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9)

9장에서는 기독교가 처해있던 상황은, 여러 다른 이교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로마는 당시 일반적으로 종교에대해 관용적이었고 그 속에서 기독교도 처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관용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들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 속에서 도드라지게 그 자리를 확보하게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오히려 득이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종교들은 그저 그 종교에 adhere하는 정도로 충분했지만 기독교는 기독교 이외에 다른 것을 버리라고 요구받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독교의 탄탄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그 탄탄한 조직의 결속력이 기독교의 발흥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장 역시 지금 시대에 의미를 주는 바가 많다.

사실 지금은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한가지의 종교적 가치가 세상 속에서 지배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한가지 다른점은 로마시대는 기독교가 ‘도전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현대는 기독교도 그렇게 무너져가는 기존질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는 원래의 기독교인가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무너지는 기존의 질서로서의 기독교와, 살아있는 생명을 갖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른것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로마시대와 비슷한 상황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 속에서 true Christianity가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확실히 선을 긋고 그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오히려 도전하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true Christianity.에 유리한 구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말하자면, 확장, 포용 등의 접근을 하기보다는, 더 깊은 헌신, 세상 속에서의 대조(contrast)등을 강조하는 형식의 기독교가 더 드러나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이것은 내가 늘 생각해왔던대로,
대조성이 강한 강소교회들이 지금 무너져가는 기독교 세팅에서 희망을 걸어볼 주체라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나… 이런 얘기를 하면 대개는 사람들이 그렇게 공감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그냥 이해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긴, 여기 글에서 이렇게 쓴 것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뭐라는거야… 라고 생각하실수도 있겠다….

기독교의 발흥 (8)

8장은 그렇게 읽기 쉬운 장은 아니었다.
저자가 내게는 생소한 사회학적 개념과 여러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내가 그걸 다 따라가며 이해하는건 좀 벅찼다.

순교와 희생이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이 장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끙끙거리다가 문득 리차드 도킨스가 이야기한 ‘밈(meme)’의 개념을 가지고 이것을 이해하니까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기독교서적의 내용을 리차드 도킨스의 개념으로 이해하다니… ㅋㅋ)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고난과 순교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결정은,
그 가치에 충분히 헌신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그것 자체로 그들에게는 보상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지켜지고 드러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자주 그런 헌신과 순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 ‘meme’은 전파되었다는 것.

순교가 기독교의 발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 관점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빡빡하게 여러 다른 연구결과들을 인용해가며 (비록 내가 다 이해는 못했더라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것은 여전히 내게 신선했다.

한가지 덧붙일것은, 초대교회에서 순교가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
여전히 배교자나 도망자가 다수였을 것이고 순교자는 대단히 소수였을 것.

참, 그리고 이 장에서는 예수님이 당대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순교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한다.

기독교의 발흥 (6,7)

6장과 7장은 그 당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6장은 읽으면 꽤 재미있는 데이터들이 제시되는데,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들에서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 전파되는 주된 경로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 – 어찌보면 대단히 새로울 것이 없는 결론처럼 보이기도한다.

7장에서 그려진 그 당시 도시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그 당시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섯배 정도의 인구밀도였다.
심지어는 초고층빌딩이 가득한 지금의 맨하탄보다도 높았다.
하수 시설도 제대로 안되었고,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악취가 진동했다.
건물들은 허술하게 지어져 무너지기 일수였고, 화재가 한번 나면 도시 전체가 다 타기전까지 진압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지진이라도 나면 도시 전체는 모두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목적으로 도시들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이런 ‘도시에서의 운동’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가장 치열한 삶의 자리로 기독교가 간 것이었다.

기독교의 발흥 (5)

5장에서는 기독교가 여성을 ‘인간’으로 제대로 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존중되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이야기한다.

일단, 그 당시 로마는 여성을 사실상 남성의 소유물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면 길에 버리는등의 영아살해가 많았다. 그래서 실제로 남여 성비가 매우 불균형적이었다. – 남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수로보면 여성이 더 많았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여성들은 리더십의 위치까지 맡을 정도로 존중받았다.

잉여 기독교 여성과 잉여 이교도 남성 사이의 결혼이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초기 교회에 안정적인 2차 개종자 유입으로 이어졌다.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남성을 전도해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는 심각한 저출산의 상황이었는데, 그것은 남성 우선의 사회문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당시 로마보다 훨씬 더 여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저출산의 문제가 없었고, 기독교인들의 출산률은 더 높았다.

….

이 장에서는, 소위 ‘젠더 이슈’라는 사회현상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고, 그것이 사회에 대해 어떤 대안적 공동체로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젠더 이슈, 저출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이 당시 기독교는 그렇게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힘이 다 어디에 가 있는 건지…

기독교의 발흥 (4)

맨 처음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책에서는 한 챕터를 역병(epidemic)에 대한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병에 대한 챕터는 역시 나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었다.

AD165년에 역병이 돌았고 이 역병은 15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제국 인구의 1/3내지 1/4정도가 사망하는 대단한 스케일이었다.
그 후 AD251에도 역시 비슷한 스케일의 역병이 한번 더 있었다고 한다.정말 무지막지하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달된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더 언급하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도시의 위생상태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크게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로 몇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이런 역병은 그 당시 승승장구하던 로마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의 사상의 근본을 흔들어대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로마사람들의 세계관으로는 이 역병을 해석해낼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 역병으로 인해 아프고 목숨을 잃는 것 뿐 아니라, 이 역병은 사람들의 사고체계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런 역병 앞에서도 그것을 당당하게 해석해낼만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혹은 덜 두려워하고) 그것에 맞설 수 있었다.
기독교는 역병의 상황을 해석해낼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던져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기독교인들이 돌본 아픈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렇게 돌봄을 받는 기독교인들은 그 간호 때문에 사망률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의 사망률이 낮다는 것은 이교도들이 보기에 주목할만한 겉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차이였다.
기독교인들의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수를 더 보존할 수 있었고, 그렇게 드러나는 결과로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드러나는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 상황에서 선행을 많이 한 것에 사람들이 감흥이 되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식의 분석에는 그렇게 큰 힘을 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

내가 속해있는 현대 교회는, 정말 세상이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 역병의 상황을 해석해낼 힘이 있는가?
내가 속해있는 현대 교회는, 역병 앞에서 드러나는 당당함이 실제적 열매로 맺힐 정도가 되고 있는가?

이 책에 따르면, 2세기의 교회는 흥하는게 당연했고,
21세기의 교회는 (적어도 내가 접하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는) 망해도 싸다…

기독교의 발흥 (3)

이 책에서 또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다수가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흔히 내가 배워온바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사도행전의 시대 (AD 1세기)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단절/분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실제로 초기 기독교 개종의 다수는 유대교에서 이루어졌고, 2세기가 지나서까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 New Perspective 입장의 신학자들과 3rd wave historical Jesus 그룹에서 주장하는대로, 신약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읽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 책에서는 God fearer도 초기 기독교 개종자에 꽤 큰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그룹도 역시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하는것이 가능할 것이다.

참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기독교의 발흥 (3)

이 책에서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여러가지 data를 바탕으로 confirm해주는 것도 있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생각을 확~ 뒤집어놓는 논지도 발견된다.

그중 하나는 초기 기독교의 계급기반이 ‘하층민’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급 수준의 사고력이 필요했을 수 있고,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support하기 위해서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들을 예로 들어서 개종이 이루어지는 과정들을 분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하층민을 배제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하층민을 주된 target으로 하는 종교였다면 이렇게 발흥할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논리들을 펴고 있다.

이건 내겐 참 흥미로는 관점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층민일 것이라는 상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는 하층민에게대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층민에의해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대로, 기독교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아니었다.

이건 정말 내가 몇년동안 꾸준하게 다시 곱씹어야할만한 큰 숙제를 내게 던져 주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행동해왔던 큰 줄기 가운데 하나를 수정해야할만큼 클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의 발흥 (2)

기독교의 발흥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하루에 한장정도 읽고 있었는데 지난 고난주간에는 책 읽는 시간등을 줄이고 좀 자숙(?)하는 바람에 진도가 좀 덜 나갔다.

1장에서는 기독교인이 증가하는 형태가 exponential curve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역사 자료등을 바탕으로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을 해 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가 어느순간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어느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기 보다는, 기독교가 증가하는 방식이 exponential curve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건 요즘 COVID-19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친숙한 개념일 것 같다.
기독교의 증가세가 10년당 40%정도 증가했다고 가정했을때 대충 역사자료들과 일치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그 증가세가 매우 낮은 것 같다가, 어느이상 되면 똑같은 증가율(10년당 40%)를 가지고도 폭발적인 증가인 것 같이 보이게된다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흥미로운 argument였다!
혹시 기독교인들이 ‘부흥’이라고 부르는 현상들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한국기독교의 성장 그래프를 이런 방식으로 그려보면 어떻게 나올까?

하여간 여러가지 흥미로는 생각을 갖게 했다.

기독교의 발흥 (1)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듯이 최근 기독교의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를 읽고 있다.
오랜만에 읽는 번역서여서 살짝 초반에 좀 고생을 했지만, 일단 발동이 걸리니 그래도 좀 읽을만하다.

아직은 초반 몇장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거 정말 완전히 내 취향의 책이다!
영어책의 부제는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인데 아주 적절하다.

이 책은 3세기 정도까지 기독교가 어떻게 그렇게 융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사회학적 가설도 세우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도 제시하고, 또 자신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도 이야기하기도 한다.

거의 매 챕터마다, 아… 내가 생각했던것과 정말 다르구나… 그런데 읽어보니 정말 그렇구나… 싶은 내용들이 많이 넘쳐난다.

보나마나 꾸준히 속도를 내서 읽기 어려울테니, 그리고 읽다가 중간중간 더 공부도 해야할 것 같고 해서, 이거 다 읽으려면 2~3주는 걸리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확~ 하고 깨닫게되거나 더 알게되거나 생각할 거리가 던져진 것들을 좀 여기에 종종 써보려 한다.

성공 (11)

원래 이걸 이렇게 길게 쓰려고 했던게 아닌데, 쓰다보니 길어져버렸다.
독자들중 어떤 분이 얘기해주신 것을 조금 더 담다 보니…

결국 하려던 이야기는 이거다.

  • 성공은 매우 다양한 재능과 상황이 모두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 지금 성공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심하다.
  • 성공에 목매어 사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resource를 성공에 모두 투자하여 살지 말아야 한다. – 사랑할 여유를 남겨두고 살아야 한다.
  • 나 개인적으로는 성공병에 걸려있어서 자족하는 것이 부족하다.

성공에대해 이렇게 쓴 글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치라고 여겨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곳 실리콘 밸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스스로도 계속 점검하며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계속 나누어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되긴 한다.

지극히 실리콘밸리의 환경에 적용될만한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