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중

오늘 미국에 있는 회사를 시작으로 3월 동안에 대충 3만마일을 날아다닐 예정이다.
(이거 하고나면 당분간 출장을 거부(!!)할 생각이다. 배째라 -.-;)

어제 밤까지 일본, 한국, 스위스에 있는 회사들이랑 일정을 조율하는 이메일을 마구 날리다가 문득 이메일들을 다시 한번 보았다.

나는 이런 식이다
“나 언제 거기 간다. 괜찮냐”

그쪽에선 이런 식이다.
“오시는걸 환영합니다. 호텔이 어딘지 알려주시면 차량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혹시 어떤 내용을 논의하기 원하시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당연히 영어로 이메일을 쓰니까 반말, 존대말은 없지만,
나는 반말 저쪽은 존대말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간 내 변호를 하자면,
나는 여러개의 회사 방문을 내 정해진 일정 안에 끼워넣으려다보니까 이메일을 많이 보내야 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이메일을 보내다보니 ‘말이 짧아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득 어제 밤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가능하면 공손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저쪽에 맡기지 말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게 필요한 듯 하다.

손해보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릴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손해를 보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주로 그건 이렇게 많이 사용되었다.

“네게는 이러이러한 재능이 있어. 봐라, 하나님께서 그거 손해봐가며 썩히시겠니? 그분께서 다 아름답게 사용하실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지 않는 분이라기 보다는,
손해보는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수 없이 손해를 보신다.
무지하게 손해를 보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야말로 여러가지를 낭비하신다.

나의 장래를 손해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의탁해서 꿈을 꾸는 것 보다는,
손해를 두려워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도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훨씬 더 바른 신앙생활이 아닌가 싶다.

또 다시 출장 시즌?

또 다시 몇번의 출장을 계획중이다.

미국(1회사), 스위스(2회사), 독일(1회사?), 한국(1~2회사), 일본(2~3회사)
여기를 모두 3월이 가기전에 모두 다녀야 하는데,

한번에 다 가려니 너무 힘들 것 같고… (정말 세계일주!)
그렇다고 두번에 나누어서 유럽 한번, 아시아 한번 이렇게 두번에 나누어 가려니 너무 여행 일정이 길어지게 될 것 같고…
일단은 눈치를 보면서 방문하는 회사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대신, 여러 회사를 다니면 중간에 transit time이 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많이 다니면 빡셀것 같지만 사실 많이 다니면 그리 어렵지 않은 출장이라는 뜻이다.

3월 한달동안 내내 헤롱헤롱 지내게될 예정이다. ^^

Listen to Trump supporters!

주말에 web surfing을 하다가 facebook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link

아주 훌륭한 글이었다.
다 읽을 시간이 없다면, 다음의 summary만 읽어 보시라.

“You all can defeat Trump next time, but not if you keep mocking us, refusing to listen to us, and cutting us out. It’s Republicans, not Democrats, who will take Trump down.”
“당신들은 다음에는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계속 조롱하거나 우리의 목소리 듣기를 계속 거부하거나 우리를 계속 배제시킨다면 못할 것이다. 트럼프를 끌어내릴 사람은 민주당이 아니고 공화당일 것이다.”

나는, 다음에 들어서게될 한국의 정권이 박근혜/이명박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근혜나 이병박은 감옥에 보내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애서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정쩡하게 안희정을 주의해서 보고 있는 중이다. ^^

돈 덜 쓰며 살기

내가 생각하기에 소비에 예속되게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강력한 독성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통신비’를 생각해보자.
우리집은 TV도 없고, 집전화도 없다.
(아 TV라는게 physically 있긴 하지만, TV service를 subscribe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모두 cell phone을 쓰고 있지만, 나는 회사에서 대주기 때문에… 사실상 두 사람이 쓰고 있다.

두 사람 cell phone + 집 internet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달에 150~200불 정도 사용하는 것 같다.
내 cell phone까지 내가 낸다고 생각하면 이게 200불이 넘게 될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세 가족이 cell phone을 쓰고, 집에서 fast internet을 사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가치’가 한달에 200불 어치가 될까?
음… 아닐것 같다. -.-;

그렇다고 cell phone이랑 internet 없이 살 수 있을까?
음… 아주 불가능한것은 아니겠지만, 무지하게 불편하겠지.

편의나 기호를 위해서 사용하는 액수가 사실 대단히 큰데, 그 편의나 기호를 위해서 비정상적으로 지출하도록 요구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추가의 가치는 그 지출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편의나 기호를, 기술 개발을 통해서 계속 더 추구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창출되는 추가의 가치가 그 소비를 정당화 할 수 없음에도 계속 돈을 쓰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나 할까.

요한복음을 읽으며 드는 의문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질문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런거 누가 좀 잘 가르쳐 주면 좋겠다. ^^

1. Johannine 전통과 Synoptic 전통이 초대교회에 어떻게 각각 존재하고 있었을까? 두 전통은 서로 많이 교통이 있었나?
요한복음을 읽으면, 공관복음과 거의 다른종교가 아닐까 하고 느껴질만큼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까지 다른 관점이 같은 종교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2. 요한복음은 정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게 맞는걸까?
영지주의는 결국 2-3세기정도나 되어야 제대로된 형태를 갖추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 사실 너무 많다. -.-;
보수적인 신학 입장을 가진 분들이 보기엔 불경스러운 질문이겠지만서두.

사실 영지주의의 사상들이 많이 퍼져있고, 그것에 대해서 기독론을 변증하기위해서 요한복음을 썼는데, 아무래도 그 영지주의적 관점을 고려해서 쓰다보니 그 언어와 사상들을 많이 차용하기도 하고… 말하자면 영지주의와 ‘대화하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보면 참 잘 맞아떨어지겠다…고 생각이 드는 곳이 많은데 말이야.
영지주의가 더 일찍 발현이 되었다거나, 요한복음이 왕창 더 늦게 쓰여졌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3. Johannine 전통이 교회사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 더 develop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사막의 교부들이라던가… 이런쪽으로 더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을까?
말하자면 Synoptic 전통과 Johannine 전통이 그 후로 어떤 계보를 만들었을까?
Johannine 전통이 바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것이 아니라면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제로 유대교적 전통과 헬라문화에 각각 어떻게 노출되어 있던 사람이었을까?

혹시 아는 분들 좀 제게 알려주시길…. -.-;

블로그 잠깐 쉽니다. (20-22일)

월요일에 회사가 쉬고 해서 이틀 더 휴가를 내서 쉬려고 합니다. ^^
저희집의 three girls (아내, 딸내미, 강아지) 데리고 운전해서 눈 있는 곳에 다녀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 (혹시라도 휴가 가서 심심해지면 그 이전에라도?) 다음글 올려보겠습니다.

회사일이 살짝 급한 것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laptop을 가지고 가긴 합니다. ㅋㅋ

대신 실없는 joke하나 투척~ ^^

밥 벌어 먹고 살기 (9)

나는 현대 기독교에서 ‘직업’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높여졌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직업을 위해서, 커리어를 위해서 더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을 너무 쉽게 정당화 해버린다.

직업을 위해서 정직이라는 가치를 버리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경건이라는 자세를 버리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보이고 싶은 탐욕,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탐욕,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탐욕… 등등을 ‘하나님의 뜻인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포장해 버린다.

나는 직업을 de-glorify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위해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죄다.
직업의 성공을 위해서 정직을 잠시라도 포기하는 것은 죄다.
더 연봉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완전 바보짓이다.

이런 얘기를 좀 더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헛되고 왜곡된 자아실현의 욕망을 죄로 인정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직업은 밥벌어 먹는 도구로서 자리잡는게 적당하다.

요한복음

1.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어떤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와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성적으로 성경공부하고 책 읽고 그러는걸 더 좋아하는 반면, 그 형은 신비체험이 많고, 환상을 보고, 귀신을 쫓고 그런걸 하는 형이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내게 그 형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형이 어느날 뜬금없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적이 있다.
“너는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의미를 그때 잘 이해하지 못했다.

2.
N T Wright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복음은 내 아내와 같습니다. 나는 요한복음도, 내 아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나는 요한복음에 대한 N T Wright의 이 말을 완전 공감한다. ^^

3.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록 불친절(?)하다.
뭐 좀 논리적 흐름을 따라 노력하다 보면 그게 뚝 끊기고 그냥 선언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서술적이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선언적이고 직관적인 책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 같다.

4.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직관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책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통시적이고, 초월적이다.
나는 그래서 요한복음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훨씬 더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언적이고 직관적이고 통시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잘 활용한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요한복음의 그 선언적, 직관적, 통시적, 초월적 성격을 잘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리 많이 만나지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연구를 좀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 몇년째 하고 있는 중이다. -.-;

5.
새해들어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묵상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매일성경 본문으로 QT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요한복음을 보면서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이 애가(lamentation)으로 읽힌다.
요한복음 1장에, 왕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theme이 요한복음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sign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들을 중심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적어도 나는 이번에 요한복음이 애가로 읽힌다.

6.
예전에 그 형이 내게 ‘요한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형이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은, 요한복음에 조금 더 강조해서 나와 있는 ‘주님을 사랑함’에 대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meta narrative도 물론 좋고, 조직신학적 분석도 물론 좋은데…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core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나를/우리를/세상을 그냥 사랑하셨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내가 정말 깊은 곳에서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7.
사랑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해되지 않는 요한복음을 사랑하며 묵상하는 내 모습도 역시 역설적이다.

또, 평신도 설교

어제는 은규 형제가 설교를 했다.
평신도 신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었다.

어제 설교의 첫 부분은,
사실 내가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블로그에서 좀 썰을 더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inner being의 voice에 충실하는 것이 참되다는 낭만주의적 현대의 자아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은규 형제가 한번 질렀으니, 나도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서 한번 follow-up을 이 블로그에서 해봐야겠다.

그리고 또한 인상적이 었던 것은,
N T Wright의 신학을 가지고 Ego-centric한 현대의 culture를 완전 까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N T Wright의 신학이 그런식으로 Ego-centricity를 직접적으로 깐다고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어가며 멋지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우 형제나 은규 형제 같은 사람들이 물론 참 똑똑하고 신실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조금만 교회가 불필요한 장벽들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목회자들로부터 나오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들이 평신도의 입을 통해서 멋지게 나오는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다들 돈 벌고, 애 키우고… 빡빡하게 살면서… 설교 한번 준비한다는게 그리 쉽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진주들이 이렇게 나오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관심있는 분들, ‘하나의 씨앗교회’ podcast에서 지난 주일 설교를 들어보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