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7)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바, 세상의 발전은 정말 놀랍다.
이건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게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고민을 한다.

가령,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교회와 사적 기업들 가운데 어디가 더 많이 할까?

적어도 내가 silicon valley에서 경험하는 것에 의하면, 비교할수 없을만큼 회사에서는 다양한 담론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것은 다양성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그 회사의 이익에 매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아주 치열하게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포용성(inclusivenes)에 대한 것 뿐이겠나.
공정, 평화, 평등, 정의, 관용 등등… 어쩌면 교회에서 많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에 대한 논의는 도저히 세상을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생존을 위해 정말 죽어라고 그런 문제들을 고민해왔는데, 교회는 그런 것에 대한 교민 자체가 그렇게 우선순위가 높은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바는,
이제는 교회도 그런 것을 고민해서 어느정도 방향을 좀 잡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특히 요즘 한국을 보면) 사회 상황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들에대해 너무나도 무지한 타락한 교회가 생존을 위협받으며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평신도 (6)

아니…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처음 글머리를 열었는데, 왜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은채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평신도들의 역할을 잘 정리하는데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교회와 기독교가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은 변했고,
그 속에서 기존의 기독교 신학과 선교와 윤리가 뭔가 삐걱거리며 잘 맞지않는 시대에 우리가 놓여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런 상황에 대한 신학적 고민들이 꽤 많이 진전되어왔다.

결국 이 정도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 많이 진행되어온 신학적 논의에대해 현장의 교회들이 너무 무지하다. ㅠㅠ
특히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무지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이 부분은 이 정도로만 언급하려고 한다.

두번째는, 많이 진행되어온 신학적 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신학적 논의들이 대부분 실천적이지 못하다.
이론적이고, 사변적일뿐 아니라, 그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적용했을 경우 어떤 결과들을 얻을 수 있는지 하는 것에대해서도 별로 아이디어가 없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 이원론적 신앙생활을 하거나 신앙을 사유화해서 세속화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평신도 (5)

교회가 2000년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 상황을 해석하기위한 신학적 작업들도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예수연구,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선교학쪽에서의 새로운 접근등이 다각도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 예수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었다.
– 그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 흔히 이신칭의라는 말로, 다소 환원적(reductionistic)으로 사용되었던 개념에대한 다각도의 반성과 재평가가 이루어져왔다. 이런 신학적 흐름은 현재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 제국주의적이거나 강압적인 말로하는 선교와 달리, 그 백성의 윤리가 하나님께서 선교를 하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 ‘대화’가 타협이나 혼합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대화는 복음이 세상과 engage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 교회의 일차적 목적을 세상의 변혁 혹은 세상을 기독교로 정복하는 것으로 보았던것과는 달리, 교회의 일차적 목적이 세상 속에서 교회됨일수 있다.

물론 더 많은 것들이 나열될수 있겠고, 나 같은 비전문가가 그저 한 5~10분 투자해서 글을 쓰는 것이니 허술하게 outline을 잡은 것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는 post-Christendom의 기독교가 가져야하는 모습에 대해 꽤 많은 논의를 진전시켜왔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4)

내가 어릴때 들었던 복음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지고 돌아가셨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현대인들과 이런 대화를 하려면…
도대체 죄가 뭐라는 이야기부터 턱 막힌다. 대화를 잘못 이끌어가면 동성애가 어쩌구.. 뭐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흐르기 십상이고.
선과 악의 기준을 개인이 만들어낸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죄가 절대자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적어도 내가 미국과 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영생’-영원히 사는것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적절할때 고통없이 잘 죽되 그 전까지 잘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는 이상한 종교가 되어버린다.

한때 먹힌다고 믿었던 사영리나 브릿지 전도나 전도폭발 같은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 이유가 내 생각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변한거다.

어쩌면 사도바울의 시대이후, 기독교 주류가 다원주의 사상을 만나는 것은… 거의 20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고,
Christendom 속에 2000년동안 머물러 있던 기독교는 이 변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화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평신도 (3)

Christemdom에서 전도의 방식은 대부분 ‘캠페인’이었다.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전제들이 이미 있었다.
사람들은 대충 비슷한 ‘신’에 대한 개념이 있었고,
‘죄’에 대한 개념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제하는 ‘구원’도 역시 비슷했고,
인간이해역시 얼추 기독교적 전제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전도자들이 했던 것은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개념들을 이제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그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죄의 개념들을 개인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그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신에대한 개념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연결시켜주고,
그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구원이 기독교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소위 Great Awakening의 시기의 전도로부터 시작해서 빌리 그래함의 전도에 이르기까지 대충 전도의 내용은 그런 방식이었다.

그런데….
다원주의사회가 되어버린 post-Christendom의 세상에서는 그런 방식의 전도가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

Christendom 하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던 신 개념, 인간 개념, 구원 개념등이 깨어져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는 신에 대한 개념도 매우 다양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다양하고, 그래서 바라는 구원 역시 매우 다양해져 버렸다.

그래서 실제로 이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열심히 ‘하나님(신)’이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이 비인격적 범신론적 신이라면… 이건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설명인거다.

사영리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더 이상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평신도 (2)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기독교는 2000년 교회역사상 매우 독특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콘스탄틴황제의 밀라노 칙령이후 기독교는 제국에서 공인받은 종교였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 후 국교화한 로마는 후에 무너졌지만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 후 서구의 모든 나라와 문화와 제국의 종교였다. 이것을 Christendom이라고 한다.

Christendom에서는 기독교는 적어도 그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 늘 주류였다.
기독교적인 전제가 당연하게 여기는 곳에서 기독교는 존재해 왔다.

현대적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18세기나 되어서이니… 적어도 그때까지 기독교의 주류는 비기독교적 문화와 대화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렇게 현대적인 선교가 이루어진 시기에도 서구에서는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선교는 제국주의적이었다. 그러니 다른 문화와 대화라는건 필요 없었다. 그저 밀고 들어가서 자신의 문화를 이식하는 것이 그 선교의 모델이었다.
그런 식의 선교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곳은 한국이었고…

나는 선교학을 잘 알기 못하기 때문에 서구중심의 기독교가 자신과 Christendom 바깥의 문화와 어떻게 대화해야하는지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있어 내 생각에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슬리 뉴비긴이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인도에 선교사로 나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영국에 돌아와보니 영국이 선교지가 되어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Christendom 밖의 세계에서 그들과 대화하며 사역하다가 영국에 돌아와보니 영국 사회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어서 이제는 영국의 문화가 더 이상 기독교를 전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원주의사회가 되어버린 서구사회에서 더 이상 이전의 전제들이 유효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평신도 (1)

평신도에 대한 긴(?) 글을 써보려고 한다.
꼭 한번은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어서 어줍잖게 쓰고 싶지 않았다.
조금더 생각이 정리되면 시간 한번 잘 잡아서 써야겠다고 생각한지 벌써 한 2년은 된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뭐 생각이 2년전보다 훨씬 더 준비된것도 아니고,
시간이 요즘 왕창 남아돌아서 이제는 맘잡고 이걸 써볼 여건이 된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강의,성경공부,설교등의 기회가 주어지면 이미 꽤 이 내용을 조금씩 이야기해왔고,
그러니 부족하더라도 한번은 이 블로그에서도 한번 정리를 해보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목회자들이 ‘목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걸 자꾸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냥 자기최면, 혹은 자뻑인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나 같은 평신도가 평신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걸 이야기하는것도 그럴 위험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이렇게 제한적이나마 생각을 열어놓는 것이 혹시 내 생각의 한계와 문제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수도 있을 테고, 혹시라도 좋은 comment와 feedback을 받을 수 있다면 내겐 큰 유익이 될 것 같다.

What’s wrong? (9)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이상한건 이거다.

나 같은 비전문가가 조금 더 용기와 힘을 내어서 어느정도 채워줄 수 있는 이런 평신도들의 need를 왜 도대체 system 이 채워주지 못하는냐는 거다.

지난 여름에 미국, 캐나다, 한국에 있는 10명 조금 넘는 20~50대의 평신도들과 아주 얕은 레벨의 신학공부와 성경본문 공부를 조금 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늘 하듯이 그분들이 성경공부를 마치고 평가를 하도록 부탁을 했는데…
그 평가서에 나온 이야기들은 다소 놀라운 것들이 많았다.

아니… 그냥 좀 성경공부 좋았다, 감사하다는 이야기 정도는 나올만도 한데…
(예의상이라도 그렇게 할만도 하지…)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런얘기 교회에서는 전혀 들을수 없는 얘긴데 생각이 180도 뒤집어 졌다, 인생이 바뀌었다, 뭐 이런 이야기들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왜? 왜 나 같은 사람도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교회에서는 들을 수 없는 거지?
내가 한건 그냥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니엘서 본문 성경공부좀 한것 정도인데… 이런 얘기를 왜 교회에서 못듣는 거지?
(내가 그렇게 이단스러운 이상한 얘기한것도 아닌데…..)

이 글타래를 쓰면서…
어떤 것은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살짝 더 깊은 생각이나… 어설픈 내 나름대로의 진단등은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칫 지나치게 비판적이 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이 시리즈의 글이 너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린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나도 이렇게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건가.

What’s wrong? (8)

가설: 교회의 문화, 교회의 상황이 문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평신도 치고는 여러 목회자들을 많이 만난 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분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들이 그래도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과 대화할때는 정말 그분들과 이야기할때만 사용하게되는 독특한 단어들, 어투, 무슨 이야기는 한번쯤 꼭 끼워넣어서 하고, 무슨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런것들이 정말 많다. – 다시 말하면 목회자들만의 정말 독특한 subculture가 있다.

이게 어떤 것은 좋고, 존중받을만한 것이지만… 어떤 것은 그냥… 외부인이 보기엔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게 목회자들도 그렇지만, 그냥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 교회 장로님들이나 여자 권사님들-과 대화할때도 역시 그렇다.

그냥…. 나 같은 사람은 그게 다 그냥 이상하고 불편하다.ㅠㅠ
그런데 그분들에게는 아주 견고한 subculture로 자리잡고 있어서 결국 그분들과 대화할때는 내가 약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려야만 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때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교회 리더십이 가지는 어떤 문화들은…
그냥 좀 이상하고 어색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화는 새롭고,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무엇인가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구성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What’s wrong? (7)

가설: 기독교 신학의 문제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기독교는 매우 unique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다. 기독교 주류가, 초대교회 이후 최초로 non-Christendom의 세계속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주류는 초대교회 이후 최초로 다원주의를 맞닥드리고 있다.

기독교 주류가 다원주를 만나게된 것은 이미 세계선교가 시작된 이후 계속되었지만, 꽤 오랫동안 기독교는 그것을 제국주의적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냥 저 사람들의 문화가 우리 문화보다 못한 것이니… 우리가 들어가서 선교하고 개화시키지는 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지난 2000년간 지속되었던 Christendom은 이제 무너졌고 기독교는 non-Christendom에서 어떻게 세상과 소통해야하는지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처음 초대교회가 헬레니즘을 만났을때 분명 초대교회가 했던 것이고,
그래서 신약성경 구석구석에 그 파편들이 남아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교회가 그걸 잃어버리고 지내온 것이다.

그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더 이상 세상을 해석해 내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소위 생각을 좀 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그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물론 기독교 내에 이것을 인식하고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 주류는 세상을 해석해낼 힘을 잃어버렸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신학으로 세상을 충분히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ㅠㅠ
그러니 기독교는 더더욱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런 상황속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고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는 것 자체를 잘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독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조금더 근본적인 레벨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는 신학 자체가 너무 좁은 틀에 가두어져 있고,
너무 고루한 상태에만 머물러 있고,
스스로 부족한 것 자체도 모르는 상태인것일수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