쉬면서,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반복해서 하다가, 결국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동기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당장 산더미 같은 일을 내팽겨치고 날라리가 될 수는 없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위해 필요이상(?)의 일을 하는 것은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출근 시간도 조금 늦추고, 가능하면 퇴근 시간을 좀 일찍 하려고 노력중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랑하는데 쓰고,

나 역시도 내게 남아 있는 ‘people pleaser’의 독소를 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

긴~ 미팅

지난 이틀동안, 회사에서 아주 긴~ 미팅을 했다.

현재 하고 있는 project의 여러 document를 함께 모으는 작업이었는데,

미국 서부 출근시간부터, 중국 베이징의 퇴근시간까지 이어지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긴 미팅이 이틀 연속 있었다.

conference call line을 열어놓고, computer 화면을 함께 보면서, 미팅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저녁 7~8시 정도에는 퇴근을 할 수 있었지만, 

집에 온 이후에도 우리 시간으로 자정 정도까지는 계속 이메일이 오갔다.

뭐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므로… 뭐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저녁쯤 되니, 다들 피곤해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그때 우리 그룹의 한 사람이 다음의 video를 보여주어서 함께 크게 웃었다. ^^

사랑

1.
사랑을 더 잘 하는 성품의 사람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분명,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

2.
젊은 사람들의 ‘알콩달콩’ 식 사랑은 참 예쁘다.
그렇지만, 사랑을 그런 ‘알콩달콩’으로 이해하고 한정하는 가벼움은 정말 참을 수 없다.
내가 그런 알콩당콩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거라고?
뭐 그런지도… 그러나, 사랑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내 주장으로부터는 후퇴할 수 없다.

3.
연민은, 대상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은, 대상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사랑은 연민에 비해 더 어렵다.
나는 참 오랫동안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었다.
지금도 연민은 훨씬 더 잘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데, 사랑은 잘 이해도 안되고 공감도 안된다.

4.
연민은, 대상을 나와 같은 모습으로 이끄는 행위에 가깝다면,
사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대상이 변화할것을 전제로 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5.
사랑에는 희생이 동반되지만, 희생이 곧 사랑은 아니다.
때로 희생은, 사랑의 대치품으로, 혹은 사랑을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희생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있지만, 사랑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없다.

6.
Contrac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as long as you are loyal”  이다.
Covenan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even when you are not” 이다.
결혼은 Covenant일까, Contract 일까?
결혼이 완전한 covenant이라는 것에 선뜻 한표를 던지기에는 약간 주저하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가장 covenant에 가까운 것은 부부관계가 아닐까 싶다.

7.
결혼 17주년,
아직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는 부족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짧은 중간 요약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건가?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늘 많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히 더 많이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냐 하는 질문이다.

음…
질문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은데…
조금 더 풀어서 쓰자면 이렇다.

태어나서 20년동안 ‘모태출석교인’으로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encounter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후 25년동안, 하는 하나님을 아주 깊게, 진하게 만나왔다.

소위 ‘회심’의 경험을 하면서 내 모든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고,
그 후에도 때로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대단히 disruptive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셨다.

그런데,
내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경험이 너무나 커서,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 경험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내가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연구도 하면서…
그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객관화하고 그 설명을 체계화하는 과정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내가 만난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분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 경험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뭐 소위 ‘성령체험’을 한다거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속에서 일종의 ‘신비체험’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부분적이다.

나의, 하나님에대한 실존적 경험…
그렇게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걸까?
왜 내 encounter의 경험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취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걸까?

2014년 summary (?)

내 2014년을 정리해서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Messy 

이다.

정말 ‘해야하는 일’들을 하느라,

(사실은 ‘해야하는 일들’을 만드느라 ㅎㅎ)

아주 정신없이 바빴고, 그 때문에 내 생각과 마음과 주변환경등이 모두 다 messy 해졌다.

물론 일이 정말 많아서 바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일들에 너무 자주 overwhelm 되어서 실제로 바빠야 하는 정도보다 더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쉬면서 금년을 정리하고, 내년을 생각해보고 있는데,

적어도 내년은 금년보다 덜 messy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key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는데…

아마 생각이 정리되는대로 내년 블르그 첫 몇개의 글에서 한번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몇명 되지 않는 제 블로그의 독자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블로그도 좀 쉬고,

1월 5일날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꾸뻑

휴식

지난 24일부터,
계속 휴가를 내어서 쉬고 있다.

간간이 오는 급한 이메일들은 좀 처리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 사실상 거의 모든 일을 shut-down 하고, 운동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성경도 거의 읽지 않고, 완전히 쉬고 있다.
하루에 최소한 8-9시간씩 자고 있다.

어제는 민우와 아내가 둘만 당일치기 스키를 타러 가는 바람에,
하루 종일 완전히 빈둥빈둥 신공을 누릴 수 있었다.

쉬다보니, 잔뜩 날카로와있던 내 정서 상태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마음이 더 너그러워지고 있다.

내게는,
육체적인 휴식이 아니라,
정서적인,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렇게 두어주만 더 쉬면 정말 많이 recover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ㅎㅎ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열정

내게는,

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이 있다.

뭐 그냥 종교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심한 갈증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목마름과 열정이 있다고 해서, 

내 동기가 모두 선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런 목마름과 열정이 나를 ‘옳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내가 가진 목마름과 열정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건강한 신학과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신학과 신앙이 매우 건강한 사람들 조차도, 너무 자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목마름과 열정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냥 ‘너는 별난 놈이다’ 이렇게 결론을 지어버리거나,

그건 ‘너만의 특별한 성향이야’ 이렇게 이야기해버리곤 한다.

지난 주,

내가 참 사랑하고 아끼는 한 동생과,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누었다.

P형, 친구인 T 등등 아주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에 대해 그렇게 내 마음의 이야기를 한 일이 별로 없었는데,

참 감사했다.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어서 슬픈 성탄?

예전에 내가 쓴 글 중에,

성탄이 예수님의 생일이라기 보다는 싼타 할아버지의 날이 된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그 글을 쓴지 거의 15-20년쯤 된 것 같다. ^^

아마 이 블로그에도 올라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랬다.

성탄은 예수님의 생일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정말 많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성탄이 심지어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히 된다고 하니…

많이 마음이 아프다.

왕이 자기 땅에 왔으나, 그 백성이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요한복음 1장의 내용이 확~ 꽃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세상이 이 날을 예수님의 생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이 12월은 아닐 것이라는게 대부분 reasonable한 학자들의 생각이기도 하거니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것을 그저…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인상을 박박쓰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청 앞, 동네 광장 등에 예수님 탄생의 figure를 만들어 놓고… 그걸 가지고 막 싸움을 거는 것이 맞을까?

적어도,

나 스스로를 ‘hard-core 개신교인’이라고 define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고 개신교인이 생각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은 ‘개인의 양심에 따른 신앙’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세상의 문화를 지배해버리려는 시도를 대단히 경계할수 밖에 없다.

오히려,

그렇게 자기 땅에 오신 왕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가슴아픈 현실로 깊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결코 그 사람들의 생각을 coerce 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수께서,

권력자로 이 땅에 오시지 않고,

힘 없는 집안의 무력한 아이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신앙이 정복을 통해서 전달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

소망을 잃어버린 땅에, 왕을 잃어 버린 땅에, 힘없는 작은 아이로 오셨다.

참으로 신비하고도 신비한… 

주님의 탄생이다.

Merry Christmas!

성탄의 main theme?

성탄인사를 영어로

Merry Christmas라고 한다.

즐거운 성탄쯤 되겠다.

성탄은 물론 기쁜 날이다.

성경에서도, 구주가 나신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그러나,

성탄의 main theme은 과연 JOY 일까?

음….

성경의 개념이라는게.. 

대개 여러가지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각각의 것들을 분리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은혜-계시-사랑-언약 등등의 개념들은 아주 치밀하게 서로 엮여 있어서, 한가지를 설명하다보면 나머지것들을 조금씩 건들게 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성탄의 주된 message를 한가지로 뽑아내려는 시도를 하다보면, 다른 개념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봤을때, 

성탄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Dispair(절망) 속에 있는 백성 들에게,

마침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마침내 소망이 주어졌다는, 마침내 구원이 열렸다는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Nativity 이야기를 잘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을 비롯해서,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공관복음에서 그려지고 있는 성탄의 그림은,

어두운 절망 속에 작지만 환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과 같은 모습이다.

아직도 세상이 많이 어둡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밝고도 선명한 소망의 빛.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금년에 내가 묵상하는 성탄의 main theme은 ‘소망’이다.

눈물을 흘리다 이제는 그것마저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실의 아픔을 삭일 방법이 없어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절망의 끝자락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이 실망하여 고개를 떨군 사람들에게…

소망의 성탄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바로 내게도…. 그 성탄의 소망이 마음 속에 밝게 빛나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망의 성탄을 그린 찬송은, 뭐니뭐니해도… 이 찬송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