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는 가을을 꽤 많이 탔었다.
대학때 가을을 타면 연극이 많이 보고 싶어 졌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대학로 소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기도 했었다.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에는, 별로 찐하게 가을을 느끼기 어렵다.
아, 물론 이맘때쯤 되면 날씨가 그래도 좀 쌀쌀해져서 외투를 입어야 하고, 특히 day light savings time이 끝나고 나면 해가 일찍 져서 밤이 확~ 길어지긴 한다.

그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곳 보다는 훨씬 더 가을이 살짝 온다.

옛날처럼 가을을 별로 타지도 않고,
가을을 탈만한 날씨도 아니고,
가을을 탈만한 여유도 없는데…

이번주에는 미국 중부로 출장,
다음주는 미국 남동부로 출장,
그리고 11월 마지막주는 미국 동부로 출장 한번이 잡혀 있어서…
이번 가을엔 어쨌든 ‘여행’을 많이 하게 되긴 하겠다.

출장 중에라도 뭔가 확~ 가을 기분 내는 걸 해보겠다고 살짝 결심을 해 보는데…
출장중에 뭐 그런거 할 시간이 잘 없기도 하고,
막상 뭐 할만한 것도 없고 해서…

대학때 가을타면 많이 들었던 동물원 mp3 file이나 내 전화에 넣어놓고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그게 뭐 대단하게 시간 드는 일이라고… 그 음악 file 전화로 옮겨놓는 것도 계획만 세우고 있다…. 쩝)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쁘다면

나는 늘 바쁘다.
어떤땐 정말 몸이 많이 바쁘고,
사실 더 많은 순간엔 마음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바쁘다.
몸이 덜 바쁜 순간에도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몇번 쓰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많이 생각해온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할 여유가 없을만큼 바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도무지 사랑할 여유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할 여유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여유도 없다.
정말 이건 문제다.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쁘다면… 그것은 분명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100만큼 능력이 있다면, 60~70만큼만 활용하면서 살아야 비로소 사랑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제 늦게 호텔에 들어와서, conference call을 하고, report 좀 쓰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오늘은 이곳 Dallas에서 중요한 meeting이 있다. 그리고는 저녁비행기를 타고 가면 오늘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겠지.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쁜 것은,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다….. -.-;

당장 physical한 시간을 비우는 노력도 정말 필요하지만,
내 마음의 여유를 더 찾아내는 노력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

검소한 출장

대부분 내 세대가 그렇듯이, 검소함은 큰 미덕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절약을 위해서 몸이 고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1,2학년땐 한방에 혈기왕성하고 땀냄새나는 10대 후반 ~ 20대 초반 남자아이들 네명이 함께 살았다.
그렇게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서인지, 그냥 돈 안쓰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 잠자리에서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긴 시간 여행도 잘 했었다. 정말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5년여 기간동안, 회사일로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본의아니게 upscale 여행을 좀 하게 되었다.
여러 항공 회사의 business class를 경험하게 되었고, 여러 나라의 꽤 좋은 호텔에서 묵을 때가 많았다.
또 식사도 역시 내 돈 내고 사먹으라고 하면 먹지 않을 음식들을 먹기도 하였다.

그게,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뭔가 뽀내나게 다니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출장을 가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령, 토쿄의 중심가 몇개 회사에서 며칠에 걸쳐서 meeting이 있다면,
웬만하면 그 meeting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호텔을 잡는다.
그건 그렇게 해야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하루밤에 300~400불이 훨씬 넘는 고급 호텔에서 자게되기도 한다.
또 저녁에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따로 좀 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고 그냥 그 호텔의 식당에서 혼자 부페를 먹을때도 있다.
그것도 역시 그렇게 해야 시간이 제일 절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한끼에 100불 넘는 식사를 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몇번 다니다보니,
이코노미 seat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별 두개까지 호텔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식사도 fast food나 편의점에서 사먹는 음식 정도로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느껴진다…
음… 이건 아니다.
내 수준보다 더 high class에 익숙해져버리는건 재앙이다.

금년 말이 되기까지,
최소한 3번의 출장이 남았다.

오늘 그중 하나를 출발한다.
이번에는 좀 검소하게 해보려고 한다. ^^

Martyn Lloyd-Jones 설교

얼마전 Martyn Lloyd-Jones를 feed 하는 podcast를 발견한 후에,
계속 그 podcast에 올라오는 MLJ의 설교를 듣고 있다.

MLJ는 내 신앙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그분의 생각과 신앙에 지금의 내가 모두 동의한다고 보기는 어렵긴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제시하는 ‘신앙의 기준’은 정말 내게 크고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한주에 한편 정도… MLJ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 설교가 정말 지루하게 느껴진다. -.-;

아니, 다른 설교도 아니고 Martyn Lloyd-Jones의 설교가!

이건 내가 심각하게 어떤 질병에 걸려있는 sign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좀 든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게 아닐까…

예레미야 (70인역 vs. 히브리성경)

김근주 교수님의 특강 예레미야에서 보면…

70인역의 예레미야 본문과 히브리 성경의 예레미야 본문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히브리 성경은, 지금 우리 한글이나 영어 성경과 같이 멸망->회복의 흐름으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이 본문 배열이 많이 달라져서 멸망->회복->멸망의 흐름으로 되어 있다고.

히브리 성경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봤던 본문이고,
70인역은 주로 이집트를 비롯해 이방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봤던 본문이라고 한다.
(쿰란 공동체에서 나온 예레미야도 70인역의 배열을 따른다고)

왜 그럴까?
팔레스타인 중심의 유대인들은, 그 땅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중요했으므로, 끝을 희망의 회복으로 맺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 중심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다시 그 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고대한다는 약속이 중요했으므로, 끝을 이전 시대의 완벽한 몰락으로 끝냈다고 한다.

이거 정말 아주 많이 흥미로운 분석이다.
배열상으로는 히브리성경이 더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주장이 더 많고,
그런데 70인역이 분량이 더 짧아서, 아마도 내용상 70인역이 더 먼저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고.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9월 29일 생이시다.
미국이 오늘은 28일 이지만, 한국은 거의 29일이 다 되었다. (as of 5am PDT)

금년 어머니 생신은 희수(喜壽)이다.
멀리서 어머니 희수에 가보지도 못하는 아들이다.

내가 만난 최초의 신앙인이었고,
내가 고등학교를 가면서 집을 떠날때 어머니는 어머니가 읽으시던 성경책을 내게 주셨다.

어릴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때 친가쪽에 명절때 가더라도 어른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너는 엄마 탁했구나’고 하셨다.
나는 그게 기분 좋았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어머니를 정말 잘 닮은 것 같지 않다.

첫째로,
내가 아는 한 가장 지혜로운 분이시다.
자신의 생각, 감정을 앞세우는 것 보다 상황을 더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아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취하신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을 처음 읽었을때 나는 그게 우리 어머니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에 그 잠언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이 사실은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을때…
우리 어머니의 지혜로움이 생각났었다.
나는 참 그렇게 지혜롭지 못한데…

둘째로,
어떤 사람이 100만큼의 능력이 있을때 100만큼 혹은 150만큼 힘을 내어서 살고자 하면 무리가 따르고 힘이 달리고 부작용이 생기곤 한다. (내가 그렇다.)
그런데 어머니는 100만큼의 능력이 있을때 많이 절제하여 50만큼만 나타내며 사시는 것 같은 느낌을 늘 받는다. 그래서 어머니에게서는 안정감이 늘 느껴진다.

셋째로,
어머니는 자신을 변호하려 애를 쓰지 않으신다.
때로는 억울한 것이나 부당한 것을 그냥 삼키신다.
이것 역시 나와는 참 다르다. 나는 늘 억울한 것을 참지 못한다. 나를 어떻게든 변호하려고 방방 뛰면서 무리를 한다.

넷째로,
어머니는 함께 있는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을 탁월하게 잘 하신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사람이 참 괜찮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사실은 어머니가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하는걸 한참 후에 깨닫게 되곤 한다.
반면에 나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 자주 좌절한다. 내가 돋보이고 함께 있는 사람들이 죽곤 한다.

나보고 ‘엄마 탁했다’고 했던 친가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내가 50이 거의 다 되어가면서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어머니는 내가 극복해야하는 내 결정적 character flaw를 다 반대로 장점으로 가지고 계신 분인 것 같다.

어머니 아들로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어머니로부터 이 좋은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군…

어머니가… 죄송한 마음으로 보고싶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예레미야의 말씀들

5:30-31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6:10-11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진노가
제 속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6:13-14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어찌 많이 애통해하고 가슴을 치지 않을수 있을까!
한편 두렵기도 하고, 한편 아프기도 하고, 한편 안타깝기도 해서… 정말 그 말씀의 무게가 온 몸을 누르는것 같은데…

예레미야의 경고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가 지금 이 시대에 보고있는 기독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게 아닐까 싶어진다.
물론 거짓 기독교인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고.

이 말씀을 접하며 그렇게 가슴이 눌리는 누군가와 함께 좀 많이 많이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젊은 시절 괜찮았던 어떤 목사님의 타락

함께 KOSTA를 섬기던 사람들과… 한국의 목사님 한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쩌다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망가졌을까 하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꽤 건강했던 분이고,
중년까지도 존경을 많이 받았던 분이신데…
(사실 지금도 그분을 존경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도 하시고….)
도대체 왜 저렇게 되셨을까.

각종 분석들과 가설들을 이야기해 보았는데,
적어도 가장 타당한 분석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그분이 강남이 한참 개발되던 당시 강남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다.”

결국 강남의 풍요라는 환경 속에 스스로가 갖혀버려서 보수화, 그리고 심지어는 세속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나 설교를 들으면 참 insight가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강남에 부가 쏟아져들어오는 과정과 함께 목회/교회를 성장시킨 경험은 그분에게 있어서 심각한 영적 장애, 아니… 영적인 역작용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풍요, 돈, 성공 등등의 시대 정신 속에서,
그것에 정말 치열하게 저항하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아남은 예를 나는 아직 본적이 없다.
풍요, 돈, 성공의 분위기에서는, 정말 절박하고도 치열하게 그것에 맞서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거야…
조금 더 기다리면서 천천히 하자…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점을 찾자…

나는, 그 context가 그리 강력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좀 여유를 부려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특히 실리콘 밸리와 같은 곳에서는…
그런 느긋함과 타협은 결국 회복할 수 없는 타락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은 복음을 잡아먹으려 맹수와 같이 달려드는데…
그 앞에서 ‘일상의 긍정’을 이야기하며 피크닉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

Self-satisfaction?

창조, 죄, 구원,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은혜, 하나님 나라…

흔히 복음의 기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말에 한참 하고 돌아왔다.

나는 매우 자주, 이 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돋고 싶어한다.
어떤땐 정말 한 3일 밤낮, 누가 내게 이 복음의 이야기를 게속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때가 있다.

이번에 다녀온 수련회와 같이 이런 복음의 핵심 이야기를 하게될때면,
나는 내 설교를 내가 듣게 된다.

내가 설교를 잘 하고 못하도를 떠나서,
그저 이 이야기를 또 듣고, 또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겐 참 말로 다 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해서,
혼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 안에서 내 스스로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어쩌랴.
이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기는 하고, 아무도 얘기해 주는 사람은 없고.
게다가 나는 또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고 싶기도 하고. -.-;

적어도 내가 혼자서 생각하기엔 학생들이 잘 들어 주었다.
그중 어떤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하는 고민은 이것이다.
내가 어떤 설교를 함으로써 내가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
혹시 왜곡된 형태의 나르시시즘은 아닐까?

어쨌든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많이 울컥울컥 했고,
그 설교들을 하면서도 많이 그랬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는 너무 많이 피곤해서 주로 비몽사몽이긴 했지만. ^^
그 비행기 안에서도 그 울컥하는 여운이 계속 남아 있었다.

부디 그저 내가 이 귀한 학생들 만난 이 일이,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