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얼마전, 

어떤 사람과의 대화중에, 그 사람이 자신은 외롭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사람의 상황을 보아, 그렇게 느낄만 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사랍의 입장이되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과연 나는 외롭지 않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음…

나는 외롭지 않은걸까?

사실 할 일은 늘 많이 널려 있다.

그래서 참 바쁘다.

그리고 계속 일이 떨어진다.

그래서 참 바쁘다.

그런데,

바쁘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음… 나도 외롭다. -.-;

나를 활용해서 무언가 일이 되게 해보겠다는 사람들,

나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를 보며 어설프게 훈수를 두거나 비판을 하는 사람들,

등등은 있는데…

정말 내 생각과 고민과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정말 참… 잘 없는 것 같다.

정말 내 생각을 가감없이 깊이 나누고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냥 이 외로움은 어쩔수 없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를 이해시키려면 내 생각의 궤적을 다 설명해주어야 하고, 그 과정이 너무 길고 힘들어서…

상대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작업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 같다.

외로운 것이 힘들지는 않지만,

때로… 만일 내가 외롭지 않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나는 검소하지 않다!

민우는 늘 내가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다고 놀린다.

그러면서, 내가 늘 무언가를 사는 기준은 ‘싼거’ 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런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정말 ‘싼거’를 좋아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비싼거를 별로 즐기질 않는 것 같다.

내게는 50불짜리 스테이크나, 5불짜리 햄버거가 뭐 그냥 거기서 거기다. ㅎㅎ

15불짜리 청바지, 10불짜리 티셔츠만 입고 다녀도, 불편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돈 쓰는게 뭐 별로…

그렇게 보면 나는 검소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럴까?

얼마전에 내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래도 사고 싶은 거 다 산다”고.

음…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가령, 최근…

나는 무선 마우스 하나가 꼭 같고 싶었다.

쓰고 있는 마우스가 고장이 나서 잘 안되었는데… 그나마 집에 돌아다니고 있는건 뭔가 손에 잘 맞지 않아 영… 불편했다.

한 2-3일 견디다가…

어느날 퇴근 길에 Fry’s에 들려, 20불짜리 무선 마우스 하나를 턱 샀다.

뭐 물론 비싼거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품도 아니다. (꽤 마음에 든다. ㅎㅎ)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나는 내가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불과 2-3일을 버티지 못하고 사질러 버렸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이런 식인게 많다.

내가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게 별로 비싼 것들이 아니어서 그렇지,

대개 사고 싶다고 생각되는게 있으면 그리 오래 참는 것 같지 않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결코 검소하지 않다.

절제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이 들 수록 몸에 배어야 하는데 말이다.

신학의 부재일까, 경건의 부재일까

복음주의의 위기, 

한국 교회의 몰락…

뭐 이런 거창한 이야기 하기 이전에…

내 신앙이 이토록 엉망인건,

도대체 신학의 부재일까, 경건의 부재일까.

대개,

주로 말씀 많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부재라고 이야기하고,

주로 기도 많이 하나는 사람들은 경건의 부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결국 모든 신앙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결국 모든 신앙의 위기는 경건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내게 부족한건 신학일까, 경건일까.

조금 더 확장 시켜서,

내 가족을 놓고 보았을때,

우리 가족에게 부족한건, 신학일까, 경건일까.

내가 속한 공동체는,

신학이 더 필요할까, 경건이 더 필요할까.

미국 내 한인 교회는?

코스타는?

한국 교회는?

내가 속한 신학 노선(복음주의)는?

한동안 나는 이 모든 문제를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은, 이것이 혹시 경건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악질?!

옛날 김교신 전집을 읽으면서 계속 마음에 남았던 구절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소위 성서조선사건’을 통해 김교신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서 그들에게 한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99% 그냥 평범하더라도,

내가 가진 신앙은 결코 내 일상과 내 바운더리에만 갖혀 있을수 없다.

내 신앙은,

세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보기에,

내가 정말 ‘악질’인가?

믿음이 쉬운 길?

예전에 들었던 소위 ‘gospel presentation’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었다. (뭐 지금도 이런 얘기 많이 듣는다.)

인간은 죄에 빠졌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얻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이제 힘들게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쉬운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음….

뭐 대충 맞는 얘기이다. – 한가지만 빼고.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행위로 구원얻는 것보다 ‘쉬운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서 struggle하는 불가지론자들과 대화해보라.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걸 믿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게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믿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믿음은, 쉬운 길은 분명 아닌 듯 하다.

행위로 얻는 구원이 가진 기본적인 concept은, 초월적 존재를 비초월적 방법으로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가진 기본적인 concept은, 초월적 존재에 초월적 방법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요체가 아닐까 싶다.

믿음이 쉽지 않다는 것은, 평생 교회에 다녀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지금도, 오늘도, 내 믿음없음과 싸운다.

과연 이런 믿음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리고, 구원이, 믿음의 완벽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함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불편한 욥기 해석

1.
나는 욥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너무 어렵다. 이해가 잘 안된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욥기의 어떤 해석이, 너무 쉽게 죄에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욥기의 중요한 message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통은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다.”
“고통을 받는 이유는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음…
뭐 어떤 경우는 물론 그렇다. 딱이 뭐 죄가 없는데도 정말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다고 모든 고통이 그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뭐 모든 고통이 자신의 죄의 직접적 결과가 아닐수는 있어도,
사실 많은 고통은, 자신의 죄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때 나는 그렇다.

2.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겪었던 고난의 많은 부분은 정말 내 죄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반드시 내 죄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고난과 고통의 순간을 지내며, 내 죄의 모습을 깊이 깨닫고 묵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아… 그래…. 내 이런 죄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나는 구나… 결국 나는 이 죄에 묶일수 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구나… 하는 탄식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내 고통의 순간에, 이건 내 죄와 무관하게 그냥 일어난 일이고, 나는 그저 하나님의 완전함을 의지하면 된다는 식으로 보냈다면,
깊은 죄에대한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깨달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대한 깨달음을 마주하면서 더 깊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 경험 또한 없었을 것이다.

3.
내가 아직 대학생일때,
나보다 한살 더 나이가 많았던 같은 교회의 한 무뚝뚝한 형은,
내 죄에대한 지적질을 뜬금없이 해주곤 했었다. -.-;

뭐 그 형이 늘 맞았었는지 하는건 잘 기억이 안나지만,
적어도 그 형이 집어주는 어떤 부분은 정말 아주 날카롭게 잘 맞았다.
내가 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과 싸우고 있을 때, 그 형은 내 그 죄의 핵심을 찝어서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sexual desire와 씨름할때, 그 형은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고로 그 형은 아주 기도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 형의 그런 지.적.질.은, 내가 죄를 제대로 맞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4.
공동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된 모습을 보며 사랑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을 무조건 욥의 친구의 모습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건강한 공동체라면, 사랑하는 형제에게 그것이 죄이다. 그 결과로 너는 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직언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를 해석함에 있어…
그것을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의 결과이다.
그리고 또 어떤 고난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고난의 과정 중에 깊은 죄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난이 자신의 그런 죄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수도 있다.

5.
욥기는 처음에,
욥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의인으로 살았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욥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욥기를 over-generalization (과잉일반화)해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욥기는 하나님의 신비애 대하여 매우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욥기는 고난과 죄에대한 연관성 유무를 이야기해주기 위한 책은 아니라는게 내 생각이다.

6.
요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편하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 잘못을 누군가가 지적해주면 기분이 나쁘고 불편해. 그러니까 그건 잘못된 거야.

그렇지만,
잔리의 판단 기준은,
내 감정적 반응에 있지 않다.

오히려 죄인인 인간의 감정적 반응은, 진리의 판단기준을 흐리기 쉽다.

실력과 인격

뭐 자랑이 아니고… 

(이런 자랑 천박하다는거 잘 아니까 이런 자랑은 사실 별로 안한다. 이제 그런거 자랑할 나이도 지났고…)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엘리트’들과 지내왔다.

고등학교 동창의 70% 이상은 IQ가 155가 넘는다.

그러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에 다녔던 학교도, 직장도 계속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지냈다.

내 ‘신앙’의 영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탁월한’ 분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지낸 경우가 많았다.

여러분들과 참 값지고 귀한 fellowship을 나누었고, 그분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어찌 되었건, 꽤 깊은 신앙/신학적 통찰을 가진 분들과 그래도 계속 ‘fellowship’이 있고, 지금도 그분들과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소위 신앙의 엘리트들이다.

이렇게 내가 만나고 살아온 사람들은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내가 물론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산건 아니다. 

그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 못한 분들과도 물론 계속 fellowship이 있다.

소위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만날 때,

그만큼 실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나도 그렇게 빠지지 않아’ 라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무리수를 두고, 잘못된 사리판단을 하기도 한다.

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력이 없는 것은 물론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실력 없는 것을 다루는 방법에서 대단히 어긋난 접근을 하는 것은 죄이다.

문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나됨’을 계속 지키면서, 실력이 부족한 것이 결코 인격체로서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인식하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데 있다.

나 역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이런 문제로 갈등하고 살았고,

지금도 계속 이런 문제로 씨름하며 살고 있다.

예전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그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었다.

이제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건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겸손할줄 아는 사람.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그리고 진정한 인격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겸손함으로부터 형성된다.

사랑과 연민

내가 생각하기에,

연민(Compassion)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느끼는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Love)은,

그 사람과 내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에서 시작한다.

사랑함에 있어,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자기애(self-love)’에 머무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연민보다 더 어렵다.

나는 도대체 왜 다른 사람이 나 같지 않은지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참 잘 못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계속 사랑을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

아, 사랑이 좀 더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성품의 사람들이 부럽다.

Getting back to…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사셔서,

한국에 다니왔고, 아내는 오늘 미국으로 돌아온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셔서,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아내는, 참 많이 힘들텐데도, 이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지금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 있을 텐데…

참 좋은 분이셨다.

‘착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하는 것을 보기 원하면 우리 장인어른을 보면 되었다.

이제 다시 getting back to ordinary life 할때인가?

아마 그럻지 않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것을 털어버리고 getting back to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하다.

그저 마음 속에 계속 그 횡함을 간직한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 같다.

Getting back to 도 아니고, moving on도 아니고…

그저 bearing with 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 아내가 돌아오면,

한국에서 여러가지로 수고한 아내 안마라도 해줘야 겠다.

지난 한주,

아내가 많이 보고 싶었다.

당분간 블로그를 쉽니다.

당분간 블로그를 쉽니다.

어제 저녁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저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참 선한 분이셨습니다. 제 아내의 선한 성품은 저희 장인어른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지난 봄에 저희 집에 잠깐 방문하시고 저희와 좋은 시간 보내셨는데,

갑자기 이렇게 저희 곁을 떠나실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도 몹시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는 어제 밤 울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 손을 잡고 저도 울었습니다.

오늘 한국으로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