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8)

마카베오하 7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안티오쿠스왕이 유대인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때 한 어머니가 일곱자녀와 함께 있었다.
그 어머니와 일곱자녀에게 이방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먹지 않으면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죽였다.

그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거부하고 처첨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는 오히려 그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당당하게 죽음을 마지하도록 이야기한다.
결국 그 자녀들은 한사람씩 그 형제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고문끝에 처형을 당하고 어머니도 나중에는 죽음을 마지한다.

여기서 이 어머니와 일곱아이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음식규례였다.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나? 그것은 그들에게 경계표지(boundary marker)였다.
돼지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표지(marker)였던 것이다.

경계표지는 그런 역할을 한다. 그것 자체만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그것이 경계표지로 주어졌을때 그 사람들에게 그것이 의미가 있게 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identity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나는 술이 지난 세대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런 경계표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술 자체를 먹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그 경계표지를 지킴으로써 identity를 스스로 확인하고 지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서신 등에서는 경계표지를 지나치게 높이는 것을 많이 경계한다. 그 의미를 살피지 않고 형식만 남아있는 것에 대하여 아주 harsh하게 비판한다. 특히 바울은 할례 문제에 대해서 타협할수 없는 것이라며 할례 무용론(?)을 주장하고 할례를 이야기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런 맥락에서 성경을 읽고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경계표지 자체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 성경구절 등에서는 경계표지가 신앙의 본질인것과 같이 여겨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 경계표지가 있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술 (7)

한국에서 내가 술을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거부했던 것이 과연 옳은 신학적 관점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 내가 생각하기엔, 지나쳤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

그것은,
내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완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거부하고 거슬러야 할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20대 어린 그리스도인이었던 내게 술을 거부하는 일을 했던 것은 세상에 대항해서 사는 counter cultural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에도 평생 세상을 살아가는 내 기본적인 자세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교회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할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하며 cool하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 멋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술 문제로 교회에 환멸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cool하게 술을 마시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가끔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래, 술을 그렇게 cool하게 마시는 거 좋은데…
그래서 지금 네가 거부하고 있는 세상의 문화, 시대정신은 무엇이냐?

네 불이익을 감수해가며,
왕따가 될 것을 감수해가며,
비웃음을 사고, 조롱을 받고, 대단히 불편한 것을 감당해가며…
그렇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 정말 네게 있느냐?

술 (6)

내가 회심 경험을 한 후,
술을 금하는 한국 교회에 있으면서… 한국의 술 문화는 내게 대단히 큰 어려움이었다.

나는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code of conduct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직장에 들어갔다.
내 첫 직장의 부서에서 나는 60명중 막내였다.
그 부장은 나보다 20살쯤 많은 학교 선배였다.
그 부장이 60명이 다 같이 앉아있는 회식 자리에서, 나를 막내라고 따로 불러서 자기 옆에 앉히고는 내게 술을 권하곤 했다. 딴에는 나를 아낀다고 그렇게 한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술을 마시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야말로 애송이가. 까마득하게 높은 직장상사이자 선배가 주는 술을 받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그리 예쁘게 봐줄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내 ‘신앙의 양심’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부장은 회식때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꼭 60명의 부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를 불러서 옆에 앉히고는 술을 받으라고 하곤 했다.
정말 많이 힘들었다.
부 회식이 있는 날은 회사 가기가 싫을 만큼 힘들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이 술자리로부터 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할때가 많았다.

지금 내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부장이 주는 술잔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술 (5)

한국 사회를 생각해보자.
나는 사실 한국을 떠나온지 오래되었으므로 정말 요즘 한국의 술 문화가 어떤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 술문화에 여전히 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걸 바탕으로 생각해보자면…

여전히 한국에서의 술 문화는 마초적이고 강압적인 면이 있다. 술을 권할때 그것을 거절하기 대단히 어렵고, 특히 어른이 권하는 술을 거부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더 어렵다.
남자들끼리는 싸나이가… 그러면서 술을 마시는 마초적인 문화가 많이 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술을 거부하면 마치 술 권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거부한다는 이상한 의식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술 문화는 대단히 현실도피적이다. 드라마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괴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지곤 한다. 혹은 없는 용기를 내려고 할때 술의 기운을 빌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모습도 많이 나타난다. ‘나’를 술로 지움으로써 ‘내가 아닌 나’가 ‘나’를 replace해내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남자들의 술 문화는 매우 자주… 성적 문란함을 동반한다.
접대라는 이름으로 성매매를 하는 더럽고 추한 일들이 여전히 대단히 흔하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통해서 듣는 모습들은 거의 역겨울 수준이기까지 하다.

나는 한국에서 소주를 마실때,
아내와 남편이 퇴근길에 동네 수퍼마켓에서 소주 한두병을 사서,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TV를 함께 보면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이라면…
술 마시는 것에 훨씬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술 문화는 그렇게 밝지 않다.
강압적이고, 어둡고, 현실도피적이고, 비도덕적인 면이 많이 있다.

술 (5)

한국 기독교가 금주를 했던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청교도적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혹은 그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금주 자체가 기독교에서 강조되어야할 경건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또,
한국에 와 보니 술 때문에 개인과 가정이 망가지는 일들을 많이 봤다고 들었다.
가난한 집에서 남편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술에 빠져서 사는 모습등이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고.

첫번째 이유로 교회에서 술을 금하는 것은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므로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두번째 이유로 교회에서 술을 금했다면, 그것은 그 상황에 따라서는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것이겠다.

다시 말하면,
술을 금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도그매틱하게 찾는 것 보다는…
과연 그 사회에서 술이 어떤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술을 금하느냐 하는 문제를 교리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문화적으로 따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교회에서 술을 금했던 것은 그런의미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술 (4)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냥 그게 몸에 잘 맞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나는 술을 마시고 정신이 알딸딸해진 것이 그렇게 좋아보이질 않는다.

이건 아마도 내가 술을 취해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술 취하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꽐라~가 되어가지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걸 혼자서 겪는건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니다. ^^

맞닥드려야하는 현실이 있는데 그걸 술이라는 것으로 회피하는 것도 건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겁해보일때도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함께 약간 loosen up 되어 즐거워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니라도 생각한다.
그러나 맨정신에는 뭔가를 잘 할 수 없고, 술이 한잔 들어가야 그걸 할 수 있다는 것은 회피가 아닐까.

어색한 사람들끼리 술 한잔 하면서 서로 그 어색한 것을 없애는 것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매번 좀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때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건 좀…

힘든 일이 있을때 술을 마시면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매번 어려운 일이 있을때 마다 술을 마시면서 그걸 ‘잊는’ 행동은 좀….

어색한 것을 술로 좀 풀고, 힘든 일이 있을때 술로 그것을 좀 달래고,
물론 즐거운일이 있을때 술을 사람들과 함께 마시면서 기뻐하는 일은 다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삶은 맨정신에 이루어져야 하고, 맞닥드려야하는 현실은 술기운이 아니라 맨정신에 살아가야 한다.

나는 성경에서 독주에 대해서 경계를 한다거나,
술취하는 것을 건강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술에 가끔 취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술 취해서 사는 것은 나쁘다고나 할까.

술 (3)

나는 기독교가 술을 종교적인 규율로서 금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술 한잔 걸치고 취해서 흥얼거릴줄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것은,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전에 아마도 예수님과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지 않았을까 싶다.)

성경이 술에 취해서 제 정신 못차리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기는 하지만,
술 자체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술은 풍요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또 한편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 술 마시지 않는 것 으로 규정되는 것은 참 안타깝다.

기독교인 = 사랑이 많은 사람들
이라던가…
기독교인 = 정직한 사람들
이라던가…

뭐 이런 것이 기독교인의 marker가 되어야하지 않나?
겨우 하찮은 술마시고 안마시는 것 가지고 째째하게…

술마시는 것을 교조적이으로 금지하는 문화가 숨이 막혀셔 기독교에서 (혹은 제도교회에서) 뛰쳐나오다시피한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참 안타깝다.

(그럼에도 술을 절제하고, 심지어는 심하게 discourage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다음의 글에서 더 할 예정이긴하다. ^^)

이틀 블로그 쉽니다.

7월 첫째주에 시카고에 다녀왔고,
그 후에 거의 바로 한국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이틀동안은 미네소타에 가야하고,
8월중에 열흘정도는 또 일본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뉴저지에도 한번 가야하고,
최근에 develop되는 일이 하나 있어서, 독일에도 한번 가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글타래에서 또 한번 다루겠지만 커네티켓에도 한번 가야할수도 있고요.

이거 갈때마다 블로그를 쉬면,
거의 글쓰기가 안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일 모레 이틀은 어쩔수 없이 에너지가 딸려 쉬겠습니다. ^^

한번 얼굴보자, 만나자…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충 대여섯명은 되는데,
이 출장 폭풍들이 좀 지나면 꼭 한번씩 보면 좋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틀 쉽니다. ^^