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굼의 헌아식(?)

카타굼에 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한번 생각해본다.

그때 유아세례를 했을지 잘 모르겠지만… 

혹은 요즘 교회에서 하는 것 처럼 헌아식 뭐 그런걸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그런걸 했더라면, 그렇게 어린아이를 두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 아이도, 이렇게 하나님 백성으로 자라도록 드려지게 되는데…

그럼 이 아이도 이 지긋지긋한 카타쿰에서 살겠구나.

저 화려한 로마의 세상 속에서, 출세라는 것은 평생 꿈에도 꾸지 못하고, 겨우 사자밥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기며 그렇게 살겠구나.

시저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가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것과 같이 평생을 살게 되겠구나.

주님,

이 아이가 그렇게 평생 고생하면서 살게 될거라는거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삶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도록 드립니다.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정말 많이 울지 않았을까.

신앙의 비장함을 잃어버린 세대 속에서,

비장한 신앙을 생각해본다.

또다시, 뉴스 M의 기사에 대한 반박 글

뉴스M (미국 뉴스앤조이)에서 원래 글에 대한 변호의 글을 올렸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

그래서 나는 또 거기 아래에 답글을 달았다. -.-;

=====

양재영 기자의 응답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깊이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만, 여전히 비판과 그 변론의 논리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1. 저는 여전히 일부 목회자의 도덕적 문제가 복음전도-사회참여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직접 연관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문제제기와 논리의 흐름이, 적어도 제게는 충분히 convincing하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2.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급했던 것 같이,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양기자님의 원래 글이나, 이번에 쓰신 변론의 글 모두,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가정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글에서는 그 점을 매우 explicit하게 쓰셨고,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에둘러서 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코스타가 민중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하려면, 코스타가 이야기했던 message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전 반박 글에서 썼던 것 같이, 코스타가, 적어도 지난 10여넌동안 담아내고자 했던 주제와 그 주제문을 읽어본다면 그 비판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금년에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 전체집회에서 나누어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인지, 적어도 일부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총론과 거시는 옳은데, 각론과 미시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제가 반론 글에서 적고자 했던 것은, 그 총론과 거시의 관점에 헛점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총론과 거시의 내용을 정확하게 포괄하려면,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급한 data들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하나 만들어 놓고, “이건 참 잘 만든 자동차입니다. 다만 강판이 좀 약하고, 브레이크에 약간 문제가 있을뿐” 이라고 한다면, 잘 만든 자동차라는 거시적 선언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양기자님이 지난 글에서 언급한 코스타 비판의 총론은 이렇습니다.

코스타는 처음부터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복음전도만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규동 목사의 이런 문제도 생긴 거다.

실제로 보면 코스타는 이러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여태껏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그대로다.

저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했습니다.

코스타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민중의 아편을 외면한것과 일부 목사의 도덕적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지금 코스타의 모습을 보면 제시한 ‘코스타의 문제점’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저는 제 논지가, 양기자님의 총론과 거시에 대하여 충분히 근거있는 반박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4.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에 대해.

이것은, 양 기자님의 글에서도 지적하셨던 것 같이, ‘통계의 적확함’이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리적 거부감’이 정확하지 못한 데이터에서 나온 것이라면, ‘편견’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지난 5년간,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 미국 코스타 강사들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정말 돈많은 목사들만 찾아올 수 있는 집회였는지.

코스타가 자본의 덫에 걸려있다는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가운데 하나여야 합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 코스타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만 참여하고 있다.

– 코스타의 메시지와 정신이 자본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data가 충분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을 지지하는 데이터들을 더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 관한한 말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 코스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5. 비판의 촛점이 자꾸만 옮겨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김규동 목사의 성추행의 문제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는 신학적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코스타는 자본에 덫에 걸려 있다. 돈이 많이 들고 스타강사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라고 옮겨갔습니다.

처음 비판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대로 반론을 폈고, 이번 두번째 양기자님의 글에 대해서도 역시 정확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론을 씁니다.

6. 코스타가 완벽하다고 항변하는 것은 물론 절대로 아닙니다. 코스타의 한계가 명확하게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를 향해 하고 싶은 비판의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답글과 이번 답글을 통해서 쓰고 싶은 것은, 그 비판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 기자님이 써주신 변론의 글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셔도 좋았을 한 독자의 답글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자세히 변론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양기자님의 의도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저도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차 한잔 마시면서 좋은 대화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야 미국 한 지역에서 그냥 회사다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그런 대화를 통해서 저 같은 사람도 더 배우고 자라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귀에 잘 들어오는 설교

우리 교회 목사님은,

정말 오랬동안 알고 지냈다. ^^

30대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렇게 함께 많은 것을 share했다.

그렇지만, 매주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은

그렇게 오래 함께 했던 분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이번주,

목사님의 설교가 유난히 귀에 쏙쏙 들어왔다.

설교의 내용은 ‘죄’에 대한 것이었는데…

음…

그 내용이 나와 유난히 더 relevant해서였던 것 같지도 않고 (아, 물론 나는 죄인이지만서두 ㅎㅎ)

목사님의 그날 설교가 좀 다른 format을 취했다거나 했던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특별한게 없었는데, 그렇게 귀에 쏙 들어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뭐 딱이… 목사님이 설교를 이상하게 하신 것 같지 않은데, 

도무지 그 설교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남지도 않고 이해도 안되는 날이 있다.

이게 순전히 내 영적 상태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유난히 설교가 귀에 잘 들어왔다고 느낀 날에는 목사님도 ‘이번건 잘 했다.’고 느끼신 날일까. ㅎㅎ

한번 여쭈어봐야 겠다. ^^

카톨릭 신자가 되라!?

프란시스코 교황, 참 마음에 많이 든다. 

어찌보면, 예수를 믿는다면 누구든 당연히 해야할 이야기들과 행동들인데, 

그 말과 행동들을 보면서 감동받고 환호하게되는 현실이 참 마음 아프다.

그럼에도, 

프란시스코 교황은 참 멋지다.

요즘 같아서는,

새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신교로 오지 말고 카톨릭으로 갈 것을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수가 없다.

물론,

나는 도저히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할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들이 참 많이 있으므로, 내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신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냥 ‘흔한’ 개신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저 목사의 왕국 신민이 되어,

그저 자기 욕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추구하면서, 반지성적 비이성적 행동만을 따라가게되는 것보다는,

조금 ‘잘못된’ 신학의 입장을 가지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정말 처절하도록 절망적인 생각 때문이다.

뭐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카톨릭 쪽에서도…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 한국 카톨릭의 제일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둘다 별볼일 없긴 만찬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

정말 예수 잘 믿어야 겠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겠다.

예수 잘 믿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야겠다.

짜증이 나는 것과 짜증을 내는 것

살다보면 짜증나는 일들이 없을 수 없다.

뭐 하루에도 몇번씩 그런 일들이 있다.

특히 나처럼 ‘까다로운’ 종류의 사람은 별의별일에 다 짜증이 난다.

나는 그렇게 쉽게 짜증을 느끼는 내가 참 불만족스럽다.

예수님을 믿으면 좀 뭐가 나아져야하는거 아닌가.

뭐 솔직히 말하면… 사실 많이 나아진게 이 모양이긴 하다.

내가 대학교 1,2학년때의 내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사람된거다.

그런데,

짜증을 느끼는것과 짜증을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짜증을 내는 것은, 자신이 짜증스럽게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왜 짜증을 내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짜증을 내는 행동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나의 감정 표현이, 나를 둘러싼 다른 이들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직접적인 선언인 셈이기 때문이다.

남들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내 감정을 일단 쏟아붓고 표현해야겠다는…

나는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일까?

음…. 아주 그런 사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예전에는 아주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짜증을 내는 행동을 하거나 기분나쁜 것을 숨기는 일을 잘 못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짜증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짜증을 내는 행동을 보는 것을 참 잘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구든 주변에서 짜증을 내면, 나는 그 모습에 심하게 upset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 때문이다.

“어쭈… 이거 봐라…. 아니, 그래서… 너는 네 감정 표현을 위해서 내 감정이 상하는 것도 괜찮다 그거냐?”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서, 대단히 당황하고, 마음 속으로는 많이 upset하고, 그리고는 아주 격렬하게 그것에 대항하던가 아니면 그것을 완전히 피해버리곤 한다.

(누구든 내게 한번 시험해보라. 내게 짜증을 내면, 나는 쟤가 왜 저러나 싶게 화를 내거나, 아니면 확 말이 없어지고 당신을 피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조금 더 내 생각의 흐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아니 나는 뭐 짜증 낼줄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짜증 내고 싶은데, 말 막하고 씩씩거리고 싶은데, 정말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거야. 너는 뭐가 잘났다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참고있는걸 맘대로 터뜨리는건데?”

결국,

내가 짜증 내는 것 보는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짜증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그 짜증을 아주 힘들게 억누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과 같은 훈련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야하는 것을 하고 싶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고싶지 않게 되는 근원적 변화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겉보기의 행동이 더 상냥해지는 것과 같은 superficial한 transformation이 아니라,

사람의 근원 자체가 변하는 일들이, 복음이 내게 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견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 -.-;

A little bit too much?

한동안 회사일이 좀 manageable 하다 싶었는데,

최근엔 좀 심하다 싶어지고 있다. ^^

아침 7시 conference call부터 어제 밤에는 밤 11시 반 conference call까지….

지금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큰 activity 하나에 큰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밤에도 중간에 깨어서 이메일 확인하고, 잠도 잘 못자고…

어제는 출근길에,

내가 이렇게까지 회사일 하는게, 정말 의미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다.

물론 이렇게 해서 돈도 벌고, 그걸로 먹고 살고… 뭐 다 좋은데…

정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정도로 이렇게 일을 하는게…

Does what I do really matter?

결국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게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질문의 궁극적 종착점은,

내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인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반복해서 점검하고 다시 확인하는 일이 분명 꼭 있어야 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에는, 내가 지루하게 견디어내고 있는 일상이, 

그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크신 주권 아래에서 내 지루한 일상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지구를 구하는’ 일일 필요는 없다는 것.

등등을 인정하고,

내 지루한 일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소위 자신이 혼자 세상을 구원할것같이 달려드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너무나도 지루하고 지치는, 그리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것 같다.

가장 기뻤던 순간들, 가장 슬펐던 순간들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각각 20개씩 추려서 정리하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가 summarize 될 것이라고 하셨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나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을 각각 20개씩 정리해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하자면 어떤 순간들이 있을까?

음….

머리 속이 멍~ 해지면서 아주 막막해졌다.

나는 어느순간부터인가… 

손에 꼽을만큼 기쁘고 슬픈 일들이 없었나보다.

그건,

내게 기쁘거나 슬픈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 물론 아니다.

왜 그런 일들이 없었겠나.

물론, 나는 삶에서 소소한 기쁨과 슬픕을 경험하고 산다.

가령, 아내와 민우와 함께 장난을 치고 산책을 하는 순간이 참 감사하고 기뻤다.

하이디를 입양해와서 아내와 민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뻤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많이 슬펐다.

‘아빠’를 생각하며 우는 아내를 보며 참 많이 슬펐다.

그런데,

그런 기쁘고 슬픈 기억들이 내게 기억될 순간으로 남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벤트’를 만드는 방식이나, ‘성취’를 해 내는 방식이나, ‘목표’를 이루어내는 방식 등이 아니라…

연속된 시간 속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이 더 건강한 것일까?

음… 글쎄… 잘 모르겠다.

이야기 하나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자집이 있었습니다.

그 부자집에는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집 주인은, 동네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란 저래야해” 라며 동네 사람들이 그 부자집 주인을 칭송했습니다. 부자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늘 자비를 비풀줄알고,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머슴은, 자신의 주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머슴에게 주인은 점차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머슴이 성실하게 일하기도 했을 뿐더러, 머슴 역시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이 머슴에게 점점 더 일을 많이 시킨 것은, 주인이 다른일로 바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마을에도 땅을 크게 사서 거기에서도 소작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그 소장농들에게도 자비롭게 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인은 땅을 넓히고 너 많은 사람에게 자비로운 소작을 베푸는 영역을 넓혀 가면서, 막상 머슴들이나 소작농들에게 이상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악한 머슴들이 소작농을 막 다스리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쟤가 저래도 일은 잘하잖아. 저렇게 좀 하다가 나아질꺼야 하면서 악한 머슴들을 허용했습니다. 

기존에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예전에는 나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을 탐한다거나, 사기를 치는 집사, 머슴들도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이게 사업이 커지면서 어쩔수 없는거야. 그래도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라며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원래 주인을 따르던 머슴은, 주인이 버려두다시피한 땅을 더 잘 일구고, 소작농들과 더 잘 지내며 풍성한 수확을 내는 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뜻이 맞는 머슴들을 모아서 함께 먹고 사는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가끔, 주인이 보낸 집사가, 엉뚱한 짓들을 했습니다. 

토양에 맞지 않는 화학비료를 뿌려 땀흘려 지은 농작물을 망가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악한 집사가 나타나 소작농들을 괴롭히고는 사라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머슴은, 그런 속에서도, 

이제는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잘 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땀흘려 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한 소문들이 들렸습니다.

주인을 따르던 집사들, 머슴들이 자꾸만 나쁜 짓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해가며 기존에 헛간을 버리고 더 큰 헛간을 짓고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부려서 자신의 왕국을 만든 집사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원래 좀 터프하게 아랫사람을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던 한 집사는, 자기 밑에 있는 계집종을 건드려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말… 그 주인이… 그렇게 존경하던 그 주인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이 커지면서 그 주인의 태도가 정말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주인의 아래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유 만으로 머슴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놈도 그 주인이랑 같은 놈일꺼야.

그래, 저놈도 결국 계집종 건드리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그러는 놈일꺼야.

그 와중에 주인이 농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아래 사람들이 이렇게 사고치고 다니는걸 보니,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다 뭔가 싶다. 허무하다.”

머슴은 정말 억울했습니다.

머슴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한 혜택이 가도록 노력해서 그래도 농업 공동체도 그럭저럭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자신과 자신의 일부 추종자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머슴이 한 일조차도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머슴은 속이 많이 상합니다.

함께 땀을 흘린 동료 머슴들, 그리고 함께 노동 공동체를 이룬 소작농들을 생각하면 이 땅을 휙 버리고 떠날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사람들과 좋은 공동체를 만든 것이 잘못일까요.

주인이 나가서 딴짓하는 동안, 땀흘려 열심히 일한 것이 잘못일까요.

가끔 주인이 이상한 화학비료를 보내고 나쁜 집사를 보내서 노력한 것을 허물어 놓아도 그것을 극복해왔던 것이 잘못일까요.

그러다 머슴은 문득 생각합니다.

아, 그래… 비록 주인은 ‘맛이 갔어’도…

우리 나라님이 계셨지.

우리 나라님은, 모든 이가 칭송하는 성군이시지.

그래, 내가 우리 나라님의 나라에 사는 한, 

내가 이렇게 땀흘린 것은 가치 있는 것인게야.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이제는 그 주인을 떠날때는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잠깐 해 봅니다.

정말 함께하는 사람들과 소작농들을 살리기 위해선,

주인을 떠나야만 하는게 아닌가 말입니다.

미주 뉴스앤조이 (뉴스 M) 에 실린 양재영 기자의 글에 대한 반박

일본 코스타 대표인 김규동 목사와 관련된 뉴스가 나온 이후,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떠돈다.

갑자기 ‘내가 코스타를 잘 아는데, 코스타는 이게 문제야’라는 식의 진단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중에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지적들이 많이 있지만, 또 그중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많다.

미주 뉴스앤조이 (혹은 뉴스M)에 실린 양재영 기자의 기사는, 내가 보기에 후자에 해당하는 기사이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130

몇가지 양재영 기자의 글을 읽으며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해서 적어본다.

1. 지금 코스타 강사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한 것들이 문제가 되어 이 discussion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앤조이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오정현 목사의 논문표절, 그리고 김규동 목사의 폭행과 성추행이 대한 것이다. 

그런데 양재영 기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코스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복음전도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양재영 기자가 이야기한대로, 코스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채 복음전도만을 이야기했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심지어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도대체 코스타 강사들의 도덕적 이슈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전통적 신학적 debate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평소 거친 운전습관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의 잘못된 운전습관으로 말미암아 사고를 일어켰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을 보면서 ‘저 사람은 평소에 발을 잘 씼지 않았다. 그래서 무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며 지적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지적일까?

‘코스타 관계자들’의 도덕적 문제는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 도덕적 문제가 왜 그렇게 반복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고민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그러나, 도덕적 문제가 생긴 김에, 저들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해보자 라는 것은 심각한 논리의 비약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반복하지만, 양재영 기자가 이야기한대로, 코스타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이야기하는 assessment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debate의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2. 양재영 기자는, 코스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가령, 국제본부과 각 지역의 코스타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코스타 프로그램과 강사는 각 지역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등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것을 알고 있다면, 일본에서 벌어진 일과, 13년전 미국 코스타를 ‘자아비판’하면서 쓴 우종학 박사의 글을 한꺼번에 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우종학 박사는 미국 코스타의 간사 였다.)

가령, 오정현 목사가 코스타 인기 강사였다고 했는데, 미국 코스타에서 오정현 목사가 강사로 섰던 것이 언제였는지 양재영 기자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이야기이지만 코스타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진단은 어떻게 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때 3천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나 이제는 1천명도 모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지역의 코스타를 두고 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서는 한번도 3천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적이 없었다. 참석 인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코스타 출신 목회자들의 비리를 외면하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못한 코스타의 본질적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다”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분석과 supporting logic이 필요하다.

전 세계 코스타중에서, 일본 코스타만이 3천명 넘게 모이는 집회였고, 일본 코스타의 참석인원은 전 세계 코스타 집회 중에서 가장 많다. 오히려 ‘코스타 강사출신 목회자들의 비리’가 터진 후에도 일본 코스타의 참석 인원은 줄지 않았다.

나는 참석인원이 많은 것이 건강함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석인원과 건강함의 연관성이 그렇게 높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양재영 기자는, 코스타가 계속해서 엘리트주의와 탈정치주의를 고집하며 시대를 외면한 ‘방주집회’로서의 역할만 고집한다고 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조금 더 밝힐 필요가 있다. 

가령, 지난 10년, 혹은 지난 5년동안 미국 코스타에서 어떤 message가 present되었는지 양재영기자는 아는지 궁금하다. 지난 10년동안 소위 ‘코스타 주제문’ 혹은 ‘코스타 취지문’이라는 것을 읽어보았는지 궁금하다. 최소한 코스타 주제 취지문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기사에서 지적한것과 같이 ‘카더라’ 식의 비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기사에서, 논리적 비약과 사실의 왜곡을 여러군데 볼 수 있었으나, 그것을 다 열거하고자 하는 것은 내 이 글의 의도는 아니다.

3. 양재영 기자가 이런 기사를 쓴 의도와 열정은 높이 평가한다. 양재영 기자의 입장과 내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에대한 주장을 펼 때에는, 좀 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 주장의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

예전에 K 운동을 하면서, 받았던 pressure들이 있었다. 

뭐… 솔직히… 많이… 많이… 많이… 있었다. 

대개는 ‘강사’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도무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강사인데 그런 사람을 모셔야한다는 pressure 들이었다.

그 중에는,

지금은 홍대쪽에 계시는 J 모 목사라던가,

서초동에 크게 새 사업체 확장을 하신 O 모 목사 같은 분들도 있었다.

최근 몇년 동안에는,

일본에서 하는 K 집회를 가서 많이 배워라, 거기가 최고다… 뭐 그런 얘기들도 많이 들었었다. 

그런가 하면,

저런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며 어떤 강사가 왔으니 나는 K 랑 관계 끊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많이 당해봤다.

“저런 사람은 다시 부르면 안된다”며…  휘튼 식당에서 벌받아가며 혼나기도 했었다.

위와 같이 좀 ‘극단적인’ 예 뿐 아니라,

사실 여러가지 압력은 정말 많았다.

다짜고짜 나 회사에서 일하는데 전화해서 어떤 사람 모셔야 한다고 나를 훈계하고 꾸짖는 분들도 계셨다. ㅎㅎ  

밤이면 한두시간씩 어르신들 전화 받아 ‘혼나 드리고’… 정말 내 cell phone을 부셔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다. -.-;

그뿐 아니다. 소위 ‘대중’의 요구도 무시하기 어려운 적도 있었다. 무조건 무슨 무슨 목사님은 모셔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요즘 아마 간사들이 그런거 다 견디어 내느라 많이 힘들 것 같다.)


그러면서 아, 그래… 뭐 그런 분들도, 결국은 나와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다 복음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잖아? 그러니까 좀 타협하면서 그렇게 가야지…

그래서 각종 욕을 들어먹으며 나도 대단히 불편한 분들을 강사로 모신적도 많았다.


한편,

뭐 실명(?)을 거론해서 뭐 좀 그렇지만, 

ㄱㄷㅇ 간사님 같은 경우에는, 이런게 참 더 자연스러우셨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건 정말 죽어도 안된다고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계셨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유연한 입장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뭐 ㄱㄷㅇ 간사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잘 알지만, 이분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정말 놀랄만큼 consistent 한 분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으실 수 있을까… 싶다. 내가 그분을 알아온 것이 이제 15년이 더 되어 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분이 보여주셨던 강경한 입장, 유연한 입장들은…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어떤 원칙에 따른 것이었지, 그때 그때 ad hoc으로 반응하셨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떤 단기적 화평을 위해서 타협했것 보다는,

조금 더 딱딱하고 거칠더라도 원칙을 지켜냈던 것이 더 옳다고 드러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최근,

일본에서 터진 큰 사건(!)을 접하며,

그리고 그 뉴스에 반응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다음주에 열리는 일본의 집회를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보면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