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졸지에 내가…
지난주일과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주… 찬양 곡집을 뒤적이며… 기타를 치며 혼자 집에서 찬양을 부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아… 이게 참 좋다.
참 오랜만에 내 삶에서 찬양이 살아난 느낌이다.
내 신앙과 삶의 여정을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분이시라기 보다는,
계속 흔드시고, 훈련시키시고, drive 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처음 접했을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에 사로잡혀 많이 울고 울고 또 울었지만…
그 후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들들 볶으시는 분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깊은 죄의 뿌리를 정말 고집스럽고도 끈질기게 다루시는 하나님.
가끔,
삶이 무겁게 느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아픔을 당했거나,
여러가지 부담 때문에 힘들 때에는…
때로 하나님께서 너무 그렇게 나를 심하게 하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하나님은 “immovable mover” 이신게 분명하다.
꿈쩍도 않으신다.
주변의 많이 힘든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내게 대하시는 것 같이 그렇게 harsh하게 대하지 마시고,
좀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주셨으면…
그런 바람을 좀 가져보기도 한다.
아시아 출장을 가 있는동안,
모든 이메일을 다 읽고 답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얼른 얼른 읽고 넘어가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열흘 남짓 지나는 동안 밀린 이메일이 200개가 넘었었다!
어제 아침 9시 현재, unread email이 278개 였다.
그도 그럴게,
보통 나는 하루에 이메일을 200개쯤 받고, 30개쯤 쓰는 것 같다.
자기 직전까지 죽어라고 이메일들 답을 하고 잠자리에 들고나서 새벽에 일어나보면…
밤새… 보통 이메일이 50개쯤 와 있다. -.-;
아시아쪽에서 실험 데이터 같은 것들을 그야말로 산더미와 같이 보내오는 것이다.
하루에 어떤 때는 미팅만 8개.
식사시간 찾기도 힘들만큼 정신없이 일이 쏟아지는데,
그 일의 대부분은 이메일이다. -.-;
어제(월요일) 하루 종일,
그 208개의 unread 이메일을, 자그마치 10개 남짓으로 줄이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아, 나는 또 오늘 이백여개의 이메일 폭탄을 또 받을 예정이다.
이메일 열기가… 두렵다.
@ 혹시 제게 이메일을 보내셨으나 바로 바로 답을 못 받으신 분들은, 제가 여러분 이메일을 고의로 씹는게 절.대.로.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많은 일을 이루셨다.
이와 관련해서 소위 다양한 atonement theory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 다양한 견해들을 대부분 다 인정하는 편이다.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강조점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 깊이 천착되어 있었다.
악에대한 궁극적 심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등등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번에 아시아 출장 동안 말씀묵상을 하면서는,
어쩌면 지금 내게 더 필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mission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깨어진 피조세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의 완성이라는,
멋진 스케일의 복음이 참 소중하지만…
사도 요한이 많이 이야기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사랑으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다셨다는 것.
예수의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의 mission이었지만…
그러나 또한… 어쩌면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는 그분의 사랑이셨다.
아직은 아시아에 있다.
시차 때문에 아침 해가 뜨기전에 일어나서,
밤 12시 넘어서 잠이 들때까지,
계속 일을 하는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감사한것은,
이곳에서 나만의 별도의 office를 하나 마련해주어 나름대로 개인적인 시간을 짬짬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든 일정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일까.
나름대로 의지적으로 QT 안하고, 통독하면서 지내던 것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말씀을 짧게 읽고 묵상하는 QT를 다시 하게 되었다.
마음이, 혹은 영혼이 바짝바짝 메마르고, 주님이 멀게 느껴지고…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에 얼른 그렇게 말씀을 들었다.
아… comforting…
참 신기했다.
내가 이전 글에 썼던 것 처럼, 이론적으로는 QT를 고집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QT라는 방법론으로 주님과 교제해온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주님과의 교제가 소원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참 어두워지는 경험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국말로 계속 대화해 왔는데,
갑자기 인위적으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고 하다보니…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고, 소통도 잘 안되고 뭐 그런 거라고 해야할까.
나름대로 내가 많이 힘들때마다 그래서 이불 밖으로 나갈 힘이 없을만큼 고통스러웠을 때에도,
아침에 겨우 기운을 차려 몸을 추스려서 말씀을 좀 읽고,
내 노트 한페이지~반페이지 정도의 노트를 적어가며 주님과 교제했었는데…
다시 이제는 그 포근함으로 돌아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름대로,
<<QT 안하기>> 의 실험은…
적어도 내게는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
지난 주말에는, 참 유익한 시간을 갖었다.
개인적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 우리의 소망에 대해 함께 나누고 한 것들이 모두 좋았다.
그런데, 특히 여러 대화 도중에, 내 개인적으로 참 유익한 것들을 많이 얻었다.
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아직 충분히 passive하지 않다.
작년 가을, 나는 내가 passive하고 vulnerable해지는 연습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거의 일년동안 그 practice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몸에 힘을 빼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2. 나는 여전히 메시아병에 걸려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해야하고,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그 해결사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나는 자유해질 필요가 있다.
3. High-performer disease
40대 중반이 되도록, 끊임없이 high performance를 추구하고 살았다.
공부, 일, 관계, 심지어는 신앙 까지도.
그렇게 high performance를 추구하며 사는 모습이, 여러가지 내 생각의 왜곡을 가지고 온 것 같다.
4. 촉촉해지는 일
나는, ‘문제’를 맞닥드리면, 그것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 문제를 넘어서 소망을 보고, 그 문제를 품고 기도하고, 절망이 깊을 수록 소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하는 비분석적, 비논리적 approach를 여전히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
5. 나는 말이 너무 많다.
대화를 하다가 문득 문득,
허걱… 또 내가 이렇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네…
하며 놀라곤 했다.
나는 말이 너무 많다.
얼마전에 우리 동네 사는 어떤 분이 내게,
왜 당신은 K 간사들만 보면 그렇게 우냐고 물었다. ^^
K 간사들을 위해 기도할때마다 그렇게 우냐고…
나는 그때,
아마도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 가치에 헌신한 모습을 보면서 감격이 되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소망을 생각하며 벅차서 운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글쎄… 그런걸까?
이번 주말에는,
K 간사들이 이 동네에 온다.
매년 하는 간사 수양회이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 (더 지났나? ㅎㅎ 시간 관념이… ㅋㅋ)
몇명 안되는 간사들이… 간사 수양회라고 모여서… 워싱턴 지구촌교회 지하 베다니룸에서 밤을 새며 삶과 사역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학생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다시 집으로 와서는 며칠동안 가슴이 뛰어서 지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내 20대 후반, 30대 전체, 그리고 40대 초반을 코스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 내가 더 이상 player가 아님을 자각하며 참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한다.
이번 주말,
여기에 모이는 이 사람들을 보며,
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될까?
이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
간사 수양회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저는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 출장을 떠납니다. 아마 두주정도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동안 블로그 글을 거의 못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일 없으면, 아시아에서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나는 좀 속도 좁고, 너그럽지도 못해서…
어떤 언어 표현이 많이 귀에 거슬리곤 한다.
그런 표현 몇개를 골라보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I knew it” (or “I know that”)…
어떤 사건, 인과관계, 방향 등에 대한 확신을 표현할때 영어에서 이렇게 쓰는데,
(가령, 내가 처음 무슨 일을 시작했을때, 나는 이 일이 내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
나는 이 표현이 참 불편하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무얼 그렇게 잘 안다는 것인가.
자신의 안에 있는 강한 선호 (지극히 주관적 내용)를, 객관적 진리(지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표현인데…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I deserve it”
내가 그걸 받을 가치가 있다… 뭐 그런 식의 표현인데,
You can get the money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lawyer들의 광고,
You should take a great vacation that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여행사 광고 등등을 보다보면,
정말 culture entitlement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은혜, 인간의 본질, 깨어짐, 하나님의 영광 이런 개념들과 도무지 양립하기 어려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I need to find myself”
나는, ‘자아(self)’란 찾아지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복음이 이야기하는 자아는, 내가 찾는 존재가 아니라…
망가진 나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구원해내시고 나면… 아… 내가 그런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Extra nos) 은혜, 계시가 소망의 근거이지,
내면의 빛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소망을 찾으려는… 여러 시도들이 불편하다.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도 이런 시도들은 편만해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데…
너무 까칠한 사람으로 비추어 질까봐… 오늘은 이만큼만. .ㅋㅋ
나는, 내 능력보다 학벌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나랑 비슷한 수준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에 비해 학벌이 더 좋다는 것이 솔직한 자평이다.
사실 이게 살아가다보면 솔직히 도움이 될때가 있다.
일종의 후광효과 같은걸 경험하기도 하고,
professionally 만나는 사람들이 나는 기억할때, 아… 그 어느학교 출신…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괜히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지난주,
M 학교를 졸업한, 일단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함께 통하는 이야기도 많고, 특유의 문화적 공통점 때문에 대화가 즐거웠다.
그렇지만… 내가 이 불공정한 상황을 영유하려고 하는 듯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스스로 보여서,
못내 불편하고 마음이 쓰렸다.
이제 박사를 마친지 10년이 지나가는 마당에,
아직도 어느학교 출신이라는 것 가지고 먹고 살려고 한다면,
참 비겁한 일일 뿐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를 마치고 나름대로 참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긴 했지만,
이제는 내가 학벌에 비해 실력이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음….
정복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 때,
기계적 하나님 나라 – 그리스도의 주권 이라는 개념에 젖어 있을 때,
혹은 반대쪽 극단인, 피상적, passive, 평화주의의 아류의 생각에 끌렸을때에는,
내 학벌, 실력, 세상 에 대한 꽤 단순한 도식이 가능했는데,
이제 그 어느것도 ‘내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지금은,
도대체 내게 주어진 이것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활용되는 것이 가능하긴 한건지…
여러 복잡한 생각들만 가득하다. ^^
지난주 금요일 “무엇을 향해 우는가” 라는 글에서 약간 더 update된 version이다.
1.상실의 울음
어떤 이들은,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혹은 자신의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서 운다.
2. 정의의 울음
어떤 이들은, 깨어진 세상을 보며,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며, 불의와 악을 보며, 안타까움으로 운다.
3. Coram Deo의 울음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바라보며 운다.
여기서 각각,
건강한 형태의 울음과 건강하지 못한 형태의 울음이 더 있을 것 같아 세분해본다.
1-1 건강하지 못한 상실의 울음
내가 이루고 싶은 아주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번영신학, 기복신학은 인간의 이 부분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울음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1-2 건강한 상실의 울음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등을 잃었을때 우는 울음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때 우는 울음 등과 같은… 이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2-1 건강하지 못한 정의의 울음
이 울음이, 공정하지 못한 분노로 연결되어 고착화 되면, 나와 남이 모두 함께 망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울음의 근거가 건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울음 자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나쁜 사람은 참 많다. (홍정길 목사님의 표현)
히틀러도 그 생각을 찬찬히 보면 참 좋은 생각을 많이 했었다.
2-2 건강한 정의의 울음
그런 의미에서, 울음을 통해 다다르게 되는 곳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 하나님의 주권, 악의 심판에 대한 약속을 믿음 등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건강한 울음을 울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또한 정의의 눈물을 흘리는 과정 중에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어야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것 같다.
3-1 건강하지 못한 Coram Deo의 눈물
사실 Coram Deo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눈물이 있을 수 없다.
Coram Deo 없이,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자기 연민, 절망, 자포자기 등등의 모습이 이 부류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3-2 건강한 Coram Deo의 눈물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자신의 무익함을 겸손하게, 절신하게 깨닫고,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그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하나님께 무익한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아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로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무지 소망이 없음을 더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