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쪽에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한주 동안,
양쪽 블로그에 글을 써 봤더니,
이쪽이 더 좋다는 분들이 더 많으셨습니다. ^^

이제 이쪽에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꾸벅~

참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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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높이는 간사함

훌륭한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겠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을 높이는 동기가, 대단히 이기적이고 간사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속해있는 단체의 선배를 많이 존경하고 높인다.
그러면, 결국 그 단체에 속해있는 내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런 예는 사실 많이 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업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들을, 그저 그 사람이 오래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존경’ 한다거나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노력을,
‘헌신’, ‘숭고한 뜻’ 등과 같은 말로 포장하여 높이는 경우도 있다.

어핏보면, 그냥 아부하는 것이려니…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 동기를 파고 보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향을,
기독교 내에서도 수 없이 발견한다.

성직자들끼리 서로를 많이 높여서 평가하는 것,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떤 사람을 필요 이상 높이는 것,
자신이 속한 단체의 선배의 훌륭함을 일종의 ‘신화’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 등등이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람에게 돌려지는 ‘영광’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현대 기독교에서… 최소한 한국 기독교에서… 그것을 잃어버린 듯 하다.

신앙의 성숙, 성실함

신앙의 성숙을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매우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실제 내 노력으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그래도 내가 좀 더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지금도 물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지만…
이전에, ‘나의 성취’라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도,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 임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내 성취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내 실패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에머슨이 이야기한 대로, (두주 전에, 들었던 어느 설교에서 그 설교자가 이 말을 인용하셨다.)믿음이란 손 위에 종달새 알을 놓고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함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인과 인도인

우리 그룹에는,
크리스천 백그라운드를 가진 백인 미국인과,
인도에서 태어나서 자라서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인도인이 있다.

둘다 나이는 60대.

백인 아저씨는, 꽤 유쾌하고 장난기가 있다.
그래서 가끔 농담도 잘 하고, 가끔 재치있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이 백인 아저씨가 큰~ 정말 아~주~ 큰 이상하게 생긴 벌레 한마리를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 잡아서 담았다.
그리고는, 그 병을 우리 그룹에서 제일 깔끔떠는 30대의 여자 엔지니어 책상위에 갖다 놓았다.
그 여자 엔지니어가 소리를 지르며 무서워할 것을 기대하면서 한 일종의 장난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렇게 병에 담겨있는 벌레를 보더니,
인도인 아저씨가…
아… 이 불쌍한 것을 여기에 담아 놓았네…
하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밖에 나가서 풀어 주었다.

음…
두 사람다 별로 그렇게 religious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백인 아저씨는 크리스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고, 인도 아저씨는 꽤 strong한 힌두교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

작은 생명체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여기는 framework과,
만물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framework 가운데 어디에 더 깊게 배여있게 되는 걸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어그러진 땅에 사는 사람들의 눈물

1.
함께 K 운동을 섬기다가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간 참 예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중부 어느 명문 공대에서 공부를 했고, 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아내는 아이들을 낳고 예쁘게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아주 몹쓸 병에 걸렸다.
젊은 나이라고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정말 어린 나이에 소위 ‘불치병’에 걸렸으니…
그 마음의 무게가 오죽 했으랴.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내가 그 형제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고,
그 자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이니…

지난 주말,
그 자매가 결국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두 아이와, 아직 젊은 그 남편을 남겨두고.

문상을 다녀온 내 동생의 말에 따르면…
함께 문상을 갔던 K 전-현직 간사들은 많이 우는데,
그 형제는 퀭한 눈으로 울지도 않더란다.

나는 비오는 주말에,
많이 울었다.

2.
지난주 한국 출장 때,
우리 장모님을 정말 잠깐 뵈었다.

장모님께서는,
특유의 밝음을 물론 보이셨지만,

우리 장인 어른 떠나보내신지 얼마되지 않은 그 모습을 뵈면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2월 14일이 우리 장인어른의 생신이고,
2월 15일은 우리 장모님의 생신이시다.

나는 우리 가족들의 생일은,
calendar에 넣어놓고 일주일 혹은 보름 이전에 미리 내게 notification을 주도록 setting을 해 놓는다.

한국에 있을때,
“2월 14일 장인어른 생신” notification이 내 전화, outlook에서 동시에 떴다.

정말 많이… 많이… 마음이 무거웠다.
장인 어른 살아 계실때, 가까이 자주 뵙고 지내지도 못했지만…
그 어른 한번 다시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내 나이가 이제 한국 나이로 47살이다.
40대 후반으로 가는 셈이다.

‘젊었을 때’에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이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정말 시간이 빨리 간다.

그래서 한편 감사한 것은,
이 땅에서 보내게 될 시간이 그리 아주 길~게~ 남은 것이 아니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뭐 내가 소위 ‘평균수명’ 대로 산다면,
앞으로도 물론 40년 정도는 더 살게 되겠지만…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시간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을 테고)
그렇지만 앞으로 시간은 정말 후다닥~ 지나가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참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
우리 장인 어른도,
너무 일찍 떠나버린 우리 ㅇㅅ 자매도.

블로그를 옮길까 합니다.

블로그를 옮길까 합니다.

티스토리에 계속 contents를 쌓아놓을 경우에, 이게 그냥 훅~ 날라가도 속수무책이겠다 싶기도 하고요,

기독교유사단체가, 제 글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티스토리 쪽에서, 그걸 그냥 제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후다닥 제 블로그에서 없애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좀 뿔이 나기도 했습니다.

또,
저는 뭐 아주 많은 분들에게 제 생각을 나누는 것 보다는,
제 생각을 더 이해해주시고, 저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있는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데,
이렇게 한번 옮기면, 정말 제 생각에 관심을 갖고, 제게 좋은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 분들만 옮겨오시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번주는 양쪽 모두에 포스팅을 하고, 한번 옮기는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친구들/독자들께서도, 어떤 쪽이 좋은지 짧게 한마디씩 해 주세요~ ^^

예전 글들은,
Wordpress의 plug-in을 통해서 일단 여기로 옮겨오긴했는데,
글 간격 등이 좀 자연스럽게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첫 페이지에 뜨는 글들은 약간 에디팅을 하긴 했는데, 예전 것들은 여전히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

그래도,
예전 것들은 예전 블로그에서 볼 수 있으니,
모든 글들을 다 다시 에디팅하는 노가다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참고로 이 블로그는 나눔고딕 폰트를 사용했습니다.
나눔고딕은 이곳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옆의 링크는,
제가 아는 분들의 블로그 가운데, 현재 active한 것들만 올렸습니다.
당신의 링크가 빠져있다면, 당신이 최근 블로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참 다들 열심히 산다….

1.
아직, 아시아 출장 이후 시차도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아침 일찍부터 회사에선 바빴다.

뭐 네가 돌아와서 좋다는둥… 뭐 그런 마음에 없는 인사들을 하면서,
내가 해야할 일들을 사람들이 쏟아 놓는다.

왠만해선, 내가 이메일을 잘 밀리지 않는데…
그저께 비행기타고 미국으로 날아오는 약 12시간동안 쏟아진 50여개의 이메일을 처리하느라, 이메일이 밀렸다.

이래 저래 바쁘게 하루를 지내고,
밤 늦게까지 컨퍼런스 콜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다 되어 간다.

그제서야 저녁을 먹고,
이메일 밀린 것 몇개를 보내는데…
10시반이 넘은 시간에도 이메일 답장이 척척 잘들 날아온다.

참…
다들 열심히 산다.

2.
대학원 시절,
일에 의욕이 없어서 참 게으르게 살던 기간이 있었다.
정말 이거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냥 일하는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때, 참 억지로… 정말 억지로 일을 하면서,
내게 하나님께서 성실함을 회복해 주시길 기도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성실함을 회복시켜 주셨을때,
참 감사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오히려 내 영적 건강에 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늘 stress를 받고 있고,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없다.
사람을 돌아보며 공감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일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한다.

3.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야기할 때,
Running with God 이라고 하지 않고,
Walking with God 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running이 아니라 walking 이다.

그런데,
다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이메일을 주고 받는 이런 context 속에서,
과연 Walking with God 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많이 몸이 바쁘더라도,
마음이 바빠지지 않는 비결이 과연 있는 걸까?

4.
사람들이,
참…
다들….
열심히 산다…
나도…

탁월함과 겸손

1.
낮아짐/겸손 없는 탁월함은 그 자신과 주변에 독이 된다.
탁월함이 선용되기 위해서는, 겸손/낮아짐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낮아짐 없이 탁월한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탁월한 사람들을 겸손하게 하실때, 비로소 그 탁월함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탁월한 사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탁월한 사람이 아주 깊은 고통을 통해 진주와 같이 맺어진 성품과 깨달음을 내어 놓을때,
세상이 담아 낼 수 없는 빛이 나게 된다.

3.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런 의미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그 탁월함이 자신에게 독이 되던지,
아니면 그 탁월함이 빛을 발하기 위해 깊은 고난을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4.
탁월함은 그 본질상 태어날때부터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겸손함은, 신앙의 성숙에 따라 안에서 길러지는 열매이다.

겸손한 없는 탁월함은 독이지만,
탁월함 없는 겸손은 아름답게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과도 같다.

그리스도인이,
탁월함이 아니라 겸손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5.
나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

집이 그립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출장 중에도 글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결심했었는데… ㅎㅎ
글을 써야해서 쓰게되지 않고, 기록을 남기고 싶어 쓰게 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혼자서 민우를 챙기면서 일하느라 많이 힘들 아내를 생각하며,
학교공부 등등으로 정신이 없을 민우를 생각하며,
심지어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산호세 오피스의 ‘일’들을 생각하며,
그냥, 내 지루한 일상을 생각하며…

집에 가고 싶다.

공항에서,
아내와 딸을 위해 작은 기념품 하나씩 사고,
비행기 안에서 정신없이 자게되겠지.

감정적 manipulation (3)

감정적 manipulation에 빠지는 경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1.어떤 사람이 소위 ‘은혜를 받는’다. (신앙적 깊은 감동을 체험한다.)
이것은 정말 참된 감동일 수도 있다.

2. 그 사람이 그렇게 경험한 감동을, 감격적으로 표현하고 나눈다.

3. 그렇게 감격적인 신앙의 표현이,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4. 그런 감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그 감정을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진정한 감동의 결과로 감정을 표현하던 리더가, 그저 신앙의 일상적인 반복의 형태로 그 감정을 표현하게되는 transition을 거친다.

5. 그 감정적 표현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고, 계속 그것을 추구한다.
이때 리더는 그런 대중의 요구에 굴복하여, 감정적 표현을 manipulative하게 사용한다.

6. 결국,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는 리더와, 그것을 누리는 consumeristic한 대중이 서로 암묵적인 합의에 이르고, 감정적 manipulation이 신앙표현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