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mish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mish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mish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mish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이런 두번째 유형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믿음의 선배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 외에도 흑인 노예들, 한국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무지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림’ 혹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되겠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상황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 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형이 더 relevant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 심화되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아…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있고,
세상의 화려함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되는데,
그 체제 속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낙오자가 되도록 강요받는 상황.

장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렸고,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상황 속에서 suffer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것.
그래서 초월, 신비, 고난 등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패배주의’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suffer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저 낙오자이고 실패자일 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이 두번째 유형이 잘 못 제시되었을때 생기는 독소일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소위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mystic)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Eugene Thacker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나왔던 Alexandria에서 찾고 있었다.

Alexandria는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달했고, 기술이 진보했으며, 여러 사상과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인 풍요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종의 ‘벽’ 혹은 ‘한계’를 느끼고 ‘신비’를 찾아 사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Eugene Thacker는, (이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했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사막의 교부들이 Alexandria를 버리고 신비를 추구했던 그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결국은 신비 혹은 초월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대면할수 밖에 없다.

그런 초월적인 need가 지금 더 크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독교에서 신비 혹은 초월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신비 혹은 초월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비주의나 초월에의 추구가 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이 두번째 견해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해보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두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유형이 훨씬 더 relevancy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위 ‘악덕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 40대의 직장인을 생각해보자.

뭐 해적선 선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보면서는, ‘악덕기업’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 사람이 그런 악덕기업에 다니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다른 skill set이 별로 없을 수 있다.
20대부터 배우고 해온게 그건데… 뭐 다른 일을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이직을 해보려고 해도,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들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다들 악덕기업들이다. 심지어는 사장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라고 알려진 회사들을 포함해서…
게다가 가족 생활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 등등을 결국 이 악덕기업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고 있다.  노예와 같이 사는 것 같아, 때려치고 싶다가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도 않다.

이런 사람에게…
너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 악덕기업에 다니고 있는거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상당히 야속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이외에는.

체제를 개혁하는 일도, 개선하는 일도…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리고 도무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그 체제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럴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사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금년초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12번에 걸친 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이 시리즈에서 다시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가지 포인트만 간략하게 더 써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우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변혁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framework에서 세상을 변혁(transformation)시키는 복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차드 니버 역시, 이것을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라고 하여 중요한 분류로 사용하였다.

이 입장은, 사실 소위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해준 책,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의 원제는 Creation regained 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창조때 주어진 문화명령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의 체제, 문화 등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이라는 모토가 매우 어울리는 입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정치,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경제 등등을 강조하는데, 그 변혁을 이루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에만 신앙을 가두는 이원론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선한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느혜미야 같은 사람이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사람이 이 입장이 표방하는 영웅이다.

음…
내가 사실 대학-대학원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이게 다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이 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로 ‘리더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것 같다.
80년대 개혁주의적 기독교세계관을 비판할때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변혁 모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여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입장을 이야기하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삶의 치열함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던(?) 대학교수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이론적 구호로부터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80-90년대 그렇게 ‘변혁’을 외쳤던 그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에, 세속화 라는 거대한 물결에 속수 무책으로 휩쓸리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했지, 그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이런 변혁의 입장은 흔히,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해. 그런데 악한 세력이 동성 결혼을 찬성하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가 세를 더 모으고 정치적 promotion을 통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자.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에 권위(authority)를 갖기 보다는,
힘과 number of votes로 세상에 권세(power)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게된데는 이런 background가 다분히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건 내가 강의등을 할때 많이 차용하는 스토리이지만 여기 한번 또 써본다.

아마 2003년엔가 eKOSTA에 썼던 글에서 나는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벌써 내가 여기저기서 우려먹기 시작한지 10년도 더 지난… ㅎㅎ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해적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심하게 망가져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위의 해적선 비유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해적선원이 한사람 있다고 하자.
이 해적선원에게는 어떤 가능한 option들이 있을까?

뭐 그냥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해적선에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해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해적선에서 사랑이 꽃피우도록 사랑하라.
해적선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나타내어라.

음….
뭐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막상 ‘해적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좋으신 말씀’일 뿐이다.
아주 아주 shallow 하고 superficial한.

그냥 일반적으로 좋은 말씀에 머물것이 아니라면…

나는,
크게 세가지의 viable한 option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