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자랑

내일은 민우의 생일이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참 여러가지를 누리게 해주셨지만,
민우를 내게 주신것은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다.

정말 철 모르던 어린 시절에, 민우를 갖고,
정말 철 모르는 아빠로서 민우를 키웠다.
민우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민우는 내가 부족한 아빠노릇을 한것에 비해 참 잘 자라 주었다.

민우는 무엇보다도 참 사려깊은 아이이다.
늘 ‘다른사람’의 상태와 감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민우는 성내기를 더디할줄 아는 아이이다.
사춘기, 십대를 지내면서 짜증내고 화나는 일이 왜 많이 있지 않겠나.
그러나 민우는 자신의 그런 부정적 감정을 더디 표현할줄 아는 아이이다.

또, 민우는 밝음을 이해하는 아이이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서 때로 자신이 망가질줄도 안다.

섣부른 자기자랑을 하려하지 않고,
‘나’가 아닌 ‘너’가 세상에 존재함을 인식하고 사는 아이인것 같다. ^^

뭐 내가 좋은 아빠가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여태껏 키워 주셨으니…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것으로 믿는다.

민우에게,
“아빠랑 엄마가 민우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제일 많이 이야기 했어?” 라고 물으면 민우는
“Loving Person” 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그 말대로,
민우가 나이가 더 들어가고 성숙해감에 따라…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더 자라나면 좋겠다.

민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참 많이 감사하다. ^^

적당한 땡땡이?

내가 지난번 A 회사에 다니면서, 그전 H 회사 다닐때 보다 대충 일을 두배쯤 더 했던 것 같다.
지금 이 직장에 다니면서는 지난번 A 회사 다닐때 보다 1.5배쯤 더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일을 해야하는 특성 상,
아침 일찍에는 유럽이나 동부 사람들과 conference call을 할때가 많고,
밤에는 아시아쪽 사람들과 conference call을 할때가 많다.
그러니 당연히 그 중간에 긴~ 시간동안 일을 할수 밖에 없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버린 거다. -.-;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그렇게 전력질주를 하는 식으로 일을 하다간 내가 도저히 견디어내지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낮 시간에 약간 ‘땡땡이’를 치고 있다.

대개 시간이 나는 대로 한 30분 운동을 하기도 하고, 한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심지어는 어떤때는 두시간 가까운 시간을) 점심시간으로 할애해서 web surfing을 하면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conference room에 혼자 들어가서 음악을 듣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잠깐 땡땡이 치는 시간을 내는 게… 내가 계획을 한대로 할 수 있는건 아니고, 하다보면 약간 시간이 비게되고 그때 과감하게 땡땡이를 치는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낮에 뭐 미리 약속을 해서,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렵고…
그냥 낮 시간에 시간이 좀 빌때 혼자서 자체 땡땡이를 치는 것만 가능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productivity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내가 일하는 모습이 훨씬 덜 miserable 해졌다. ^^

한편으로는 땡땡이를 치는 것이 좀 찔릴 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sustainable 하지 않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다보니…
일종의 survival의 한 방편으로서 이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조금씩 쉬면서,
나름대로 자꾸만 기억하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그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나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호흡하는 사람이다.

평신도 설교

K 컨퍼런스를 한참 디자인하던 시절,
한동안, 전체집회에서 적어도 한 session은 ‘평신도’가 message를 하도록 해보자는 원칙을 정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진 분들은 평신도가 ‘설교’를 하는 것을 불편해 하시기 때문에,
‘설교’ 세팅이 아닌 ‘강의’ 세팅의 경우 평신도가 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반복해서 겪었던 어려움은,
평신도 중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이었다.

간혹 평신도들 중에서 집회를 다니는 강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분들은 대부분 ‘간증’ (그것도 신학적 지향점이 대단히 모호한…)이었지,
말씀을 풀어서 청중의 머리와 가슴에 넣는 설교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의 설교였다.
내가 대학교 4학년때, 불과 스무명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대전의 작은 개척교회에 오셔서,
김인수 교수님께서 설교를 해주셨었다.
결론적으로는 바로 선 평신도가 되라… 뭐 그런 내용이었고, 그러려면 성경을 잘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내용이었는데,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던 그 분은, 말씀을 풀어서 참 잘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 설교는 내 삶을 바꾼 설교 가운데 하나였다.

K 컨퍼런스를 디자인 하면서,
아…. 김인수 교수님 세대 이후에 평신도 설교가가 거의 맥이 끊겼구나….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들었었다.
그나마 50년대생들 가운데에는 제한적으로 조금 있었는데,
60년대생으로 들어와서는 정말… 그나마도 사실상 전멸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뭐 내가 잘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제 저녁에,
교회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평신도 설교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왔었는데…
이제 어쩌면 70년대생, 80년대생 이후에서 한동안 끊겼던 평신도 설교가들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이면 여성 설교가들도 좀 나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혼자 좀 하게 되었다.

Blue Like Jazz를 다시 읽으며

교회 소그룹에서,
Blue Like Jazz (재즈처럼 하나님은) 책을 읽으며 sharing을 하고 있다.
덕분에, 문고판으로 예쁘게 되어 있는 한글 책을 한권 사서, 보고 있다.

몇년 전, 영어로 책을 읽었는데, 그때 읽으면서
아, 참 오랜만에 전도용으로 사용할 만한 책을 찾았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한국말로 다시 읽으니,
음… 왜 이렇게 새롭지? ㅋㅋ

새로 읽으면서,
이 책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었나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요즘 다시 읽으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기독교는,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대화하는 기독교’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이 책에서,
자신의 신앙을 세상에 선포하고 전하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positioning하기 보다는,
세상과 대화하고 호흡하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positioning 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하는 것 같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식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그 경험이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미쳐,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다가 빠졌던 trap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사랑할줄 아는 기독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힌트를 좀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하나의 씨앗교회의, 흔한 30대 평신도

몇주 전,
ㅇㅈㅇ형제가 ‘기독교세계관’에 대한 설교를 했었다.
나는 그때 out of town 이어서, 그 자리에서 설교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중에 녹음 file로 들으며
히야… 정말 이런게 teaching 인데… 싶었다.

어제는,
ㄱㅇㄱ형제가, ‘신비’에 대한 설교를 했다.
야…. 나름 노트를 하면서 들으려 노력 했으나, 나는 설교에 빠져들어 노트를 잘 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교인 15명 남짓 한 수준의 정말 작은 개척교회이지만,
이 교회의 그냥 흔한 30대 평신도들은, 참 설교를 잘 한다. ^^

무엇보다도 참 감사한 것은,
이 설교들이 그저 ‘말’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삶의 분투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여성 평신도 설교도 좀 들어볼 수 없으려나… ㅎㅎ

미국의 제조업

재작년이었던가, Tim Cook이 NBC의 Brian Williams와의 인터뷰를 했었다.
Brian Williams가, 왜 apple의 제품을 미국에서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Tim Cook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내용이 이랬다.)

manufacturing을 하는 것은 그냥 공장을 지어놓으면 되는게 아니다.
언젠가부터, 미국에서는 manufacturing을 하는 infrastructure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

manufacturing을 하는데에는,
계획을 잘 하고, 그 계획에 맞추어서 실행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특별히 supply chain이 복잡할수록, planning과 execution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실제로 ‘제조업’이 살아 있는 나라들 – 한국, 중국, 일본, 대만, 그리고 유럽 쪽에서는 독일… – 의 회사들과 일을 해보면, 이 사람들은 그걸 잘 아는 것 같다.
계획을 정확하게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추어 실행을 하는 체질이 잘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미국 회사들은…

“그 샘플 언제까지 몇개 보내줄건가요?”
“한 두어주 후에 몇개 보내드리죠. (I’ll send you a few in a couple of weeks)”
아니, 그러지 말고, 정확하게 며칠날 몇개를 보내준다고 얘기를 해주셔야죠.
“하는데까지 해보죠, (I’ll see what I can do)”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완전히 분통이 터지고…

반면, 위에서 말한 나라들에서는 대충 이렇게 온다.

“그 샘플 언제 되나요”?”
“ETA @ San Jose, 10/23, 2 sheets/ condition. 12 conditions”
“각각의 condition을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지금 막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excel sheet 확인하십시오. 세번째 tab이 이번에 실행한 실험에 대한 구체적 결과이고, 네번째 tab에는 분석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완전히 다르다.

Tim Cook이 한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5.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따라가며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스토리를 잘 못 읽는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아브라함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면서,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어 가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지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6. 성경에 계속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는,
세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시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여 읽으면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하나님 이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그 삶의 스토리 안에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나와도 동행하신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내려가면,
pluralistic society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은 insight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3.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로 한 구체적인 배경이 성경에 다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큰 믿음을 가지고 창조주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기 보다는,
여러신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국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자신의 security로부터 detach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것,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것 등등 모든 행동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섬기는 신에대한, 그 당시 통용되던 방식으로 충성을 보이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꽤 엉성하고 허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 후에는 상당히 깊은 회의/depression/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계속 동행해가면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게된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벌써 몇주 지나긴 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묵상 본문이었다.

몇년 전, 아브라함을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아브라함을 읽는 방식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1. 나는 아브라함을 ‘위인’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communicate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demonstrate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대표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에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지방에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다신교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에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background에는, 아브라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다원주의적, 다신교적 상황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어쩌면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따르기로 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유연한 힌두교인, 경직된 기독교인(?)

내 보스는, 인도사람이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Americanize되어서, 고기도 잘 먹고…

그 아내도 인도 사람이 아니라 Chinese Cambodian이다.

깊이 이야기를 해볼 기회는 아직 없었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만, 소위 ‘Hindi Philosophy’ 스터디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다소 ‘liberal한(?)’ 힌두교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

내가 다루는 회사 하나가 약속을 잘 지키지않고, 거짓말을 하고, accountability를 보여주지 않아서, 내가 좀 심하게 upset한 경우가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그 사람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가며 매일 체크를 하고, date review를 해 가면서 그 사람들이 가지는 논리적 오류들을 지적해내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conference call에 내 boss가 들어오더니만, 그 사람들을 많이 도닥여주고, ‘인정’해주었다.

나는 다소 열이 받았다. 그래서 내 boss와 언쟁을 벌였다. -.-;

음… 그런데…


논리적인 정확함과 치밀함, fact에 근거한 argument는, 당연히 내가 앞섰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상황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는 내 내 보스가 훨씬 뛰어났다.


논리적 치밀함을 통해서 결론에 도달하려는, 분석적 방법이 내 접근이었다면,

논리적 치밀함을 포기하더라도, 심지어는 누가 옳고 그른가를 가리는 일을 포기하더라도, 결국 상생하며 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일이 되게하는 것이 내 보스의 접근법이었다.


그 사람의 그런 접근법이, 그 사람의 힌두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자신의 힌두교적 세계관과 자신의 일을 ‘통합’ (삶과 신앙의 통합!)을 하려는 시도를 얼마나 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경직된 그리스도인인 나와,

유연한 힌두교인인 내 보스를 대비시켜 생각해보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특정 방식에 대한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좀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