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기?

내 신념을 강화해가며 살아가는 삶은 매우 쉽고 편하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터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념이 없는 사람은 대단히 shaky 하다.

그렇지만 건강하지 못한 신념에 뿌리박은 사람은 대단히 위험하다.

나는 신념 부족의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신념과다의 우려가 있는 사람이다. ^^

특히 그것이 내 ‘종교적 신념’과 연결이 되면, 대단히 건드리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신념은 사람을 깊이 파괴시킬 수 있다.

신념을 너무 쉽게 신봉하지 말아야할 이유이다.

광신이 위험한 이유이다.

소위 ‘열심있는’ 신자들의 인간관계가 어그러지는 이유이다.

열심있는 종교인들이 반사회적 그룹이 되어버리는 이유이다.

내 신념을 강화시키는 일 보다는,

내 신념을 자꾸만 정화시켜나가는 작업이 참 중요한 것 같다.

내 의도가 오해받을 때

나는 매우 자주,

내 말과 의도가 오해받는다고 느낀다.

음… 

그런데 문제는 나는 내 의도가 오해받는 것을 참 잘 참지 못한다.

가령,

내가 선한동기로 어떤 일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의심을 받는다거나,

내가 A 라는 의미로 이야기했는데 상대가 B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는 거기서 상황종료가 되어버린다거나… 

그럼 나는 완전히 맛이 간다. ^^

왜 그럴까?

사람들이 유난히 나를 잘 오해하는 걸까? ^^

그렇지 않으면, 

내 주변에 유난히 사람을 잘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뭐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으나,

확률적으로 보면 뭐 별로…

좀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논리적인 추론은,

다음의 세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내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만한 말이나 행동을 잘 한다.

– 나는 사람들에게 내 의도를 설명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 원래 사람들은 서로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remedy를 흔히 많이 적용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점차로… 세번째 remedy가 내게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오래, 그냥 때로는 오해를 받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

오해를 받더라도 괜찮은거다… 그렇게 인정하기.

그게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사는 삶의 한가지 자세가 아닌가 싶다.

지혜롭지 못함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보면,

결국은 그 지혜롭지 못함의 가장 큰 피해는 자신이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받는 피해가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사람들에게 지혜롭지 못하게 늘 공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의 공격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이 늘 사람들과의 갈등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은 늘 좋은 사람이 곁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조금만 이것을 확장 시켜서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이다.

지혜롭다면,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면,

파괴적이고 악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있는데…

자신의 지혜롭지 못함을 보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빠져든다.

은혜는,

밖으로부터 와야 한다.

Karl Barth가 옳다!

기도

하나님 보다 하나님 일을 더 사랑하지 않기를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스러움보다 코스타 간사됨이 더 자랑이 되지 않기를

귀한 학생들보다 코스타를 더 사랑하지 않기를

하나님 영광을 구하는 갈망보다 사역의 성공을 구하는 욕심이 크지 않기를

십자가의 고난을 따르는 것 보다 헌신의 열정을 자랑 하지 않기를

섬김의 기쁨보다 섬김의 무게가 크지 않기를

–  지난 주말, 내 마음에 가득 찼던 기도

사람들이 개 같기만 하다면…

하이디는, 

정말 상처가 많은 개였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때,

몸에 손을 대려고 하면 당장 물을 기세로 대했다.

아마도 남자들에게 특히 abuse를 많이 당했던 것 같았다.

남자들에게는 경계태세를 잘 풀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먹을 것을 주면 받아먹긴 하지만,

와서 먹을것 달라고 조르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앉아 있으면 옆에 와서 꼬리를 흔들며,

함께 놀아달라고, 간식 달라고 조른다.

잘 때에도 꼭 우리 자는 옆에 와서 자려고 한다. 자기 침대가 거실에 있더라도, 우리가 방에 누워 있으면 우리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민우가 소파에 누워 있으면 가서 옆에 누워서 배를 쓰다듬어 달라고 배를 위로 하고 눕는다.

이제는 꽤 귀찮게 굴때도 있다.

정말 우리가 편해진 거다.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 혹은 하나님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조금만 잘 대해주면 금방 그 묵은 감정을 떨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사람들이 개 같기만 하다면…

참 멋진 사람들

그저께 저녁에는,

교회의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말하자면 장로교의 당회와 제직회의 중간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한달에 한번 모이고 있다.

주로 커피숍 같은 데에서 만나서 기도하고 이야기나누고…

늘 많이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는, 아… 참 멋지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도 그렇고, 운영위원들도 그렇고,

참 생각도 깊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insight도 있고…

그렇게 많이 내세우거나 떠벌리지도 않는데도… 언뜻 언뜻 보이는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과 관심에도 새삼 감동했다.

목사님이야 뭐 나랑 비슷한 나이이시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10살씩 어린 다른 운영위원들을 보면서는…

나도 과연 저 나이에 저런 정도가 되었던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새벽부터 해질때까지 정말 죽어라고 일하다가 가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운 상태로 갔는데,

이 사람들 마음 씀씀이 보는 것으로 마음이 따뜻해져,

혼자 기분 좋아라 집에 돌아왔다.

참 감사했다.

지시하는 사람과 지시 받는 사람

나와 함께 일하는 소위 ‘technician’들이 꽤 있다.

그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technician들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면 퇴근을 한다.

나는 저녁 8시까지 일하곤 하는데 말이다.

Not Fair!?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은 내가 ‘지시’한 일들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지시’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대해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호흡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지시’를 받는 사람은, 큰 그림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떨어지면’ 그냥 갑자기 그 일을 해야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기 쉽니다.

지시를 받는 사람이 self-motivated 되어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도 큰 그림을 잘 설명해주려는 노력이 참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때도 있다.

따라서, 지시를 받는 사람은, 지시를 하는 사람보다는 덜 motivate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지시를 하는 사람이 지시를 받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하는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technician들이 3시에 퇴근하고, 내가 8시에 퇴근하는 것은, ‘fair’하다.

쓰고 싶었으나, 지금은 쓸 수 없는 글

사실 지난 1년여동안,

나는 내 정치적 색깔이 확연하게 약해졌다.

여전히 내 정치적 선호는 꽤 분명한 편이기는 하지만,

예전과 같이 어느 특정 정치세력이나 집단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게 되었다.

왜 그런 변화가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시간을 내어 좀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그 글을 쓸 수 없다.

지금은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정치적 균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goodness)이, 어느 한쪽 정치집단에 있지 않음을 계속 기억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

87년, 대학교 1학년일때, 나는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 모든 가치는 성공과 성취에 있었고, 

공의, 정의, 민주, 인권 등의 개념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89년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가 가장 후회한것은, 그 결정적인 pivotal point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

세상을 바라보며, 역사를 바라보며, 민족을 바라보며, 그리고 신앙 앞에서…

또 다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을 수는 없겠느냐는 기도를 해본다.

지진!

지난 주일 새벽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6.1이면, 그래도 꽤 큰 편인데…

우리동네 사람들도 새벽에 흔들림에 잠이 깬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내도 새벽에 침대가 흔들려서 깨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땅’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

그래서 땅을 기준으로 사람들은 기초를 세우고 경계를 정하고… 등등의 일을 한다.

그런데,

그 땅이 움직이니 정말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땅도, 때로는 움직인다.

땅은 우리가 의지할 reference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 고집도 마찬가지이다.

내 모든 관념체계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쌓아놓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전제 자체가 흔들리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심치않게… 이런 일들을 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꼭 붙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심하게 흔들어, 그것에 기댈 수 없도록 만드신다.

땅도, 내 신념도, 

그것을 reference point로 삼을 만한 것이 못된다.

지진은, 

혹은 내 신념을 흔들어 놓는 인생의 경험은,

나를 겸손하게 한다.

그래서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든다.

지진을 간접경험하며, 잠깐 해본 생각이었다. ^^

회사 일을 limit 하기, 하나님을 신뢰하기

한달 쯤 전,

회사에서 10시간 있지 않기.

회사일 하루에 12시간 이상 하지 않기.

이렇게 두가지를 결심했었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다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후로 대충 잘 지켰던 것 같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렇게 하면서도 일을 크게 빵꾸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8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는 날이 꽤 있었지만, (사실 이번주는 거의 매일 그랬지…)

가서 처음 40분 정도는 혼자서 말씀 기도,

점심시간에 한시간 뛰고…

뭐 그렇게 했으니… 

그런데,

그렇게 일의 양을 줄인다고 해서, 내가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 깨닫고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해야하는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고,

한밤중에 깨어서 ‘다른나라’에서 날라온 이메일들을 보고 있고,

무리하게 계획을 짜고서는 그걸 해내야한다는 pressure를 받고 있다.

하나님을 그래도 이만큼 믿어 왔으면,

좀 하나님을 척 잘 믿어야 하는거 아닐까.

도무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